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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A Sep 30. 2016

건강하게 꼭 다시 만나요, 큰 아줌마와 작은 아줌마

UAE 아부다비 (January 2008-December 2009)

사실 이번 만남은 다른 만남들처럼 여행 중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해외에서 얼마간 체류하는 것도 어차피 결국은 한국의 원래 내 자리로 돌아오기 위한 과정일 뿐이고, 그 과정 중에도 여행에서처럼 우연한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부분에서는 여행과 비슷하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앞서 여러 번 언급하였듯이, 나는 2008년부터 2년간 아부다비에서 근무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지금 생각하면 돌이키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겨웠다. 아직 어려서 무모했던 건지, 아니면 어려운 것에 대한 허세 가득한 욕심이었는지 나 스스로 자원하여 파견되었던 것인데, 2년 동안 몇 번이나 내 선택을 후회했는지 모른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24시간 함께 간 직원들의 얼굴을 맞대며 살아야 했고, 30여 년만에 재개된 중동 현장이었기 때문에 업무에 있어서도 일에 깔려 죽을 만큼 일했지만 매번 새로운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게다가 근무하는 현장은 사막의 한가운데, 여름에는 섭씨 50도가 넘어가도록 뜨거웠고, 지리적으로 섬인 아부다비는 연중 습도 99%에 달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사람 냄새’가 부족한 곳이라는 점이었다. 더운 나라의 특성상 길에 나가도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고, 근무환경이 시내와는 떨어져 있어서 더더욱 그러했다. 길에서 스쳐 지나갈 뿐인 사람들일지라도 사람으로 가득한 나라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무인도에 가보지 않았어도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사는 것이 얼마나 지치고 끔찍한 기분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나에게 의지할 곳은 오로지 함께 일하는 직원들 십여 명과 숙소에서 우리들의 식사를 챙겨주고 집안일을 봐주시던 아주머니 두 분 밖에는 없었다. 

숙소가 있던 동네 풍경


당시 아랍에미리트 연합에는 건설 열풍으로 많은 한국 기업들이 진출해 있었고, 한식을 접하기 어려운 이 곳에서 각 회사는 주로 조선족 아주머니들을 고용하여 집안일과 식사를 맡기곤 했다. 우리 현장도 마찬가지로 두 명의 조선족 아주머니와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두 사람은 고향에서부터 친한 사이어서 타지에서도 각별히 지냈다. 우리는 키가 크고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을 ‘큰 아줌마’로, 아담한 체격에 나이가 더 적은 사람을 ‘작은 아줌마’라고 불렀다. 특히 큰 아주머니의 음식 솜씨가 좋아서 우리는 매끼 맛있는 밥상을 받을 수 있었고, 덕분에 힘을 내서 일할수 있었다. 

아주머니들에게도 내가 의지가 되었던 모양이다. 온통 남자들뿐인 집 안에서 그나마 나라도 함께 지내는 것이 아주머니들에게는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어려움을 상의할 수 있어서 편했던가 보다. 

“아가씨, 이번 주 금요일에 혹시 안 바쁘면 우리 근처 친구 집에 좀 데려다줄 수 있어?”

멀지 않은 곳에 다른 한국 회사의 숙소가 있었고, 그곳에도 조선족 아주머니가 일하고 있었다. 이 심심한 곳에서 근무 안 하는 금요일이 되면 아주머니들도 친구도 만나고 쉬고도 싶을 텐데, 대중교통은 택시밖에 없고 그나마도 우리 숙소가 있는 동네는 외진 곳이어서 택시마저 없으니 이동할 방법이 없을 때는 나에게 부탁하곤 했다. 나는 외로울 아주머니들의 마음을 이해했기에 흔쾌히 부탁을 들어줬고, 그렇게 종종 함께 드라이브를 나섰다. 친구 집에 다녀오는 길에는 함께 장도 보고, 못했던 아부다비 시내 구경도 하면서 돌아오곤 했다. 

때론 근무를 쉬는 날에는 내가 아주머니들을 대신해 요리를 하기도 했는데, 하루는 바비큐를 해보고 싶었다. 미리 다른 직원들의 도움으로 현장에서 직접 바비큐 그릴을 만들었다. 폐드럼통과 철근으로 얼기설기 만든 수제 바비큐 그릴은 그럴싸해 보였다. 이슬람 국가인 아랍에미리트 연합에서는 돼지고기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운 좋게도 외국인 전용 슈퍼에서 충분한 양을 구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고기를 깨끗이 씻어내고 허브와 계피, 생강 등과 함께 넣어 푹 삶아 고기 누린내를 없앴다. 완전히 익은 고기를 직접 만든 특제 소스에 버무려 냉장고에 숙성을 시켜놓고는 저녁이 되어서야 그릴에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숙성된 고기에 다시 한번 특제 소스를 발라 불에 구우니 고급 레스토랑에서 파는 것 못지않은 바비큐가 완성되었다. 돼지 바비큐에 소시지, 각종 야채들까지 완벽하게 세팅하여 대접하는 우리를 보고 아주머니들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아유~. 이렇게 불 피우고 고기도 구워 먹고 근사하네.”

“이런 거 먹어보는 거 처음인 것 같은데….”

아주머니들은 맛을 보고 또 한 번 감탄했다. 

“아가씨는 요리도 잘하네. 어떻게 이런 걸 다 만들었어? 나중에 시집 잘 가겠네.”

“좋은 남자 있으면 소개시켜 주세요.”

우리의 첫 바비큐 파티는 성공리에 마쳤다. 그 이후로도 좋았던 기억을 되살려 종종 바비큐 파티를 하며 삼겹살에 대한 향수를 잠재우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조금씩 아부다비에서의 생활에도 자리를 잡아가는 듯했다. 함께 지낸 지 8개월쯤 되었을 때다. 우리 현장의 공무를 봐주는 현지 PRO(Public Relations Officer)인 압둘라 Abdullah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전해왔다. 작은 아줌마가 취업비자를 받는 과정에서 했던 건강검사에서 에이즈 판명이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추방을 당할 것이라는 비보였다. 

‘에이즈라니…. 에이즈라니….’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에 우리는 모두 아연실색했다. 무엇보다 작은 아줌마 당사자는 얼마나 놀랬을지 차마 짐작할 수도 없었다. 큰 아줌마는 똑소리 나고 야무진 반면에 작은 아줌마는 순하디 순해서 우리는 작은 아줌마에게 혼자서는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그렇게 착한 사람이 받았을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후, 몇몇 직원들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병명에 놀래서 작은 아줌마에게서 등을 돌렸고, 집 안에서 마주치는 것조차 꺼림칙해했다. 때문에 작은 아줌마는 추방당하게 되는 그 날까지 눈물로 시간을 보내며 방에서만 지내야 했다. 나는 그런 아주머니를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엄마처럼, 이모처럼, 나를 대해주었던 사람인데 그깟 병이 뭐라고 슬픔에 빠진 아주머니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작고 어두운 방에서 울기만 하는 작은 아줌마에게 밥도 챙겨주고, 용기 잃지 말라고 위로의 말을 해 주러 찾아갔다가 나도 그냥 따라 엉엉 울다가 나오는 때가 다반사였다. 

“아줌마, 이제 그만 울어요. 이럴 때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미안해요, 흑흑.”

“아가씨, 고마워, 고마워. 나랑 같이 울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해. 중국으로 돌아가서도 잊지 않을게, 흑흑.”

“뭔가 잘못된 거예요. 아줌마가 에이즈일 리가 없어, 흑흑.”

두 손을 꼭 잡고 우리는 한참을 울었다. 사막이 눈물바다가 될 지경이었다. 그렇게 삼일 뒤, 마침내 그 날이 왔다. 압둘라 Abdullah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금 내가 숙소로 그 여자를 데리러 갈 테니 준비해 놔요. 오늘 추방될 거예요.”

더 마음 아프게 하필이면 그 날은 구정 설날이었다. 설날 특별 휴가로 모든 직원이 숙소에 있는 날이기도 했다. 나는 섣달 그믐날을 핑계로 밤을 새긴 했지만, 왠지 잠들 수 없었던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밤을 새운 탓에, 아침 일찍 우리만의 차례를 올리고는 직원들은 모두 잠이 들었다. 그때 압둘라 Abdullah가 도착했다. 배웅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식구 한 명이 떠나는 것인데…. 작은 아줌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것은 큰 아줌마와 내가 전부였다. 

설날 차례상 - 작은 아줌마 떠나던 날

“아줌마, 힘내세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중국에 도착하시거든, 꼭 큰 아줌마 통해서 소식 다시 주세요. 무사히 도착하셨는지, 다시 검사는 해보셨는지, 염려돼요.”

“응, 갈게. 잘 있어.”

창백한 얼굴에, 힘없는 대답을 남기고 작은 아줌마는 옷 한 벌 챙기지 못한 채 맨몸으로 아랍에미리트 연합 땅을 떠났다. 순간 압둘라 Abdullah에게만 맡겨두고 작은 아줌마가 떠나는 것에 대해 참견하고 싶어 하지 않는 직원들에게 화가 났다. 내가 병에 걸려도 이렇게 대할 것이냐고 따져 묻고도 싶었다. 자세히 사정을 알아보면 문제를 풀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작은 아줌마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작은 아줌마를 그렇게 보내고 큰 아줌마 마도 기력을 회복하는 데에 꽤나 시간이 걸렸다. 한참이 지날 때까지 중국으로 간 작은 아줌마의 소식을 들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잊지는 않았지만, 서로 말을 아끼며 잊은 것처럼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큰 아주머니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아가씨, 내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뭔데요? 말씀해 보세요.”

“음, 저기…. 아가씨한테만 말하는 건데, 다른 직원들한테는 비밀로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한참을 뜸 들이던 큰 아줌마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우리 남편이 일거리가 없어서 일 찾으러 아부다비로 들어오기로 했어. 근데 돈도 없고, 마땅히 있을 데도 없어서 일 찾을 때까지 내 방에서 같이 지내려고 해. 직원들 지내는 데 문제없도록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있을 거야. 일 찾을 때까지만이야.”

“아, 그걸 뭐 그렇게 힘들게 말씀하세요. 그렇게 하세요. 일단 저만 알고 있을게요. 아줌마도 아저씨 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 보고 싶겠네.”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더 있는데…. 오늘 남편이 아부다비 공항으로 도착하는데 같이 데리러 가줄 수 있을까?”

“그래요. 오늘 별 일 없으니까 이따 같이 가요.”

“응, 고마워.”

난 내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작은 아줌마를 보내고 큰 아줌마가 영 힘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이 옆에 있어주면 상처가 쉬이 가라앉지 않을까 했다. 그날부터 큰 아줌마와 아저씨와의 비밀 동거는 시작되었다. 

“아줌마,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말씀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도와 드릴게요.”

큰 아줌마가 눈치 보고 부담스러워할까 봐 나서서 아저씨까지 챙기지는 못했지만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일은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았고, 아저씨는 결국 비자 만료일까지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시간이 쏜살같은 건지 취업비자가 아닌 방문 비자로는 더 이상 아랍에미리트 연합에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아저씨를 다시 공항으로 모셔다 드린 날, 큰 아줌마는 또 슬피 울었다. 


큰 아줌마는 두 번의 큰 일을 겪고 나서 더 침울해졌다. 아부다비에서 생활한 지 18개월이 넘어가고, 힘든 일을 견뎌내면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쳤던 것일 게다. 그래서 그 이후 큰 아줌마는 나에게 더 의지하는 듯했다. 그저 그런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모처럼 큰 아줌마가 만면에 화색을 띄우고 나를 불렀다.

“아가씨, 드디어 중국에 간 작은 아줌마한테 연락이 왔어.”

“진짜요? 잘 계신대요?”

“중국 갈 때만 해도 다시 검사 못 받아볼 줄 알았거든. 이미 에이즈로 추방당한 기록이 있는 데다 아무 병원이나 가서 에이즈 판명 확인받으면 중국 사회에서도 매장될 거야. 그랬는데 어떻게 해서 다시 병원에서 검사를 받게 됐나 봐. 그런데 에이즈가 아니라는 거지.”

“뭐라고요? 에이즈가 아니라고요?”

조용히 속삭이며 재빠르게 소식을 전하는 큰 아줌마의 말에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다시 반문했다. 

“응. 에이즈 아니래. 정말 뭔가 잘못됐었던 거 같아.”

“와! 정말 다행이에요. 진짜 잘됐네요.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러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래서 지금은 고향에서 일도 하고 잘 지내고 있대.”

“잘됐어요, 정말 잘됐어요.”

나는 방금 들은 소식이 없던 일이 될까 봐서 잘됐어요,라고 무수히 곱씹었다. 작은 아줌마가 다시 환히 웃을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좋은 일도 잠시, 나 역시 아부다비를 떠나야 하는 날이 왔다. 꼬박 2년을 채우고 나는 다시 한국으로 발령받게 되었다. 내가 힘들었던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은 후련했지만, 더 외로워질 큰 아줌마를 두고 가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어느 날 아침, 큰 아줌마

“아가씨 가면 나 어떡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도 눈시울을 붉혔던 큰 아줌마였다. 무엇이라도 위로할만한 것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장문의 편지를 썼다. 미안하고 안타까운 내 마음도 전하고, 혹시라도 연락할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연락처도 남기고, 언젠가 중국이나 한국에서 다시 볼 일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는 진짜 아부다비 숙소를 떠나 한국으로 오는 날, 아줌마는 꼬깃꼬깃한 쪽지 한 장을 내 손에 꼭 쥐어 주고 다짐을 받았다. 

“아가씨, 나하고 내 남편 이름하고 중국 연락처야. 거기 주소도 있어. 그러니까 꼭 한 번 중국에 놀러 와. 오면 아가씨는 성대하게 대접해 줄게. 장백산(백두산) 구경도 시켜주고. 그러니까 꼭 와.”

“우와. 장백산(백두산) 구경이라니 근사한데요? 그런데 아줌마가 언제 중국으로 돌아갈 줄 알고….”

“나 여기 일 끝나면 중국으로 돌아갈 거야. 그리고 이제 외국에서 일 안 하려고. 힘들기도 하고 가족하고 같이 살고 싶고.”

“맞아요. 이제 가족들하고 중국에서 행복하게 사세요. 그리고 건강하세요. 꼭 한 번 찾아갈게요.”

“응, 그래. 꼭 와. 아가씨도 건강하고.”

“중국으로 돌아가시면 아저씨랑 작은 아줌마한테도 안부 전해주세요.”

“물론이지. 조심해서 가.”

나는 꾹꾹 눌러쓴 아줌마의 연락처를 손에 꼭 쥔 채, 사막의 모래색을 닮은 집 앞에 서서 내가 탄 차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큰 아줌마가 안 보일 때까지 오래오래 손을 흔들었다. 내가 떠나고 얼마 안 되어 현장은 종료됐고, 큰 아줌마도 중국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살면서 뉴스나 사진 등으로 백두산을 마주칠 때마다 아주머니들 생각이 난다. 진짜 내가 언젠가 중국에 가서 아주머니들을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자연경관이 굉장하다며 자랑하던 큰 아줌마와 작은 아줌마가 살고 있는 고향땅은 어떤 모습일까,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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