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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목 Dec 27. 2021

소설<알쏭당>

냄새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그는 말이 없었다. 엄마는 묵묵히 운전만 하는 남편이 신경 쓰였는지 재능을 잃어버린 독심술사처럼 이런 악천후에 식구들을 고생시켰다며 아들을 책망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여러 말을 하며 영화의 감상을 잊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꾹꾹 눌러 간직하고 싶어 입술을 여미는 듯 보였다. 그리고 몇 날이 지나고 궂은 날씨를 뚫고 어렵사리 본 영화에 대한 감흥이 어느 정도인지 헤아릴 수 있었다. 엄마는 사내 일보에 실린 아버지 기사를 내게 보여주며 애비가 이런 사람이라고 가르치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남자 형제들 틈바구니에서 외동딸로 자라 당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남성에 쉽게 복종하지 않는 여성 상임을 자부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남편보다 운전에 능숙해서 아침 출근길이 급박해지는 날이면 기다렸다는 듯이 키를 받아 그를 태우고 차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완벽한 곡예 운전을 하고 제시간에 맞춰 출근을 완성했다. 이 동네에 이사 온 배경에는 그녀의 과감한 결단이 있었고 밤샘을 마다하지 않고 청약 순서를 따낸 것도 엄마였다. 엄마는 웬만한 남자보다 순간 상황판단 능력이 뛰어났고 대찬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도 은연중에 지배하고 있는 공동체적 가치를 철저하게 외면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침 출근길과 퇴근길에는 우릴 깨워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게 했고 존경하는 사람을 묻는 학교 제출 서류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버지를 적으라고 했다. 존경이라는 정확한 의미를 알기 전에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배운 셈이었다 혹은 아비에 대해 알기도 전에 아버지를 존경한 거나 다름없었다.

"여기 보이지? 너희 아버지가 이런 사람이다~"

증권회사, 검은색 잔광판이 흡사 경마장의 그곳과 매우 유사하게, 마권을 잡고 전광판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도박꾼들이 몰리는 객(客) 장이라는 곳, 투자라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을 때였다. 단지 울룩불룩 근육이 움직이는 동물 대신 주주가 있고 이윤을 내는 회사가 있었고 거의 매일 세상의 아침과 함께 열리는 합법적인 방식의 도박판이었다. 아버지는 말의 건강 상태를 분석하고, 이길 가능성이 있는 말을 추천해주고 찾아온 손님의 돈을 불려주어 신뢰를 얻고 중간에서 수수료를 회사에 남기어 고과 평가를 받는 마권 상인 같은 존재였다. 그는 법적으로 직접 거래를 못했기 때문에 투자실력을 평가받는 건 고객의 수익률과 이렇게 가끔씩 개최되는 모의 투자 대회였다. 거기에서 아버지는 1등을 차지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내 일보에는 누구나 볼 수 있는 영문이 보였다. "k2" 그가 모의 투자대회에서 사용한 아이디였다. 그 이후로 메일이라는 것이 생기고 아이디라는 것이 부여될 때마다 한동안 그는 k2를 애용했다. 전문 등산가가 아닌 전문직 종사자가 취미를 넘어 험준하기로 유명한 k2를 등정하는 영화의 서사는 잠시 잊고 있던 아버지의 열정을 깨어나게 한 것이다. 그는 가끔 가슴을 부여잡고 날카로운 송곳으로 심장이 찔리는 고통을 느낀다고 말했다. 엄마는 심장에 이상이 있는 것 아니냐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지만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송곳이 심장을 관통했다며 문제가 됐을지 모르지만 그가 말하길, " 아주 살짝 심장을  긁고 가는 그런 따끔함인데..." 참을 만한 고통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그의 유일한 삶의 동력은 열정이라고 생각했다. k2 때문만은 아니었다. 열정을 만들어내는 기관은 심장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어쩌면 그의 심장은 한계에 다다렀는지 몰랐다. 아니면 그는 감당하기 힘든 일을 해내며 심장을 고갈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지의 거미줄이 조금 더 뻗었더라면 천호동 근방까지 닿았을 정도로 아버지의 직장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언제나 그렇듯 야근을 끝마친 아버지는 천호동으로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전화를 했다. 자녀들이 애비가 늦은 밤까지 일하는 모습을 보면 교육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그녀는 우릴 태우고 천호동 지점으로 나섰다.

밤늦은 시간, 익숙한 동네를 떠나 다른 동네를 구경한다는 것은 소년에게는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천호동을 들어서자, 편의점이라는 편리함을 상징하는 과거의 슈퍼마켓의 다른 이름이 처음 입점 한 동네, 정리되고 계획된 단지답게 중앙 상가를 기점으로 방사하듯 뻗은 아파트 건물들, 건물과 건물 사이를 데칼 코미니처럼 찍은 듯 어딜 가나 마주하는 규칙성, 자투리땅 한 평을 허용하지 않는 잉여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경제성의 종합인 우리 동네에서는 한 번도 느끼지 못한 무질서와 규칙성을 무시한 어수선함이 코를 찔렀다. 아버지의 지점은 천호동 사거리에서 이십 대 청춘들이 북적거리는 먹자골목으로 진입하면 유흥가의 한 복판에 자리 잡은 빨간색 벽돌의 단층 건물이었다. 주변이 유독 혼잡하고 사람들로 북적거린 이유는 건물 지하에 성인 나이트클럽이 있었고 음식을 내놓고 파는 포차와 여럿 가게들이 혼잡하게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씨끌벅적되는 너저분한 분위기 속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활력이 느껴지기도 했다. 계단으로 올라가려 하자 지하 나이트에서 굉음에 가까운 노랫소리가 일층 복도까지 울려 퍼졌고 피에로 같은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한 남자가 엄마를 보자 호객행위의 대상이라고 생각한 듯 다가오다 뒤따르는 우리를 보고는 멋쩍은 듯이 딴짓을 했다. 2층의 증권회사 지점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아버지는 노란색 서류 뭉치를 k2 암벽처럼 아슬아슬하게 쌓아두고 그 아래에서 우리가 온지도 모를 만큼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지하 나이트에서 누구나 아는 유행가의 한 소절이 바닥을 울릴 정도로 올라왔다. 그의 모습은 흡사 모든 유혹을 이겨내고 정진하는 도시의 수행자 같아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문만 열고 나가면 부대끼는 게 사람이고 널린 게 허기를 채우는 음식이었고 마음만 먹으면 채우고 남을 탐욕 거리 천지인 천호동에서 언젠가는 무너질 서류더미 아래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을 순 없었다. 사무실의 가장 깊숙하게 들어앉은 그의 자리 때문 인지  뒤늦게 우릴 알아본 그는 흐뭇한 웃음이 아니라 어울리지 않은 환한 웃음으로 반겼다. 생전 보지 못한 아버지의 웃음은 적잖아 당황케 했다. 일이라는 것, 회사에 출근해서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이 마냥 힘든 일만은 아니구나, 모두가 퇴근한 텅 빈 사무실에서 나이트클럽에서 올라오는 유행가의 리듬에 맞춰 일할 수 있을 만큼 어떤 희열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점의 책임자이자 관리자이면서 장(長)이었다. 가령 그가 사무실의 막내였다면 저리 신나게 일을 할 수 있을까, 홀로 남아 사무실을 지켜도 어색하지 않은 자리였기에 가능한 일이라고도 가늠했다. "아직 좀 더 정리해야 할 게 있는데, 조금만 기다려~" 서둘러 일을 마무리할 만도 한데 그는 그럴 여유도 없는 듯 분주해 보였다. 곧 자정이 코 앞으로 다가온 늦은 밤이었다. 증권회사의 지점 사무실은 십 대의 소년이 시간을 갖고 놀 어느 놀이와 관련된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요 앞에 포장마차에서 떡볶이 좀 먹고 올게요~" 동생을 데려가라는 어미의 말도 무시하고 혼자 천호동 한복판으로 내려왔다. 단 5분이라도 동네를 거닐어야 이곳의 윤곽이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낯선 사람, 낯선 동네를 궁금해하면서 부딪히기보다 멀찍이 눈으로 보고 담고 싶은 나이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짧게라도 천호동의 생소한 정취를 느끼고 싶었는지 밤 기운을 저마다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물결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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