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목 Nov 30. 2020

연재소설 <산책> 2

강남역에서의 하차.


아침 출근길, 강남역으로 향해가는 지하철 안은 인간들이 자기 수양을 하는 곳이다.

자신의 몸을 종잇장처럼 구겨 넣어야 진입할 수 있고 웬만한 바디체크에는 긴 숨을 크게 들이쉬며 욱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억눌러야 하고, 가끔 어쩔 수 없이 맡게 되는 옆사람의 입냄새와 앞사람의 정수리 냄새는 코로 흡입되어 아직 덜 깨어있는 뇌를 카페인보다 더 강력하게 각성시키지만, 정신이 번쩍 드는 것에 위안을 삼아야 한다.  

정수리의 냄새는 성별을 초월하여 진한 냄새를 풍긴다. 회사에서 어느 정도의 중역 자리에 오른 것 같은 남자는 정수리에서 담배 쩐내가 올라오고 이제 막 직장생활을 시작한 것 같이 한껏 치장한 여자의 정수리에서도 향긋한 향수 내음을 뚫고 고약한 냄새가 올라온다. 정수리 냄새는 솔직하다. 아무리 멋진 옷을 입고 멋진 백을 들고 있어도 정수리 냄새는 개의치 않고 본연의 냄새를 풍긴다. 참으로 다행인 건 누구도 자신의 정수리 냄새를 맡을 수 없다는 거다. 출근 길 지하철안에서는 시비가 붙는 일도 흔하다. 네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라고 싸우는 광경보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다른 이들의 모습은 더 흥미롭다. 목탁을 치는 스님처럼 매우 평온한 모습으로, 불쌍한 중생을 쳐다보는듯한 한없이 초탈한 표정으로 "새삼스럽게 왜 그래 들.." 이렇게 말하는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본다. 세상이 참 빠르게 변한다고 하는데 그럼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도 바뀌어야 한다. 과거의 예술가들이 괴팍하고 특출 난 사람들이 었다면 현재는 평범한 범인들이, 과거의 스타들이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힘든 선망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다가가기 편한 이웃집 오빠 동생 같은 사람이, 훌륭한 설교를 늘어놓는 목사나 절간에서 묵언 수행하는 스님들이 종교인이 아니라 지금은 매일 정해진 출근시간을 위해 지옥철을 인내하며 쉼 없이 반복되는 업무에 매진하는 직장인들이 오히려 종교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직장에 도착한다고 평화의 시간이 오는 건 아니다. 성격이 괴팍하고 꼰대 같은 상사의 업무지시와 재미도 없는 무용담을 매우 성심성의껏 들어주는 고매한 인격, 친구와 이웃이 부동산으로 큰 시세 차익을 얻었다고 자랑을 늘어놓아도 겉으론 평정심을 유지하며 축하해주는 자제력, 팍팍한 월급으로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가며 생활을 유지하는 청렴도. 어찌 이 시대의 종교인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그에 비해  비싼 외제차를 몰고 다니는 종교인을 여럿 보기도 했고 신도들이 갖다 바치는 일용할 양식으로 누구보다 폼나게 사는 종교인을 목격하기도 하였고 신도들의 피땀 어린 성금으로 교회와 절의 크기를 넓히는데만 치중하는 종교인도 지켜보았다. 가끔은 고민의 해답을 종교인보다 더 명쾌하게 내려주는 평범한 현자들이 우리 주위에 널려 있고 종교인보다 성욕이나 물욕을 자제하고 사는 사람도 주위에 많다. 그것이 타의든 자의든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종교는 기업화되어 가고 있고 평범한 삶을 사는 범인들이 종교인에 가까운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숭고한 삶을 살고 있다는 거다.

십 년 전, 나는 사회로의 첫발을 강남역에서 내딛고 싶었다. 아침 출근길의 지옥철도 클럽에서의 부비부비처럼 즐거울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몇 년은 그랬다. 강남역으로 향해가는 지하철 2호선 탑승은 멀쩡한 사회 구성원이라는 일종의 확인증 같은 것이기도 했고 직장인들 사이에서의 부대낌은 항상 겉돌기만 했던 지난날에서 탈출했다는 상징 같은 것이기도 했다. 성공은 바라지도 않았다. 단지 인간답게 살고 싶었을 뿐이다. 먹고 싶은걸 먹고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고 좋아하는 사람과 연애도 하고 서울의 야경을 드라이브할 자차 정도, 그뿐이었다.

보험회사의 영업직은 일한 만큼 수당을 받아 간다는 점에서 정수리 냄새만큼  본질에 가깝고 노골적이지만 솔직해 보였다. 더 벌고 싶으면 그만큼 더 계약을 체결하면 되었고 계약이 없으면 자연히 퇴사되는 시스템은 자본주의의 속성에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당시 나는 젊었고 열정과 패기가 넘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건강했다.

20대를 오로지 바쳤던 대학로에서의 시간은 나에게 영광도 주었지만 상처도 남겼다. 직업은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은 맞기도 했지만 틀리기도 했다. 2개월의 연습과 한 달의 공연이 끝나면 나머지 9개월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 직업이 배우인지 노동자인지 헷갈리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물론 배우도 노동자였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걸 하기 위해 하기 싫은걸 해야 되는 것은 상황은 부조리하게 느껴졌지만 희생은 항상 필요한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좋아하는 걸 하기 위해서 희생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무의식 속에서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도 무의식은 나도 모르게 교육되고 체화되어 있는 실체가 없는 진리였다. 누군가 소개팅을 주선해준다고 하면 당당하게 말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연애까지 할 수는 없다"라고. 행복도 사랑도 다음 기회로 유예시키는 건 결국 사람의 본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기 파괴적인 행동이었단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연애를 못하는 시기가 길어졌지만 무엇보다 무대에 설 수 없는 시간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무대도 일자리도 부동산도 파이는 정해져 있지만 먹고 싶은 사람이 더 많은 수요가 불충분한 시장이었다. 자본주의의 시장논리와는 동떨어져 보이는 예술도 경쟁이 녹록지 않았다. 연기를 하는 시간보다 다른 일을 하기 위한 시간이 늘어났다. 편의점 알바, 무대 설치, 명품백의 수작업 공정, 택배 상하차 등 다양한 일을 하며 본업은 점점 멀어져 갔고 이도 저도 아닌 변태(變態)가 되어갔다. 직업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인간으로서 오랜 기간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 것 또한 변태가 되어가는 방증이었다.

결국 본성에 대한 본능적인 추구는 더 이상 나를 변태로 놔두질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예술을 한답시고 마냥 한량처럼 자유롭게 살면서 인간의 본성을 충족시킬 만큼의 기개가 나에게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예술가의 재능은 다른 게 아니라 결국 지속 가능하게 예술을 할 수 있는 일종의 배짱, 기개였다.

밤 10시에 시작해서 새벽 3시에 끝나는 택배 상하차 일은 그러한 생각을 더욱더 촉발시켰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십 년 전 택배 상하차 일은 신용불량자, 전과자, 사회의 낙오자들이 몰리는, 일당은 세지만 하루를 버티기 쉽지 않은 힘든 일자리였다. 동갑내기 배우 친구는 작업과 동시에 쏟아지는 택배물량에 기겁한 체 일당도 받지 않고 자리를 떴고 자존심 센 후배 한 명은 작업반장의 반말 지시에 하던 일을 놓고 집으로 돌아갔다. 새벽 3시 일이 끝나면, 지친 사람들은 간이버스에 몸을 실은 체 이 동네 저 동네를 돌며 마치 택배를 분류하듯 떨궈 내렸다. 서울 외곽에 이런 동네가 있었나 싶은 곳까지 깊숙이 들어간 차의 헤드라이트는 순례하듯 노동자들의 집을 비춰주었다. 어둠 속에서, 모두 사라진 줄 알았던 창녀촌의 시뻘건 조명이, 주택가들 사이에서 홀로 빛나는 십자가 마냥 기다리고 있었고, 나와 항상 같은 조였던 말없는 사내는 언제나 소주 한 병을 사들고 붉은 조명 사이로 보이는 좁은 골목길로 유유히 사라졌다. 차는 항상 제일 마지막에 나를 떨궈 주었고 자연스럽게 맨 뒷좌석 후미진 곳에서 눈을 붙일 수 있었지만 헤드라이트가 가리키는 그들의 터전을 목도하는 일은 출근길 정수리 냄새만큼이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30살, 최상의 삶이 아니라 최악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 이후로 간이버스 뒷자리에서 눈을 질끈 감고 있으면 안 보일 거라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잠을 청했지만 그들이 갖고 내리는 봉지 속 소주병이 부딪히는 소리는 청량하다 못해 날카로워서 나의 가슴속에 꽂혔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면 한동안 쉽사리 잠을 청하지 못했다.




작가의 이전글 연재소설 <산책>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