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셔스 (December 2008)
린다 Linda는 런던에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 만났던 친구다. 한국에서라면 ‘친구’라고 부르기 조금은 민망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가 살아온 만큼의 세월을 딱 그만큼 더 살아온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친구였다.
아직은 영국이라는 나라에 어색해하던 나를 늘 엄마처럼 챙겨주던 사람이라 종종 린다 Linda네 집에 식사 초대를 받곤 했다. 때로는 혼자, 때로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아담하고 아기자기했던 린다 Linda의 집에서 조촐하지만 풍성한 식사를 함께 할 수 있었고, 각자 한 가지씩 음식을 만들어 오거나 다른 때는 재료를 준비해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하며 서로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밥을 같이 먹는 것이 사람 사이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여긴다. 오죽하면 식구(食口)라는 말이 있겠는가? 하지만 동양적인 정서라고 단정 짓기에는 그 효과가 굉장해서 나는 소중한 사람들과 식사시간을 나누는 것을 무엇보다 아끼고 좋아한다. 게다가 그 성스러운행위가 각자의 가장 사적인 집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면 더더욱 그러하다. 때문에 앞서 언급했던 인터내셔널 카페 친구들과 다 함께 만날 때와는 또 달리 린다 Linda와 나는 서로의 더 깊숙한 부분까지 공유하고 대화할 수 있었다.
린다 Linda의 집에 저녁식사 초대로 갔던 어느 날, 함께 초대받아갔던 마리아 Maria가 요즘 부쩍 인도 춤에 대하여 관심이 생겼다며 저녁식사 테마를 ‘인도’로 정했다. 그래서 우리는 근처 시장에 가서 재료들을 사다가 카레를 만들어 배부르게 먹고는 마리아 Maria가 준비해 온 인도영화 한 편을 감상했다. 인도영화를 처음 접했던 나는 현란한 음악과 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새로운 문화에 빠져들었고, 거기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지만 반면에 저 깊은 속내는 절대 알 수 없을 듯한 커다란 눈망울의 인도 여배우에게 반해 버렸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영국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비용을 마련하여 인도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한번 빠져들면 정신 못 차리고 덤벼드는 평소의 내 성향을 바탕으로 바로 모든 계획을 세웠고, 인도에서 온 친구들뿐 만 아니라 주위의 친구들에게 정보를 구하고 스스로 다짐이라도 해야 안심이라도 될 듯 여기저기 떠들어대고 다니기 시작했다.
“린다 Linda, 나 이번 가을에 인도에 갈 거야.”
“여행하고 싶다더니, 인도로 가기로 결정한 거야?”
“응! 한국으로 돌아가서 3~4개월 정도면 비용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11월쯤 혼자 떠날 생각이야. 가서 두세 달쯤 있다가 오고 싶어.”
“뭐라고? 혼자 간다고?”
“응. 당연하지!”
런던에서 린다 Linda는 내 친구 겸 엄마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었다. 뉴스를 보면 인도 여행하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이 많다는데 어떻게 그 험한 곳을 어린 여자 혼자 몸으로 가겠다는 거냐고 말이다. 물론 나도 걱정은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 말고는 배낭여행을 해 본 경험도 없던 터라 인터넷에서 무수히 떠들어대는 뉴스와 소문에 완벽하게 초연할 수는 없었던 탓이다.
“인도 여행 계획 바뀐 거 없어?”
그 이후로 그녀가 나를 만날 때마다 인사처럼 제일 먼저 묻는 말이었다.
서로를 가족처럼 생각하던 우리에게도 헤어짐의 시간이 왔다. 나는 교환학생 학기가 끝났고, 린다 Linda 역시 유학생활이 끝나서 그녀의 나라인 모리셔스(Mauritius)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런던에서 우리의 시간을 기념하려 마지막으로 린다 Linda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한국의 음식을 맛보게 해주고 싶어 꽁꽁 아껴 두었던 당면을 꺼내 생전 처음으로 잡채를 만들어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 잡채를 만드는 데 5시간이 넘게 걸렸다는 것은 아직까지도 비밀이지만, 맛은 제법 괜찮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너무나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앉아 도란도란 남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여전히 그녀는 나의 인도 여행 계획을 흥미로워하면서도 걱정했고, 앞으로의 나의 꿈과 미래에 대해서 같이 고민해 주었다. 밤이 늦도록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헤어짐이란 것이 실감 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린다 Linda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싶단다. 그녀는 따뜻한 손으로 내 손을 맞잡고 눈을 감았다.
“…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더라도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살기를 바라고, 계획하는 인도 여행도 건강하게 무사히 좋은 경험하고 돌아오길 바라며, 앞으로 이루고 싶은 일들 모두 잘 되기를 믿어… 혹시 죽는 날까지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내 마음 안에 네가 있으므로 우리는 영원한 친구이며, 너의 행복을 기원할게.”
그녀의 기도소리를 들으며, 둑 터진 댐처럼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외국인 친구라는 것이 내겐 영국에 와서 사귄 친구들이 처음이었고, 어린 내 생각만큼 좁은 우리나라에서처럼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던 헤어짐에 익숙했던 나는 이들을 정말 죽을 때까지 다시는 못 만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갑자기 복잡해진 마음으로 아이처럼 울음보가 터진 나를 그녀는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래,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괜찮은 건지도 몰랐다. 이 넓고 험한 세상에 날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아껴주는 사람이 또 한 명 늘었을 뿐이다. 런던이 아니었더라면, 나에게 익숙한 한국이었더라면 어쩌면 우리는 친구가 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나이가 나보다 두 배나 많고, 하는 일도 다르고, 국적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다. 그런 사람과 깊은 마음을 나누고 ‘친구’라는 이름을 내걸 수 있었던 내 스물세 살의 런던. 날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세계 곳곳에 있으니 그만큼 나에게는 커다란 힘이 될 것이라 믿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랄까. 나에게 이런 많은 좋은 인연들이 허락되어 있다는 것에 감동스럽고, 그것에 감사할 줄 아는 내가 다행스러웠다.
“승애, 너는 여행을 좋아하니까 네가 기독교인이 되면 정말 훌륭한 선교사가 될 것 같아.”
“아하, 그런가?”
“다 잘 될 거야.”
“고마워, 린다 Linda.”
하며, 우리는 웃었다. 그것이 런던에서의 마지막 인사였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고, 완전히 잊어버리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일상의 자투리와 반복되는 하루하루에 서로를 조금씩 묻어두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회사생활을 시작했고, 2008년부터 아부다비(AbuDhabi)의 현장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해외 근무라서 6개월에 한 번씩 꽤 긴 휴가를 갈 수 있었는데, 매번 다음 휴가 계획을 짜는 것으로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지내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꽤나 업무 관련 스트레스가 심해 평소에는 거칠고 힘든 여행을 선호하는 나지만, 휴가 때에는 무조건 푹 쉬고 싶다는 갈망에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가까운 휴양지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내 눈에 확 들어온 지도의 작은 점, 모리셔스였다.
‘아, 린다 Linda는 모리셔스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불현듯, 그녀가 생각났다. 그렇게 나는 2008년 겨울, 모리셔스행 비행기를 탔다.
바다는 눈이 부신 에메랄드 빛, 들판은 넘실넘실 진한 초록의 파인애플 밭, 온 섬 전체가 푸르르고, 푸르르고, 푸르른 모리셔스에 도착했을 때에도 나는 린다 Linda를 다시 만나게 될 줄 몰랐다. 아부다비에서 미리 보낸 나의 이메일에 그녀는 답장이 없었다.
‘모리셔스에 없는 거 아닐까? 아니면, 모리셔스에서는 메일 확인하는 게 힘든 걸까? 설마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다채롭고도 불길한 생각들을 주워 삼키며 숙소에 도착해 메일을 확인했을 때,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녀가 이 곳에 있다! 갑자기 참을 수 없이 가슴이 두근두근 대기 시작했다. 내가 모리셔스라는 생소하고도 생경한 땅에 발을 딛게 될 줄도 몰랐고, 그 어색하고 낯선 땅에 나를 기억해주는 고마운 친구가 살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날 밤은 마치 어린아이가 다음 날 소풍을 기다리는 것 마냥 설레고 들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녀는 다음 날 오후, 일을 마치고 내가 머무는 곳으로 데리러 왔다.
“Hey, brave girl!”
4년 전과 똑같이 그녀는 나를 ‘brave girl’이라 부르며 달려왔다. 수많은 인파 속에 지나쳤어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녀나 나나 별로 변한 것이 없다. 오지로 선교활동을 다녀오느라 메일을 늦게 확인했다며 미안해했다. 그러나 엄마 같은 내 친구 린다 Linda를 푸르른 그녀의 나라에서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선물 같은 일인걸.
우리는 런던에서처럼 린다 Linda의 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가는 길에 모리셔스에서 가장 오랜 전통이 있는 시장에 가서 장을 봐 집으로 향했다. 그녀의 집은 여전히 그녀를 닮아 아담하고 아기자기했다. 이제 막 선교여행에서 돌아와 집안이 엉망이라는 그녀의 말과는 달리, 푸르른 그녀의 나라를 닮은 싱싱한 그녀의 집에서 나는 낯선 땅의 포근함을 느꼈다. 린다 Linda만의 공기가 따뜻하게 집을 감싸고 있었다. 저녁은 자신이 해주고 싶다며 부엌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친구 덕에 나는 집 근처를 산책하며 4년 동안 잊고 있었던 그녀의 공기를 실컷 마음에 담고 있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집 마당 커다란 나무에는 지금 한창인 리치(리쯔)가 빨갛게 잔뜩 매달려 있었다.
“린다 Linda! 혹시 마당에 리치(리쯔) 따먹어도 되는 거야?”
“응. 그럼 얼마든지. 그런데 조금 위험하니까 내 동네 친구가 오거든 같이 따는 게 어때?”
저녁때가 다가오자, 린다 Linda의 동네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손님이 온다는 이야기를 미리 들은 터였다. 린다 Linda가 영국에 있을 때 만난 또 다른 친구인 엘리자베스 Elizaberh와 14살밖에 안됐지만 나보다 더 어른스러워 대화가 잘 통했던 에밀리 Emily까지 4명이서 저녁을 함께 하게 되었다. 여러 사람 불러 저녁을 먹는 것도 그녀의 여전한 취미생활인 듯해서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린다 Linda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엘리자베스 Elizabeth는 테이블 세팅을 하고, 에밀리 Emily와 나는 마당에서 리츠(리쯔)를 따기로 했다. 에밀리 Emily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빽빽하게 열린 빨간 리츠(리쯔)를 준비한 상자 가득 따 놓고 오늘 저녁의 디저트로 하기로 했다. 너무 바빠서 따로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고 미안해하면서도 그녀는 식탁이 가득 차게 저녁을 차려주었고, 런던에서의 식사를 떠올리면서도 모리셔스만의 화창한 기운이 감싸는 충만한 저녁 식사를 했다.
우리는 함께 식사한 자리를 정리하고, 거실에 옹기종기 앉아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지금의 생활, 여행 이야기, 예전 런던에서의 추억 등등 쉴 새 없이 이야깃거리는 이어졌다.
“더운 사막의 아부다비에서 일하는 것도 그렇고, 모리셔스까지 혼자 찾아온 것도 그렇고, 승애 너는 여전히 brave girl이구나~
런던에서 헤어질 때 내가 바람이라고 말했던, 혼자 인도 여행을 다녀온 것도, 건설현장의 엔지니어가 된 것도, 아무 연고도 없이-숙소도 예약되지 않은 채로- 배낭 하나 메고 모리셔스 공항에 도착했다는 것도, 진짜로 해냈다며 나보다 더 기뻐해 주었다. 헤어짐의 순간에 감당할 수 없게 내 눈물을 왈칵 쏟게 했던 그녀의 진심이 갑작스레 다시 만난 4년 만의 어느 날, 런던이 아닌 아프리카의 섬, 그리고 그녀의 고향, 모리셔스에서 또 한 번 느껴졌다.
런던에서의 추억을 하나, 둘씩 쏟아내다가 문득 사진이 보고 싶다며 그녀의 오래된 앨범을 함께 보게 되었다.
“아, 학교 근처에 이 산책길 참 좋았는데… 그렇지?”
“맞아. 봄에는 수선화가 가득 피었었지.”
라며, 한껏 그때로 돌아가 마음껏 추억의 향기를 맡다가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4년 전의 내 모습을 발견했다.
“어? 이런 사진이 있었어?”
“그건 내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라서 승애 네겐 미처 전해주지 못했나 봐.”
“아, 그랬구나. 내가 기억할 수 없는 나의 어느 한순간이 너의 앨범에 간직되고 있다니 느낌이 이상해.”
나도 모르게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동마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추억과 감동에 젖어 나는 모리셔스에 있는 동안 린다 Linda의 집에 묵기로 했다. 그녀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낮에는 나 혼자 돌아다녔지만, 저녁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너무 신기하고도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그녀의 집에서 머문 지 삼 일째 되는 날, 그녀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데 내 휴대폰이 울렸다. 해외 현장으로 발령받을 때 한국에서 로밍해서 가져온 것이었기 때문에 정말 급한 일이 아니면 잘 울리지 않는 것이라, 휴가 중인 그 시간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문득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의 암 진단 소식과 수술일정을 전하는 전화에 따뜻했던 모리셔스 여름밤의 기쁨은 순식간에 깨지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나는 당황했고, 나의 표정을 본 린다 Linda는 내 정신없는 넋두리를 아무 말도 않고 들어주었다.
“지금은 너무 늦어서 비행기표를 구할 수도 없어. 그러니 일단 자고, 내일 아침 나랑 함께 빨리 한국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내가 기도할 테니, 승애 너는 좋지 않은 생각 많이 하지 말고, 푹 자도록 해.”
그렇게 갑자기 4년의 시간을 쓰다듬는 즐거웠던 시간이 우울한 밤으로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아빠가 병으로 돌아가시고도 혼자 씩씩하게 잘 살아오셨고, 별다르게 크게 아픈 데 없었던 엄마이기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는 내 사고 회로를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린다 Linda 말대로 일단 잠자리에 누웠다. 잤는지 말았는지 모를 악몽 같은 밤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린다 Linda는 각 곳으로 수소문하여 마다가스카르와 태국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갈 수 있는 비행기표를 구해 주었다. 당일 오후 바로 출발할 수 있는 비행 편이었다.
사는 동안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친구를 4년 만에 낯설고 새로운 곳에서 만나 그 추억을 다 곱씹기도 전에 우리는 또다시 정신없이 헤어져야 했다. 이런 순간에도 끊임없이 나를 걱정해 주고, 한국에 있는 나의 가족을 걱정해 주는 친구가 옆에 없었더라면 나는 그 끔찍한 순간을 어떻게 견뎠을지 모를 일이다. 공항으로 가는 내내 린다 Linda는 나의 손을 꼭 붙잡고 쓰다듬고 쓰다듬어 주었다.
“먼 길인데 조심히 가고 너무 걱정하지 마. 별일 없을 거야.”
“응. 고마워 린다 Linda. 오랜만에 만났는데 신세만 지고 가는 것 같아 미안해.”
“미안하기는 뭐가 미안해. 너와 네 가족이 행복한 것은 나에게도 중요해. 그러니 가서 엄마 잘 보살펴 드리고 또 연락하자.”
“정말 고마워. 도착하면 연락할게. 우리… 또… 보자!”
오래 기다렸던, 아니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재회의 시간은 삼 일이 고작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두 번째 헤어짐을 했고, 그 이후로 아직까지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엄마의 수술이 잘 끝났다는 나의 연락에 그녀는 감사하다며 기도를 해 주었다. 가끔 린다 Linda와 함께 했던 모리셔스에서의 삼 일이 신기루 같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 시간이 실제로 존재하는 시간이었나, 하는. 만났던 첫날 저녁 함께 찍은 사진이 없었더라면, 정말 나는 그 시간이 신기루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린다 Linda라는 친구는 내게 더 애틋하게 남았다.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만나는 건 거의 불가능할 거라고 추측하지만, 이 생에 마지막으로 우리 둘에게 주어진 시간이 삼 일이 전부였더라도 아쉽거나 후회스럽지는 않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는 언제나 충만하고, 언제나 충분히 따뜻하고, 언제나 충분히 소중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되었다. 그것이면 되었다.
친구란, 그리고 우정이란, 나이가 비슷한 사람만이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까이 있어야 이뤄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주 얼굴을 보아야 확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어디서도 얻기 힘든 그 깨우침을 나에게 가르쳐 준 사람. 지금은 또 세상 어디에서 서로의 행복을 기도하며 각자의 몫으로 잘 살고 있겠지.
우리, 언젠가, 어디에선가 또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