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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목 Nov 19. 2020

연재소설 <산책> 1

고라니와의 만남.


집 앞에 개울가와 매실나무가 있고 아름다운 산책로가 있다면 당신은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것인가. 봄에는 벚꽃이 만발하고 가을이면 낙엽으로 수놓은 산책로가 보이는 집으로 이사한 이후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밤새 참아온 볼일을 잠시 접고 거실 창으로 다가간다.

좀 더 시야를 멀리 두면 개울가의 청둥오리도 보이고 조금 더 신경을 쓰면 검단산 자락도 보이니 멀리 떠난 여행길에도 생각나는 그런 풍경이다. 한참을 앉아 멍하니 바라본다. 바람이 조금 매섭지만 가을이 지나간다고 말하는 것 같아 서둘러 채비를 하고 집 밖을 서둘러 나온다.

산책로를 따라 플레이리스트의 캐논볼 애덜리의 경쾌한 "AUTUMN LEAVES"을 듣다 보면 어느덧 북한강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귓가에 색소폰 소리가 울려 퍼지듯 시야에 장관이 펼쳐진다. 가을에는 애덜리의 색소폰이 참 듣기 좋다. 어떤 계절엔 어떤 음식이 더 당기듯  음악도 계절을 탄다.

제주도 동쪽 바다가 훤히 보이는 게스트하우스의 사장에게  물었었다.

"매일 보면 지겨울 때도 있지 않나요?"

지금 막 연극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온 배우처럼 한껏 늘어뜨린 장발에 펌을 해서 머리를 묶고 있는 사장은 긴장을 놓지 않는 또렷한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어휴~ 매일 달라요~겨울이면 겨울대로, 비가 오면 비 오는 대로.. 다르죠"

아차 싶었다. 물어봐야 할 질문을 했어야지.

이곳에 올 때마다 제주도 게스트하우스 사장의 말이 떠오른다. 오늘따라 바람이 세차게 불어 강의 출렁임이 분주하다. 오늘의 강은 어제와는 다른 느낌이다. 좀 더 생기가 있고 그런 만큼 색이 오묘하다. 짙은 에메랄드빛.

지난여름, 수마(水魔)가 지나간 자리는 마음이 아팠다. 강이 넘치다 못해 산책로를 덮쳤으며 그곳을 감싸고 있던 자연은 폐허가 됐다. 강의 상, 하류에서 흘러들어온 온갖 잡동사니가 버드나무와 수크령들 사이로 걸터 있었다. 용케 살아남은 나무들도 있었지만 버티다 못해 휘어진 나무는 산책로를 막기도 했고 서로 안고 뒤엉켜  휩쓸리지 않고 버티다 뽑힌 나무들도 있었다. 한동안 쳐다 보기가 괴로웠다. 무성하고 짙은 푸르름을 자랑하던 자연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버드나무 사이에 노란 짐볼이 보인다. 어디서 흘러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이곳과 짐볼은 참 어울리지 않는다. 짐볼이 놓여 있는 자리는 고라니 가족이 풀을 뜯어먹고 뒷다리의 건강함을 자랑하던 그들의 놀이터였다.

쓰레기 매립지처럼 변한 자연에서 한동안 보이지 않는 고라니 가족의 행방을 걱정했다. 갑자기 불어난 강물에 떠내려 갔는지 아니면 예전 같지 않게 더럽혀진 이곳을 떠나 다른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났는지. 언제부터인가 고라니 가족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들에게 관심을 가진 건 내가 먼저 일 거다.  근데 그게 참 명확하지가 않다. 어두운 산책길에서 엄마 고라니가 숲 속 사이를 뛰어다닐 때 나와 눈이 마주쳤으니. 그게 고라니 가족과 나의 첫 만남이다. 우리 둘 다 옆을 쳐다보다 우연히 마주쳤으니 쌍방이라고 말하고 싶다. 짧은 찰나에 우린 무언가 친밀함을 느꼈는데 그건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다. 그 이후로 고라니 가족은 아주 가까운 데서 인사를 하기도 했고 멀리서 목격되기도 했다. 엄마 고라니와 두마라의 형제와 막내로 보이는 새끼. 이놈들이 넓은 자연을 뛰어노는 모습을 보면 무언가가 벅차올랐다. 그 감정은 캐논볼 애덜의 "LOVE FOR SALE"에서 피아노 전주가 끝나자마자 색소폰 소리가 치고 들어올 때, 미세먼지 하나 없는 하늘 아래  예봉산이 자태를 드러냈을 때, 북한강의 출렁임이 빛에 반사되어 일렁임으로 바뀔 때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간절히 갖고 싶던 무엇이었다.


매일 짧은 글이라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이제는 본능에 충실해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은 본능적으로 다가왔고 어두운 산책로에서도 검은 그림자로 보이는 고라니들을 귀신처럼 찾아냈다. 하루는 쫑긋한 귀를 세우고 나를 바라보는 고라니를 발견하고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우린 한참을 그렇게 쳐다봤다. 작은 소리와 행동에도 예민한 고라니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선 최대한 움직이지 말아야 했고. 숨소리도 죽여야 했다. 순간 산책로의 공기에 적막함이 흘렀다.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띄엄띄엄 지나갔지만 우린 아랑곳하지 않았다. 멍하니 서있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 지나갔지만 고라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집중했다. 짧지만 긴 눈인사가 끝나면 어김없이 뒷모습을 보이며 성큼성큼 뛰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고라니의 뒷모습에 매료됐다. 날씬한 다리와 연결된 매끈한 엉덩이는 폭발적으로 뛰어오를 때  내가 그동안 보아온 동물들이 보여주지 못한 생동감 그 자체였다.

산책하는 시간은 자연스럽게 그들이 출몰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해가 지는 초저녁, 녀석들은 뜯어먹을 풀을 찾아 자연에서 산책로로 넘어왔다. 인간들이 고단한 일상을 마치고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에 고라니들은 강을 끼고 있는 자연에서 산책로로 넘어와 풀을 뜯어먹었다. 밤이 되면 차가워지는 강의 온도 때문에 잠들 수 없었을 것이고 산책로를 덮고 있는 무성한 억새풀은 눕기에도 적당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눈에 띄지 않아 유용했을 거다. 그리고 산책로에 밤이 찾아오고 예봉산과 검단산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면 숨어 있던 고라니들은 산책로와 억새풀 사이를  사정없이 뛰어놀았다. 늦은 밤, 산책을 나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산책로를 따라 하얀 파도 같이 일렁이는 억새풀 사이로 고라니가 서핑 하듯 뛰어 노는지 알고 있을까.

밤이 되면 유독 어두워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관심이 없기 때문일 거다. 자신의 눈앞에 뛰쳐나와 시야를 가리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얼굴에 침을 뱉어야 그제야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똑똑 해졌지만 그럴수록 무감각해졌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문제에 무감각 해졌지만 자존심이 달린 문제는 유독 예민해졌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런 내가 고라니 가족의 행방을 궁금해하고 있다. 아니 걱정이 된다. 처음엔 이 녀석들이 노루인 줄 알았다.

쫑긋 세운 귀, 길게 뻗은 목, 얇지만 견고해 보이는 다리, 까맣고 큰 눈망울, 무엇보다 길쭉한 코 끝의 검정 코는 노루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제주도의 노루생태공원을 가지 전까지.

제주도의 렌터카 업체에서 차를 받자마자 이정표를 찍은 곳은 노루 생태공원이었다.

"노루의 수컷에게는 뿔이 있고 고라니는 뿔 자체가 없어요, 흔히 노루 궁둥이라고 불리는 특유의 문양은 고라니에겐 찾아볼 순 없죠, 저기 보이는 검은 굽 같은 건 노루들에게 보이는 특징이죠"

생태공원의 관리인은 보란 듯이 노루의 발끝을 가리켰다. 먹이에 몰려 입을 다시고 있는 노루들은 죄다 검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육지에는 노루가 없다고 봐야 돼요, 육지에서 보이는 노루 비슷한 것들은 모두 고라니로 봐도 됩니다."

제주 특유의 억양을 간직한 관리인은 신기한 듯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다리가 불편한 듯 지팡이를 짚고 있는 그는 생태공원이 마치 자신의 집인 양 편안해 보였다.

"여기는 주로 애엄마들이 애들 데리고 와서 노루 먹이 주러 오는 곳인데.. 젊은 남자가 혼자 웬일이요?"

그는 깊은숨을 들이키며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며 힘들게 말했다. 먹이를 보고 달려드는 노루를 보느라 정신이 없는 나는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그토록 보고 싶던 고라니를 이렇게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먹이를 입에 물고 있을 때 다른 한 손으로 머리와 목을 쓰다듬어 줄 수 있어서 좋았다. 손끝에 느껴지는 털의 촉감은 어릴 때 키웠던 강아지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요크 셔테리어의 부드러운 털과 달리 고라니의 털은, 아니 노루의 털은 약간 뻣뻣했고 질긴 맛이 있었다. 낮 동안에는 숲 속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고 해질 무렵이 되면 대부분 노루들이 숲 속에서 나와 야외에서 생활을 한다."노루의 일일 행동 패턴"이라는 표지판에 나와 있는 내용은 내가 그동안 관찰하던 고라니의 모습과 흡사했다.

"노루가 아니라 고라니였구나.." 하긴 이 녀석들은 큰 귀를 가지고 있었지만 뿔은 없었고 매끈하고 탄력적인 엉덩이는 흰색 반점이 없었다. 하지만 콧등에 하얀 띠가 있었고 뿔 대신 작은 입안에 송곳니를 숨기고 있었다. 생활 반경과 성격도 많이 달랐다. 노루는 야행성이며 온순한 성격이어서 겁이 많지만 고라니는 크게 놀라지 않고 제주도에는  현재 서식하지 않는다. 몇 번의 눈 맞춤과 가까운 거리에서 내가 지켜보고 있음을 눈치챘음에도 식사에 집중하던 이유가 있었다. 그랬었군.

"젊은 양반~이리로 올라가면 거친 오름인데 한번 올라가 볼 테요? 나도 지금 거기서 내려오는 길인데~꼭대기에 올라가면 야생 노루들을 볼 수 있어, 나는 백번을 넘게 올라가서 한두 번 봤으려나"

야생노루를 볼 수 있다는 말에 계획에도 없던 등산을 시작했다. 제주도는 항상 회사에서 버스를 대절해서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는 식의 여행이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건 그날 밤 술에 취해 정신줄을 놓고 노래를 부르던 상사들과 동료들의 초점 없는 눈빛뿐이었다. 300여 개가 넘는 오름 중에 하나를 오르는 것뿐인데 제주도 특유의 울창한 푸르름이 펼쳐졌다. 나무들이 풍기는 숲 냄새와 흙냄새는 이상하리 마치 육지의 그것과 달랐다. 향기로웠다. 이제야 알게 된 것에 후회가 밀려왔다. 한라산은 하루라는 시간과 마음을 먹고 올라가야 하지만 오름의 매력은 꽤 높은 언덕 느낌이라 언제든 올라가서 자연을 만끽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오름 정상에서 다른 오름들이 보였다. 오름들은 저마다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고 적어도 자신들의 높이를 자랑하지 않는 듯 보였다. 한라산 등반 계획을 철회하고 남은 여행 동안 눈에 보이는 오름들을 산책하듯 올라가야지. 오름의 정상에서 가뿐 숨을 들이키며 다짐했다. 늦은 시간이라 오름의 등산로에는 인적이 없었다. 어두워지는 제주 밤하늘 아래 숲 속은 더욱 고요해졌다. 하지만 난 항상 느낄 수 있었다. 산책로의 억새풀 사이로 보이는 고라니들이 움직임 그리고 특유의 냄새. 아니나 다를까, 살짝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경사진 언덕 위에 노루 두 마리가 유유자적하게 앉은 채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놈은 뿔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뿔이 없는 걸 보니 암수 한쌍이었다. 그들은 어떠한 동요도 없이 내가 긍금한지 시커먼 눈동자를 깜박거리지도 않고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안녕~ 노루야~" 나는 손을 흔들며 말을 걸었다. 그들이 긴장감 있게 서있었더라면 할 수 없는 인사였다.

너무도 편하게 앉아 있는 그들에게 그동안 고라니에게 하지 못했던 인사를 건네어 보았다. 고라니가 좀 더 얍쌉빠르게 생겨 야생에 가까운 얼굴이라면 노루의 얼굴은 좀 더 평온해 보이고 순해 보였다. 덩치도 조금 더 컸다.

아무래도 도시 인근의 고라니보다 제주도의 노루들이 좀 더 평화롭게 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나의 손짓에 노루들은 오래간만에 홀로 나타난 특이한 개체에 약간은 놀란 듯 혹은 신기한 듯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을 노루라고 인식하지만 저들은 나를 어떻게 인식할까?. 고라니와 마주 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참으로 웃긴 이야기지만 야생동물과 소통을 바라는 건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컨택트"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12개의 외계 비행물체가 세계 각지 상공에 도착하고 인간들은 그들의 정체와 지구에 온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를 투입해서 소통을 시도하는 이야기. 에이미 아담스의 전작 "바이스" "아메리칸 허슬"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 "파이터"등등 재밌게 본 영화마다 그녀가 출연했지만 신기한 건 볼 때마다 새롭다는 거다. 지적인, 섹시한, 코믹한, 슬픈... 어떤 단어로 설명되지 않고 작품과 캐릭터에 녹아드는 그녀의 연기는 오묘하다는 말이 맞겠다. 실제로 그녀의 외형도 오묘하게 아름답다. 전형적이지 않다. 어느 밤, 케이블 티브이에서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를 방영했는데 사전 정보 없이 우연히 봤지만 이내 자세를 고쳐 세우고 집중하고 봤던 기억이 난다. 언제부터인가 영화든, 자연이든, 야생동물이든 자세를 고쳐 만들고 집중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고 탄식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 순간은 매우 짧게 느껴진다."녹터널 애니멀스"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고 서둘러 감독이 궁금해서 찾아봤다. 영화보다 더 큰 반전은 감독이었다. 톰 포드. 톰 포드라니. 그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줄은 알고 있었으나,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니, "싱글맨"의 트레일러를 보고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에 게이 이야기라니, 톰포드가 잘 만들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더는 관심이 가질 않았지만 "녹터널 애니멀스"를 보니 "싱글맨"이 궁금해졌다. 이영화에서 에이미 아담스의 묘한 매력을 십분 잘 활용했다. 보고 나면 한동안 잠을 이루기 쉽지 않은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암튼 영화에서 에이미 아담스는 외계 생명체와 소통을 시도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녀가 외계 생명체와 대화를 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한일은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방호복을 벗는 데부터 시작한다. 곁에 있던 남자동료들과 지휘본부에선 위험하다고 만류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럼 고라니와 소통을 하기 위해선 나를 둘러싼 옷가지를 벗어던지고  알몸을 보여 주어야 할까. 하하.

일단 상대방은 어떠한 가림도 없이 몸을 다 드러내고 있으니 적어도 공평한 건 맞는 거 같다. 그들에겐 인간의 옷도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 있으니깐. 무엇보다 영화 속 에이미 아담스는 인간이라는 우월감을 버리고 아니 전혀 갖고 있지 않고 동등한 생명체로 다가간다. 인간들의 관계에서도 우월감은 서로 가까워지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 중의 하나니깐. 철저하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또한 에이미 아담스가 다가가는 방식 중에 하나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를 추리하고 인간의 언어를 알려준다. 그 바탕에는 언어는 사용자의 인식구조에 영향을 끼친다는 가설이 존재한다. 고라니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가는 행위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라니에겐 위협적으로 보일 수 있다. 아무리 미소를 보이고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드러내도 고라니에겐 다른 개체의 위협적인 행동으로 보일뿐이다. 손을 흔들어 반가움을 표현하는 건 인간들만의 언어다. 완전히 다른 접근이 필요했다.

영화에서는 외계 생명체는 이방인이었지만 실은 지구에서 어떠한 동물도 이방인은 아니다. 인간, 동물, 나무 그리고 바다 심지어 벌레까지 모두가 주인이다. 단지 인간만이 지구의 주인은 자신들이라고 인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더 재밌는 건 같은 개체인 인간들끼리도 제대로 소통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건 참 슬픈 일이지만 나 또한 그렇게 살고 있었다. 가끔은 진열되듯 펼쳐지는 빌딩 숲 틈새로, 억새풀 사이에 숨어있는 고라니 마냥, 인간들을 유심히 관찰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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