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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A Sep 29. 2016

코리안 드림을 이룬 장한 친구, 긴딩

네팔 안나푸르나 (May 2009)

앞서 말했던 것처럼 2008년부터 2년 동안 나는 아부다비에서 근무했다. 엄마는 척박한 열사의 땅, 그것도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딸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방문하고 싶어 했고, 나는 정기 휴가기간에 맞추어 엄마를 내가 살고 있는 곳으로 초대했다. 엄마는 사막 땅 한가운데 딸이 1년이 넘도록 열심히 땀 흘리며 일했을 현장도 보고, 현장 직원들과 함께 묵고 있는 숙소에도 가서 딸이 잘 지내고 있구나,를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한여름의 아부다비는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기에, 2주에 가까운 휴가기간 내내 엄마와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여행지가 네팔이었다. 아부다비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은 데다 엄마와 단 둘이 가는 첫 번째 해외여행인데 평소 등산을 좋아하는 엄마와 함께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면 뜻깊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때는 엄마가 암 수술을 받은 지 5개월쯤 되던 때였다. 다행히도 아직 초기였기 때문에 큰 수술이 아니었지만, 수술과 투병으로 인해 상한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데 히말라야의 깨끗하고 신성한 기운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엄마도 이런 나의 생각에 흔쾌히 동의해 주었고, 우리는 그렇게 2009년 여름 처음으로 네팔 땅을 찾게 되었다. 


첫 히말라야 트레킹의 코스는 3박 4일간의 푼힐(Poonhill) 전망대까지 다녀오는 것으로 정했다. 나만 생각하면 언제 또다시 오나 싶어 안나푸르나(Annapurna) 라운딩이라도 할 기세였지만, 혹시라도 모를 엄마의 몸 상태도 걱정해야 했고 특히 엄마와 함께 하는 이번 여행은 누가 더 멀리, 누가 더 많이,를 다투는 여행이 아니기 때문에 3박 4일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트레킹 하는 동안 심심해할 것도 같고, 또 혹시나 비상사태가 생길지 몰라 한국어를 할 줄 아는 포터를 구하기 위해 카트만두에서 트레킹 전문 여행사를 운영하고 계시는 사장님께 부탁을 했다. 

마차푸차레가 보이는 숙소 창문

우리와 3박 4일을 함께 할 포터는 트레킹 시작 장소인 포카라에서 만나기로 하고, 우리는 8시간 버스를 타고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향하며 트레킹의 첫 발을 떼었다. 긴긴 여정의 끝에 여행자를 한 가득 실은 버스는 포카라에 도착했고, 그곳에 이미 마중 나와 있던 우리의 포터인 긴딩 Ginding을 처음 마주하게 되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때가 꼬질꼬질하고 에어컨은커녕 벽에 걸린 선풍기마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 없었던 우리가 타고 온 버스는 ‘여행자 버스’라는 이름으로 그나마 고급 쪽에 속하는 것이었고, 긴딩 Ginding은 그 보다 절반 이상 싼 현지인 버스를 타고 우리보다 더 오랜 시간 험한 길을 달려왔던 것이었다. 아직 순수함과 풋풋함이 남아 있는 십 대 소년의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는 긴딩 Ginding은 피곤한 기색도 없이 우리가 숙소 찾는 것을 도와주었다. 나는 엉덩이 닿을 곳만 있으면 숙면을 취하는 체질이라서 잠자리는 가리지 않는 편인데, 엄마와 함께 묵으려니 숙소 찾는 것도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결국 긴딩 Ginding의 도움으로 싼 값에 괜찮은 숙소를 구했다.


“내일부터 시작이네. 긴딩 Ginding, 우리 잘 부탁해. 푹 자고 내일 아침 일찍 보자.”

“…네. 안녕히 주무세요.”

수줍음이 많은 청년은 얼굴을 붉히며 조그만 목소리로 겨우 대답하고 뒤돌아 섰다. 

‘인도 여행할 때, 멀리서만 봤던 히말라야를 드디어 내 발로 밟게 되는구나!’

그날 밤은, 걱정과 설렘과 두근거림이 뒤섞여 평소와는 다르게 푹 잠들지 못했다. 엄마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8시간 긴 버스여행을 하고 피곤했을 텐데도 트레킹을 시작하는 첫날 우리는 새벽같이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을 대충 챙겨 먹고 배낭을 단단히 싼 후 방을 나섰을 때, 긴딩 Ginding은이미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 이제 힘차게 출발해볼까?”

3박 4일간의 대장정은 시작되었다. 긴딩 Ginding은 노련하게 속도를 조절하며 우리를 잘 리드했고, 우리는 그에 맞추어 무리하지 않고 여유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첫째 날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시작은 산 초입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한 데다 아직까지는 체력도 충분했고 심한 오르막도 없어서 큰 힘 들이지 않고 첫째 날 묵을 롯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엄마도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잘 걸어 주었다. 아니, 나보다 엄마가 더 꾸준히 잘 걸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하는 동안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어했던 엄마였기에 어쩌면 이번 트레킹이 엄마에게는 잃어버렸던 삶의 의욕을 되살리고자 하는 의지는 아니었을까. 그만큼 엄마는 씩씩하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떼었다. 

함께 하루만큼 산을 오르는 동안 우리는 하루만큼 서로를 알아갔다. 긴딩 Ginding은 이제 갓 십 대를 벗어난 스물두 살 청년이었고, 히말라야를 사랑하는 한 명의 네팔 사람이었다. 늦둥이 막내 남동생 생각이 나서 금세 긴딩 Ginding은 내 동생이 되었다. 

“긴딩 Ginding, 한국말은 언제 어디서 배웠어? 생각보다 너무 잘해서 놀랬어.”

“배운 지는 얼마 안 됐는데, 더 배워서 한국말 잘하게 되면 한국에서 가서 일하고 싶어요.”

“아, 한국에서 일하고 싶구나.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

“한국에 가면 네팔에서 보다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지금 포터 일 시켜주시는 한국 여행사 사장님도 너무 좋으셔서 한국에 꼭 가고 싶어요.”

“그렇구나. 그래도 아무래도 외국에 나가서 일하면 힘든 부분도 많을지 모르니까 잘 준비해서 가야 해. 나도 지금 아부다비에서 일하고 있거든. 외롭고 힘들 때도 많아.”

“정말요? 우리 둘째 형도 지금 아부다비 건설현장에서 일해요.”

“진짜? 휴가 끝나고 돌아가면 언젠가 너희 형 만나서 밥 한 번 먹었으면 좋겠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현장에도 고생하는 많은 네팔 인부들이 있었기에 남 일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이제 긴딩 Ginding은 내 동생이니까 그의 둘째 형도 내 형제나 다름없지 않은가. 가족이라는, 생각만 해도 따뜻해지는 마음을 품은 채 히말라야 산중의 첫날 밤이 저물었다.


두 번째 날은 지금 생각해도 숨이 가쁘게 오르고, 오르고, 또 올라야만 하는 구간이었다. 푼힐 트레킹의 하이라이트인 전망대에서 히말라야 설산의 일출 파노라마를 보기 위해서라도 이틀째에는 푼힐 전망대의 아래 동네인 고라파니(Ghorapani)까지 도달해야 했다. 트레킹을 시작한 지 이틀 만에 다리가 풀리는 현상을 느끼며 마지막에는 거의 네 발로 기다시피 해서 8시간 만에 고라파니에 도착했다. 긴딩 Ginding은 자그마한 몸에 무거운 짐까지 짊어진 채 훨씬 더 힘들었을 텐데도 우리의 속도가 늦어 챙기느라 애를 쓰고, 괜찮다며, 천천히 오라고 끊임없이 격려하며 걸었다. 어린 막내 동생 같은 줄만 알았더니 애늙은이처럼 우리를 배려하는 모습이 기특하고 고마웠다. 그러나 나 혼자가 아니라 셋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걸을 수 있었던 그 날의 끝에서 공포의 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히말라야는 우기를 코 앞두고 있을 때였고, 따라서 여행자들에게는 비수기로 꼽히는 기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두 번째 밤을 묵었던 커다란 롯지에는 투숙객이 우리밖에 없었다. 엄마와 카드게임을 하며 낄낄대기도 하고, 몸을 씻은 후 난롯가에 앉아 개운하고 나른한 몸을 쉬었다가 잠이 들 때까지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내일 새벽 푼힐 전망대에 올라가 일출 파노라마를 볼 기대에 부풀었던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잠든 지 두어 시간쯤 흘렀을까. 후두두둑.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지붕 위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아직 우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는 않았다고 들었는데 비가 오는 것 같았다.

우리를 밤새 공포로 몰아넣었던 손톱만한 우박

“엄마, 우리 내일 일출 봐야 되는데 이러다 못 보는 거 아냐?”

잠결에도 내일 일출 걱정만 하며 다시 고단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지붕 위로 떨어지는 무언가의 소리는 계속해 서 커져만 갔고 금방이라도 지붕이 뚫어질 듯한 굉음으로 바뀌었다. 그냥 잠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겁이 많은 엄마는 옆 자리에서 잔뜩 웅크린 채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승애야, 밖에 무슨 일 난 것 아니야? 이 롯지에 우리밖에 없는데 지붕이라도 무너지면 어떻게 해. 네가 나가서 롯지 주인이나 긴딩 Ginding을 찾아봐.”

공포영화를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고, 어떤 종류라도 자연재해 역시 겪어본 적 없는 나도 물론 겁이 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손전등을 켠 채로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텅텅 빈 롯지에서 두려움을 달래 줄 누군가를 찾아야만 했다. 내가 그렇게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위를 바들바들 떨면서 한 발자국씩 조심스럽게 옮기고 있을 때, 복도 저 끝에서 누군가가 손전등을 비추며 다가왔다.

“누나예요? 저 긴딩 Ginding이예요.”

“아아아. 긴딩 Ginding!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이게 지금 무슨 일이야? 밖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지금 밖에 우박이 내리고 있어요. 그래서 그래요.”

긴딩 Ginding은 두려움에 떨고 있던 내 눈을 마주 보며 달래주었다. 우박이라고 해도, 롯지 가득 울려 퍼지는 지붕 소리가 너무 거대해서 쉽게 걱정이 사그라지지는 않았다. 우리가 묵었던 롯지의 지붕은 다른 대부분의 롯지가 그렇듯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되어 있었는데, 산속의 밤이라 그런지 그곳에 부딪히는 우박 소리가 천둥보다 더 컸다. 어린애처럼 긴딩 Ginding의 옷자락을 붙들고 몇 번이나 괜찮다는 확인을 받고서야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 침낭 안으로 들어갔다. 밤새 우박은 잦아들지 않았고, 폭격 소리 나는 전쟁 같은 느낌 속에 우리는 잠이 들어야 했다. 혹시나 우리가 걱정할까 싶어서 잠자다가 말고 뛰쳐나와주고 나의 부탁으로 우리 방 바로 맞은편 방에서 밤새 있어준 긴딩 Ginding이 아니었더라면 그 밤은 엄마와 나의 일생 최악의 밤이 될 뻔했다. 

 

푼힐 정상에서 뜨끈한 짜이 한 잔

미친 듯 우박이 내렸던 고라파니의 밤. 다음 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날이 활짝 개었다. 진정 엄지손톱보다 더 큰 우박이 가득 쌓인 산길은 어젯밤 전쟁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지만. 산더미 같은 우박은 미끌미끌하여 새벽 등산을 더 힘들게 했지만 우리는 마침내 해발 3,210미터 푼힐 전망대에 올랐다. 어젯밤 우박 전쟁을 치른 덕에 안개에 휩싸였던 히말라야 설산들이 선명하게 내 눈앞에 펼쳐졌다. 고난의 밤을 이긴 자들에게 주어지는 달콤한 선물처럼. 

“우리 긴딩 Ginding, 꼭 원하는 대로 한국도 오고 돈도 많이 벌게 해 주세요.”

“고마워요, 누나.”

파노라마로 펼쳐진 히말라야 산봉우리들을 앞에 두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우리는 새벽 산행 후, 현실 같지 않은 풍경을 배경으로 서서 마시는 한 잔의 짜이에 세상 남부러울 것 없이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푼힐에서 본 굉장한 일출


푼힐 전망대에서 트레킹의 정점을 찍을 탓일까. 그 날 오후 내려오던 산길에서 엄마가 체했다. 점심때 배가 고파 급하게 먹었던 탓인지, 이제 고비를 넘었다는 안도감에 마음을 놓아버린 탓인지 제대로 체해서 괴로워하더니 급기야는 오늘 하루 먹은 음식을 모두 다 토해 버리고 말았다. 트레킹 삼 일째라서 나도 방심하고 있던 터라 당황했는데 어김없이 긴딩 Ginding이 나서서도 와 주었다. 

“어머니, 여기서 누나랑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세요. 조금만 내려가면 롯지가 있으니까 제가 가서 약을 가져올게요.”

긴장됐는지 벌건 얼굴이었지만 긴딩 Ginding은 신속하고 빠르게 방안을 마련해 움직였고, 나는 또 속 없이 그런 동생에게 기대야 했다. 어차피 다시 내려가야 할 길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 긴딩 Ginding은 네팔의 민간요법인 약초로 만든 약을 얻어왔고, 엄마는 그것을 먹고 다시 걸을 힘을 찾을 수 있었다. 엄마는 두고두고 그 일을 고마워했다. 우여곡절 많은 우리의 트레킹, 그렇게 마지막 밤을 맞았다. 


이제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 마지막 날, 마지막이라는 허전함 때문일까. 평소와 다르게 별 말없이 걷게 되어 순식간에 내려오고 말았다.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내게 귀여운 동생이 되었다가, 든든한 오빠가 되었다가, 또 믿음직한 보디가드가 되어 주었던 긴딩 Ginding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우리는 여독을 풀 겸 포카라에 며칠 더 묵을 예정이었지만 긴딩 Ginding은 바로 카트만두로 돌아간다 했다. 

트레킹 중 긴딩

“긴딩 Ginding, 4일 동안 고마웠어. 만나게 되어서 반가웠고, 네가 아니었음 우리는 끝까지 걷지 못했을지도 몰라.”

“아니에요. 두 분이 잘 걸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여행 잘 하시고 조심히 돌아가세요.”

“응. 언젠가 한국에 오는 꿈이 이루어지면 그때 보자!”

“네!”

늘 아쉬운 이별이지만 히말라야가 맺어준 우리의 인연은 그때, 그곳에서가 전부는 아니었나 보다. 꿈같았던 휴가가 끝나고 나는 다시 일하기 위해 아부다비로 돌아왔고, 긴딩 Ginding이 가르쳐 준 그의 형‘치링’에게 연락을 했다. 꽤 오래 연결이 안 되어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극적으로 연결이 되어 마침내 아부다비에서 한 번 본 적도 없는 가족 상봉을 하게 되었다. 긴딩 Ginding으로 인하여 맺어진 또 다른 인연이었다. 그는 내가 근무하는 현장에서 일하는 여느 인부들과 같이 새까맣게 그을리고 고생하여 많이 말라 있었고, 그런 그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안타까운 마음에 함께 배불리 식사를 하는 것 밖에 없었다.

“트레킹 하다가 우리 긴딩 Ginding을 만났다고 했죠?”

“네. 긴딩 Ginding이 많이 도와줘서 우리 엄마랑 내가 무사히 트레킹 할 수 있었어요. 긴딩 Ginding이 형 이야기 많이 하더라고요.”

“긴딩 Ginding 보고 싶네요. 다른 가족들도….”

“그 마음은 네팔에 있는 가족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꼭 건강히 잘 지내다가 돌아가요.”

“네. 그래야죠. 아무튼 이렇게 만나게 되어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네요. 만나러 와줘서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긴딩 Ginding은 내 동생이니까 당신도 내 형제예요.”

그렇게 한참을 긴딩 Ginding과 가족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고 그는 얼마 안 되어 일이 끝나 네팔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방법이 없어 긴딩 Ginding과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새까맣게 잊고 지낸 듯했지만, 나에게 ‘히말라야’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긴딩 Ginding이었기때문에 5년 후 여행 중 다시 네팔을 찾았을 때 그와 한 번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연락처를 알 방법이 없었고 지나간 인연은 묻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핑계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다 우연히 당시에 긴딩 Ginding을 소개해주셨던 여행사 사장님 댁에 하루 밤 묵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긴딩 Ginding 지금 한국에 있어요.”

“정말이요? 언제 한국으로 갔어요?”

“그렇게 한국에 가고 싶어 하더니 한국어 시험도 우수한 성적 받아서 몇 년 전에 한국에 취업해서 갔어요. 그리고 장가도 가서 벌써 애도 있고요.”

꿈을 이뤘구나. 그리고 무엇보다 크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 몇 년째 안정적으로 열심히 지내고 있다 했다. 가끔 사장님 댁으로 안부 전화가 온다고도 했다. 그와 다시 마주치지는 않았어도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루고 싶어 하던 꿈을 이뤘고 누구보다 성실하게 잘 살고 있었다. 물론 결혼한 아내와 아이는 네팔에 있어서 가끔은 외로움에 힘들겠지만, 나는 그가 누구보다 잘 해낼 것을 믿는다. 그의 소식을 들으면서 ‘누나’하며 눈이 휘어지도록 선하게 웃는 그의 동그란 얼굴이 떠올랐다. 동시에 나도 슬며시 따라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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