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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목 Jun 15. 2021

헬조선과 꼰대 프레임

지금은  눈에 띄지 않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헬조선'이라는 말이 많이 회자됐다.

이 단어의 기원은 어디에서부터 유래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짐작하건대 인터넷 커뮤니티, SNS 등 이른바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사어버문화일것이다.

헬조선은 금수저 흙수저로라는 수저 계급론으로 설파되었고 워낙 많이 인용되다 보니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계급론에 자신의 처지를 대입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꼰대라는 용어가 자주 회자되는데 꼰대라는 단어는 솔직히 새로운 단어는 아니다. 다만 예전에는 당사자 앞에서 차마 말은 못 하고 뒤에서 몰래 욕했던 단어가 지금은 공공연히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인터넷과 사어버문화는  어떤 현상을 사이버 공간 즉, 특정 커뮤니티에서 공감을 얻고 지지를 얻으면 무섭도록 빠르게 전파된다는 특징이 있다. 과거에는 젊은이들의 과감한 생각이나 반항적인 행동은 대중문화 즉 음악이나 영화로 분출되었다.

하지만 현시대에 이르러 대중문화가 젊음의 표상을 담기엔 돈에 물들어 버렸다.

그러므로 현재의 젊은이들의 생각과 반항은 사이버 문화에서 활발하게 생산되고 소비된다. 아마도 스티브 잡스가 만든 스마트폰이라는 물건은 인류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평등을 가져온 것 같다. 

최근에 이준석 현상은 그런 문화의 영향력을 실감케 한다. 

젊음은 과감하고 솔직하고 직설적이다.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빠르기 때문에 어떤 실체에 대해 답을 빨리 알고 싶어 한다. 이것은 젊음의 특성이다. 이준석이 이번 대구에서 가서 한 박근혜 탄핵 발언은 그동안 어떤 보수인사도 결자해지 못한 연설이었다. 아마도 젊은 유권자들은 그 짧은 몇 마디의 말에 보수의 변화를 감지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앞으로 여당뿐만 아니라 같은 당의 기성 정치인들은 이준석에게 하는 언행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꼰대 프레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나이를 먹을수록 꼰대가 되어 가는 걸까?

아마도 고민의 시간으로  불면의 밤을 지새웠던 지난날의 청춘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누구나 인생을 살다 보면 40대가 넘어서면서 자신들만의 확신이 생긴다.

"맞아, 그때 그런 일을 겪어서 힘들었지만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아."

"맞아, 내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저런 사람은 아마도 그럴 거야"

"맞아, 내가 그럴 거라 했잖아"

맞아, 는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겪는 일이지만 세월은 그것을 더 강력하게 공고하게 만든다. 맞아,는 확신이다. 

이런 확신은 개인적인 경험으로 비추어 보아 열심히 사신 어른들,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력이 있는 어른이 더 심화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한 개인에게 축적된 경험의 자산은 소중하다. 다만 인터넷 보급과 다양한 커뮤니티의 활성화로 이제 더 이상 대면 인간관계에서 조언을 얻고 싶어 하지 않는 데 있다. 그들이 원하는 건 관계의 수평이지 수직적인 인간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조언이 길어지면 잔소리가 되고 잔소리에 확신이 서게 되면 이미 조언의 좋은 의미는 퇴색되고 관계는 상하관계가 된다. 결론적으로 나이와 직책을 무기 삼아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에 반감이 큰 것이다. 

이른바 밀레니얼 세대와  MZ세대로 분류되는 이들은 일찍이 해외 문화를 여행이나 유학을 통해 자연스럽게 경험했기 때문에 한국사회에  남아있는 장유유서 문화를 그대로 수용하기란 쉽지 않다. 나이에 따라 사회적 순서와 질서가 있다고 말하는 유교문화는 그들이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공정의 가치관에도 부합되지 않는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사이버 문화의 생산 주체인 2030 세대에 의해 꼰대라는 단어가 어른을 비하하는 단어로 정착되므로 일명 꼰대 프레임이 생긴다는 것이다.

인간관계나 직장 내에서 직급이 높고 나이가 많은 선배들이 자신의 경험담이나 과거에서 얻은 교훈을 말하려고 할 때 자신을 검열 함으로써 사회에서의 어른의 역할이 위축되고 힘을 잃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경험과 연륜이 위대한 이유는 숙성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같이 무더운 여름날, 편의점 냉장고에서 바로 꺼내 마시는 캔맥주는 즉각적으로 갈증을 채워주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이지만 가끔은 지하 깊숙한 저장창고의 오크통에서 몇십 년 숙성한 와인과 위스키를 마실 때  우리는 시간이 주는 깊이를 맛보기도 한다.

깊이는 절대 시간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탄생할 수 없는 마법이다.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회자되다가 사라진 이유는 사이버 문화의 특징인 즉각성과 편의성이 낳은 결과라고 본다. 자신들이 바라보는 사회의 한 단면을 편의적으로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는 지옥을 뜻하는 헬과 대한민국을 지칭하는 조선이었다.

물론 대한민국은 아직도 부조리함이 넘치는 불완전한 국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모든 대상은 한 단어로 규정하기엔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다. 명과 암이 존재하는 모든 대상이 그러하듯 한 국가도 마찬가지다. 다만 사회는 젊은이들이 만들어내는  이런 현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통해 어른들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진단해야 한다.

수저 계급론도 마찬가지다. 예나 지금이나 금수저는 존재했고 흙수저도 항상 있었다. 다만 SNS의 파급력으로 그런 계급이 노골적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물론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금융화로 예전보다 가진 자들이 더 부를 쉽게 불리는 사회가 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금수저와 흙수저의 계급론에서 간과되는 것은 과정이 주는 경험의 위대함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로부터 쉽게 부를 물려받은 사람은 위기가 닥쳤을 때 재산을 지킬 힘과 경험이 미천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헤쳐나갈 멘털이 부재하다.


세상은 불공평해 보이지만 다르게 보면 일견 공평하기도 하다. 흙수저가 맨바닥에서 열심히 축적한 부는 절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과정은 즉각적인 보상보다는 지지부진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시행착오로 쌓인 경험과 해답을 찾으려는 멘털이 존재한다. 흙수저의 경험은 돈 주고도 못 사는 다이아몬드다.

인터넷의 발달로 빠르게 생성되는 사이버 문화는 그래서 단면적이고  이런 다이아몬드가 싸구려로 취급되는 것 같아 아쉽다.

젊음은 순간이다. 누구나 청춘을 지나오지만 누구나 좋은 어른이 되지는 않는다.

빠르게 생산되고 소비되는 초고속 사회에서 젊음이 사회를 바라보는 현상을 통해 기성세대들이 그동안 만들어온 결과물을 돌아보는 성찰도 필요하지만

젊은이들이 귀 기울여 질문을 하고 싶은 지혜로운 어른의 역할 또한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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