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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목 Jan 09. 2022

소설<알쏭당>

냄새

짧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적은 없었다. 샤워 수전에서 뿜어내는 물에 힘없이 흘러내려 욕조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머리털을 보고 있자니 여러 생각이 났다. 그래, 저 정도의 계약을 하려면  어디든 탈이 나는 게 맞지, 그게 탈모였군, 형의 머리숱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 책상 건너편에서 매일같이 얼굴을 확인하지만  탈모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항상 단정한 머리였다. 연고가 적을 수밖에 없는 허허벌판의 이십 대에 일을 시작해서 계약을 받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실적을 맞추기 위해 애간장을 끓였을 그의 15년이 욕조 배수구를 통과하는 머리털과 같이 주마등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머리카락이 저렇게 힘없이 욕실을 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제아무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아내도 지레짐작만 할 뿐이지 나와 같은 동종업계 사람만이 체감할 수 있는 어떤 까닭이었다. 단순하게 계약 건수와 월급만 비교하자면 그는 나보다 5배 이상의 일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는 꼴이었다. 하지만 형은 그런 척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것인지 언제나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다. 그런 여유로움은 오랜 시간 단련된 일에 대한 익숙함일 수도 있었고 굳은살처럼 박혀 버려 그것이 원래의 제살인지 아니면 굴러와 박힌 것이 모호해진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직업적 감상을 느끼기에는 방금 전 눈으로 목격한 광경은 꺼림칙하다고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샤워를 했으면 정리 좀 하고 나가지'

이렇게 '나는 탈모예요'라고 욕실 타일마다 광고를 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 뭐야~! 깜짝 놀랐잖아~탈모 있어요?"

형원이 형은 신혼 첫날밤의 막 단장을 마친 신부처럼 삼각팬티 한 장 만 걸친 체 새초롬하게 침대에 정자세로 누워 있었다. 저럴 때 보면 본인 말대로 개인주의적인 사람 같기도 했다. 비록 직급체계가 뚜렷하지 않은 직업이지만 연차가 꽤 차이가 나기도 했고 한두 살 위라도 엄연히 연장자라고 형 대접을 받으려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의 득달같은 질문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아주 가끔씩 보이는 영문모를 표정으로 갓 나온 나의 몸을 훔쳐보는 것 같았다.  하긴 저 난리를 하고도 그냥 나온 걸 보면 탈모를 숨기려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도 탈모라는 것도 어찌 보면 신체의 상실일 텐데 상대에게 무안함을 준 것 같아 무마하려는 말을 던졌다. 실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그의 표정 때문일 수 있었다.

"그런데 난 전혀 눈치 못 챘거든~ 사무실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모르겠는데~"

타월을 몸에 두른 체 장기명 팀장이 자주 짓는 골려 먹는 표정으로 침대에 다가가 그의 장수리를 슬쩍 보는 척을 했다. 아주 작은 희미한 맨살이 드러났다. 뭐라고 떠드는지 알아듣기 힘든 베트남어가 흘러나오는 티브이 빛에만 의지한 호텔 방의 어둠 속에서도 바다 수평선 너머에서 올라오는 해돋이를 보는 듯 눈에 들어왔다.

"약 먹어~"

"혹시 유전? 아버님이 탈모 있으세요?"

"워낙 일찍 돌아가셔서 확인할 수가 없네, 크크"

아주 오래전에 겪는 일이라 그런지 마치 남의 일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형을 보고 있자니 순간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아, 미안해요.. 난.."

"아니여, 크크, 이십 대 초반에 돌아가셔서.. 근데 넌 여행 오니깐 막 살아나는 거 같아~"

무거운 주제는 여행과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 듯 갑자기 나로 주제를 옮겨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내가? 왜? 그렇게 보여요?"

그의 말은 언뜻 들어도 사무실의 내 모습을 염두하고 하는 것 같았다. 여행에 오면 신이 나고 평소에 느끼지 못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 건데, 여행에 오니 이전보다 살아있는 것 같다니, 무척이나 생소하지만 사무실이 자신의 세상인양 다름없이 지내는 그 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 

"워낙 조용하니깐"

'형이 사무실에서 너무 시끄러운 거지 보통 사무실은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공동의 장소 아닌가, 난 그냥 조용히 내 일만 하다 가는 건데'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었지만 입 밖으로 뱉지는 않았다. 그가 그런 말을 한 의도를 알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결혼하고 바로 회사에 온 거야?"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사용하는 걸 보니 처참한 신체의 상실을 보고도 마냥 형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가족들을 태우고 운전하고 가는데 갑자기 반대편 차량이 중앙선을 침범해서 우리 차량으로 넘어온다면 넌 어떻게 하겠니?"

또다시 저번처럼 흑과 백, 핸들을 돌려 제 목숨을 구할 것인지 아니면 운전자석이 박살 나도 가족을 지킬 것인지의 선택의 문제였다. 이 형 이거 이런 질문의 상습범이었다. 

"형, 난 결혼을 안 해봐서 하하, "

"아마 나만 그렇지 않을 걸, 모든 가장은 자식과 마누라를 지킬 거야~"

방심하고 있다 훅 무언가 들어온 기분이었다. 이 형도 숨기고 있을 뿐이지 나에게 잔소리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어쩔 수 없는 꼰대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 친구는 있지? ~"

형은 침대에 누워 아직은 덜 말린 내 젖은 머리와 운동으로 단련된 가슴팍을 훑더니 자신보다는 훌쩍 넘어선 긴 다리를 심드렁하게 쳐다보더니 애인이 있는지의 여부는 알겠고 이제 본격적으로 결혼과 일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려고 시동을 거는 모양새였다.

"뭐 한둘이어야지 하하"

마음에도 없고 생각에도 없는 말을 꺼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감히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등급을 가지고 있고 부모에 기대어 유년 시절을 보낸 동네를 자신의 힘으로 일구어 가족이라는 구성원을 유지하고 있는 그에게 내세울 거라곤 한낱 이성을 마음대로 만날 자유밖에 없었던 것일까.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깐 히히 뭐야? 자유연애주의자야? 부럽다 부러워~그래~ 총각일 때 많이 만나라~"

참으로 다행스럽게 그는 내 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응해주었다. 순진하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니 살짝 미안한 감정도 들기 시작했다. 여행지의 선택권을 나에게 준 점과 아까 로비에서 나를 위해 팀장에게 무언의 압박을 준 점을 보아서는 그는 팀에 처음 온 나를 위해 많은 배려를 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겐 젊은 날의 추억이 시린 동네 치킨 집에서 직접 회를 떠서 갖고 온 기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치킨집의 익숙한 전경이 펼쳐지면서 옛 기억들이 벽면에 수놓은 글씨들의 어지러움처럼 혼재되어 잠으로 쏟아졌다.

"형~ 난 형이 그 동네에 산다고 했을 때부터 무언가 좀 이상한 기분이 들더라고... 내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거기서 살았는데.. 형은 어떻게 보면 성인이 돼서 본인의 힘으로... 참.. 대단하다고.."

지금처럼 침대 매트리스가 푹신하고 편안하다고 느낀 적이 없을 정도로 피곤한 몸은 깊숙이 스며들었고, 나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평소엔  보기 힘든 정수리 탈모 같은 내 진심을 말한 기분이었다. 

"꿈이 뭐니?"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그는 내 말의 의도를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또다시 선문답 같은 질문을 하려고 슬슬 시동하는 것인지 예상치 못한 꿈이라는 단어를 꺼냈고 순간 나는 언제나 친숙하게 대했던 꿈이라는 단어가 차음으로 낯설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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