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자이살메르 (December 2004 – January 2005)
인도에 와서 한 달이 거의 다 될 때쯤 나는 인도의 북서부에 있는 사막도시 자이살메르로 향하고 있었다. 12월 초에 시작한 여행은 어느새 12월의 마지막 날에 다다르고 있었고, 영국 교환학생과 첫 장기 배낭여행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던 특별한 2004년의 마지막 밤을 사막에서 보내고 2005년의 첫 해를 모래언덕 너머로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달려간 곳이었다.
그러나 나 혼자만 사막의 새해 일출을 꿈꾸는 것은 아니었던가 보다. 사막으로 가는 낙타 사파리를 신청하러 갔더니 근래 가장 많은 인원이라는 23명 팀이 꾸려져 있었다. 게다가 인도를 여행하는 한국 사람이 이렇게 많았던가, 싶을 정도로 인도 여행 중 오다가다 한국 사람을 참 많이도 마주쳤는데, 낙타 사파리는 그 절정을 이뤘다. 함께 출발하게 된 23명 중 22명이 한국인이었던 것이었다. 여행 중 만나는 한국 사람들이 반가울 때도 있지만 인도에서처럼 너무 많은 한국 사람을 만나면 오히려 피하게 되는 때도 있다. 그래도 새해 맞이니까 모처럼 북적북적한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12월 31일에 맞추어 낙타 사파리를 예약해 놓고서는 남은 며칠간은 자이살메르 시내를 구경하며 지냈다. 자이살메르 성은 아직도 예전 그대로 사람들이 성 안에 살고 있어 특별한 곳이다. 생동감이 넘치는 유적의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어쩌면 조상들이 남겨준 유산을 가장 잘 보존하는 방법이란 것이 담장을 치고 접근도 못하게 막아 놓는 것이 아니라 자이살메르 사람들처럼 생활 속에서 예전 모습 그대로 잘 사용해 주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작은 동네를 빙글빙글 돌아다니다 보니 함께 낙타 사파리를 할 한국 여행자들을 차례로 마주치게 되었다. 그중에는 우연하게도 카주라호부터 오르차, 아그라, 자이푸르까지 계속 마주쳤지만 눈인사만 나누었을 뿐 대화를 나누어본 적이 없었던 M, J, S도 포함되어 있었다. M과 J는 남매가 함께 여행을 왔고, S는 이들과 어디선가 만나 동행 중이라고 했다. 신기하게도 J, S, 그리고 나는 모두 동갑내기였다. 덕분에 우리는 자이살메르에서 겨우 말문을 트고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되었지만 급속도로 친해졌다.
나는 이집트에서 이미 사막을 첫 경험했고, 그 무한한 자연 속에서의 황홀한 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별다른 걱정도 없이 사막으로 들어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고, 드디어 12월 31일 아침 우리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한 곳에 모였다. 그런데 그 전날 사막에 들어가서 하루 밤을 보내고 돌아온 팀의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우리가 출발도 하기 전 이른 아침에 돌아온 것부터가 이상했는데, 그들은 돌아오다가 수영이라도 한 걸까, 쫄딱 젖은 채로 돌아왔다.
“어젯밤에 사막에 비가 왔어요. 그것도 꽤 많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가서 내리는 비 다 맞으면서 잤죠.”
그중 한 한국인 여행자가 말했다. 그러면서 밤새 추위에 떨었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계절상 겨울인 때라도 추위를 느낄 정도는 아니라고 해서 우리 모두도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는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게다가 지금은 분명 건기인데, 비라니. 그것도 사막에?’
순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멍했지만 다시 생각하면 좋은 징조일 수도 있었다. 건조한 사막에 비가 왔다는 것은 분명 나쁜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생각은 현실 앞에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도 당장 사막 한가운데에서 비를 맞든, 태풍을 맞든 아무런 대책이 없었던 것이다.
“괜찮아. 괜찮아. 오늘은 비 안 올 거예요.”
낙타 사파리를 주관하는 가이드는 무슨 근거인지 그렇게 말하며 우리를 재촉했다. 하긴 우리가 여기서 시간을 더 보낸다고 해도 별 특별한 방법은 없었다. 애초부터 인도를 여행하는 우리에게는 방한장비가 없었다. 그렇게 설렘 반, 걱정 반으로 23명의 낙타 사파리는 시작되었다.
사실 비가 왔다는 것도, 밤새 추위에 떨었다는 것도 우리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때의 우리는 어렸고, 당장 눈 앞의 즐거움에 더 열광했다. 세상 무슨 일이든지 내게 덤벼도 좋다는 패기로 가득 찼던 나이였다. 마을 이 점점 멀어지고 모래색이 점점 더 진해질수록 가슴이 뛰기 시작했고, 이미 밤에 대한 걱정은 접은 지 오래되었다.
자동차를 타고 사막의 초입에 다다랐다. 이미 마을과 사람들은 시야에서 사라진 대신 듬성듬성 모래언덕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고, 그곳에 우리가 타고 갈 낙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나름 쌀쌀한 바람이 꽤 세게 불고 있었지만 우리들 중 흥분한 표정을 감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낙타를 타기 전, 각자 낙타를 정하고 들고 온 간단한 짐을 낙타에 매었다. 그리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꺼내어 몸에 걸치기 시작했다. 바지 두 벌, 양말 두 켤레, 티셔츠와 후드티 하나, 그리고 스카프까지 입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입어야 했다. 그렇게 단단히 무장을 다 마친 뒤에 본격적인 출발에 앞서 간단한 간식 시간을 가졌다. 이미 나무 아래에서 낙타 가이드들이 불을 피우고 짜파티를 굽고 있었다. 우리도 모두 다 같이 덤벼들어 반죽을 하고 납작하게 펼쳐 짜파티를 구워냈다. 막 구운 짜파티는 다른 양념이나 소스가 없어도 충분한 맛을 냈다. 그곳에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따뜻함을 몸에 간직했다.
드디어 낙타를 타고 사막 깊은 곳으로 들어갈 시간, 나는 내 낙타에 올라탔다. 낙타를 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발이 땅에서 떨어져 공중을 부유하는 듯한 느낌이 좋았다. 스스로 새처럼 날지 못하니 이런 동물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내가 날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좋았다. 그러면 세상에 못 갈 곳이 없고, 못 할 일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날은 우연히도 순하게 생겨서 골랐던 내 낙타가 무리 중에 우두머리라서 제일 앞서 나가야 한단다. 나를 뒤따르는 22 마리의 낙타를 거느리고 혼자 앞서서 생명체라고는 보이지 않는 광활한 모래사막을 마주할 때의 감동이라니. 세상에나 혼자 동떨어진 느낌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느낌이기도 했다. 게다가 참으로 특별하게도 비에 젖은 사막을 횡단하는 것은 쉽게 오지 않을 기회인지라 자박자박하는 낙타의 발소리에 묘한 흥분감을 가졌던 것 같기도 하다.
슬슬 허벅지 안쪽이 뻐근해질 때쯤, 우리의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사막 자체는 내가 기대한 것보다는 그다지 큰 감동을 주지 못했다. 이집트에서 경험한 사막의 모습이 나에게는 너무 완벽했었나 보다. 그래도 주어진 환경이 여행에서의 행복을 결정하는 큰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실망하거나 낙담하지는 않았다. 낙타 가이드들은 도착하자마자 우리가 잘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천막은 이집트에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대규모 인원을 고려하여 크기가 크다는 것과 어젯밤의 비상상황 때문인지 지붕도 천으로 얼기설기 만들어 주었다는 것뿐이다. 그래도 만약 비가 올 경우 지붕이 지붕 역할을 제대로 해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천막을 치고 나서는 바로 저녁식사 준비에 들어갔다. 해가 지기 전에 모든 활동을 끝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낙타 가이드를 하는 이들은 오래전부터 사막에서 생활해 오던 사람들일까? 무엇이든지 뚝딱뚝딱 잘도 해 치운다. 저녁식사도 순식간에 마련되었다. 식당에서 사 먹는 것처럼 거창함이나 다양함, 깔끔함은 기대할 수 없지만 너무나 훌륭한 한 끼였다. 막 구운 짜파티와 야채를 넣은 커리, 그리고 짜이 한 잔까지 모두들 둥그렇게 둘러앉아 사막에서의 만찬을 즐겼다. 무엇보다 식사의 하이라이트는 우리 사파리 팀 중 유일한 일본인이었던 카나 Kana가 꺼내 놓은 미소된장국이었다. 그녀가 가지고 온 분말로 끓인 인스턴트 미소된장국 한 냄비는 우리 모두의 감탄을 자아냈다. 한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나 추울 때는 뜨거운 국물 한 숟가락에 큰 위안을 받는 듯했다. 미소된장국 냄비를 아껴가며 돌려 마시면서 우리는 하나가 된 듯한 동지애를 느꼈다. 이 추운 사막의 밤을 함께 견디어 2004년을 멋지게 잘 보내 주어야 하는 전우애랄까. 훈훈한 저녁식사를 마치고는 생애 처음 해보는 간단 설거지에 돌입했다. 다름 아닌 모래 설거지. 사막의 모래를 그릇에 넣고 손으로 싹싹 비비고 나서 모래를 털어내면 끝이었다. 해보기 전에는 모래로 설거지를 한다니 왠지 찝찝하기도 하고 비위생적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미심쩍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는데 해 보니 굉장히 놀라웠다. 사막의 사람들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며 체득한 지혜였을 것이다. 심지어 보드랍고 가는 모래로 닦고 나니 그릇에서 윤까지 났다. 그렇게 모두들 주어진 환경에서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이겠지,라고 생각하니 새삼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가 장하고 대견한 생각까지 들었다.
저녁을 모두 치우고 나니, 사막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 머지않았다. 밥 먹고 힘도 나겠다, 다들 사막의 정취에 취해 이 언덕, 저 언덕을 지칠 줄 모르고 뛰어다니며 자신의 방법대로 감상을 했다. 사진을 남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제일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 저무는 해를 바라보거나. 무엇을 해도 다 담기지 않는 풍경이었다. 나는 혼자서 괜히 감상적이 되었다. 나에게는 참 많은 일들이 있었던 한 해였다. 오랫동안 바랐고 준비했던 교환학생을 다녀왔고, 처음으로 배낭을 메고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여행을 하며 다시 오지 않을 시간과 경험을 쌓았고, 또다시 나는 여행자가 되어 인도라는 낯선 땅을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음 해가 오면 오랜 시간 함께 했던 학생이라는 신분을 내어 놓고 또 다른 세상으로 첫 발을 뗄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위안되었다. 새로운 나의 삶에 대한 기대감도 더욱 증폭되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인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 팀 중에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일행이 있어서 넘어가는 해를 등에 지고 단 한 장의 단체사진을 찍었다. 모래언덕에 올라 2004년 마지막 햇빛이 비추는 우리 23명의 실루엣 사진으로 2004년 꼬리를 멋지게 장식해 주었다.
해가 저물어 갔다. 2004년 12월 31일 대망의 마지막 해가 저물어 갔다. 해가 지평선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급격히 추워졌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보호해주던 보루가 없어진 것이었다. 우리는 다시 둥그렇게 둘러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서로의 온기로 차가운 공기를 막아보려 했다. 그러나 금세 우리는 오들오들 떨었고, 결국 남자들 몇 명이 불을 피울 나무를 구해 오겠다며 나섰다. 그들의 솔선수범에 감사하며 우리는 기다렸지만 한참 만에 돌아온 그들 손에 쥐어진 것은 나무가 아닌 거친 부시 풀 몇 가닥이었다. 우리는 기분에 취해 사막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돌아다녀봐도 제대로 된 나뭇가지 하나 구할 수가 없다고 했다. 부시 풀이라도 해보자며 불을 피웠는데 바싹 마른 부시 풀은 불이 붙은 지 10 분도 안돼 다 타버리고 말았다. 쏜살같이 지나가버린 잠깐의 따스함이 우리를 더 춥게 만들었다.
“이건 정말 마지막 방법이었는데….”
한 친구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낸다. 양주 한 병이었다.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한 모금씩 돌려 마신 뒤에는 이것이 왜 오늘 밤의 최후의 방법일 수밖에 없는지 공감이 됐다. 더불어 추운 지방의 나라에서 왜 독한 술을 즐겨 마시는지도 이해가 됐다. 꿀떡 하고 넘어간 양주 한 모금 이내 피를 뜨겁게 데워 추위를 한 순간이나마 못 느끼게끔 해주었다. 평소에는 양주 한 방울도 잘 넘기지 못하는 나였지만, 독한 알코올 냄새도 느낄 새 없이 술술 넘어갔다. 그날 밤으로서는 생명수 같았던 양주 한 병 덕에 우리 모두는 2004년의 마지막을 따뜻하게 보내줄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십, 구, 팔, 칠, 육, 오, 사, 삼, 이, 일. 해피 뉴 이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시간이 2004년에서 2005년으로 바뀌는 그 순간 우리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추위를 잊은 채 가슴이 다시 두근거리고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눈에 보이는 가장 높은 모래 언덕으로 뛰어 올라갔다.
“일단 다 같이 동쪽을 향해 부모님한테 절 한 번 하자!”
이제 조금 있으면 새로운 해가 떠오를 동쪽을 향해, 그 동쪽 끝에 있을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향해, 그 땅에서 지금도 우리를 걱정하고 있을 각자의 부모님들을 향해, 우리는 큰 절을 올렸다. 새해 인사까지 큰 소리로 외쳐가며 말이다. 괜스레 울컥하는 마음에 어느새 우리는 함께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왜 그때 제일 먼저 부모님이 생각나고, 애국가가 생각났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냥 낯선 곳에서 추위에 떨며 새 날을 맞이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 하나 반대하지 않았고, 누구 하나 뭉클하지 않았던 이역시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왠지 모르게 벅차오르는 감정을 사막에 모두 쏟아내야 할 것 같았다. 이 곳에 다 내뱉고 가야 새로운 기분으로 힘차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승애야, 올해에는 꼭 원하는 건설회사 들어가기를 바랄게!”
누군가 온 우주에 대놓고 내 소원을 대신 빌어주었다. 멈추지 않고 소원 릴레이가 시작되었다.
“S야, 꼭 임용고시 합격해서 선생님 되기를 기도할게!”
“J야, 여자 친구랑 오래오래 행복하길 바라!”
“M언니, 하는 일 다 잘 되고, 남자 친구도 생겼으면 좋겠다!”
23명의 소원이 모두 우주에 새겨질 때까지 목이 터져라 함께 기원했다. 이 곳 인도 땅에서 한국 땅까지 우리 소원이 전달되어 좋은 일만 함께 하는 새로운 시간이 다가오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외치고 또 외쳤다. 우리는 낯선 땅에서 낯선 이로 만나 서로의 행복을 기원하는, 내 소원보다 네 소원을 더 크게 소리쳐주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비에 젖은 사막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었다. 그곳에서는 우리 23명의 목소리 말고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우리는 우리가 함께 외친 목소리가 온전히 어딘가에 가 닿았을 것이라고 믿었다. 소원이 진짜로 이루어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옆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그들의 마음이 있었으니 그 순간의 나에게는 그것이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더 이상 외칠 소원이 없을 때까지 소리친 뒤에야 우리는 모래언덕을 내려와 다시 천막 앞으로 왔다. 한꺼번에 진심을 쏟아부었던 탓일까. 피곤하기도 하고, 다시 슬슬 추워졌다. 이제는 최후의 방법이었던 양주도 없었다. 아직도 날이 밝으려면 5시간도 넘게 남았는데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텨야 할지 걱정이 됐다.
우리의 새해맞이 의식이 끝난 뒤, 몇몇 사람들은 결국 천막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고, 몇 남지 않은 사람들끼리 점점 가슴속 깊은 곳의 이야기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만난 지 겨우 하루밖에 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인데도 우리는 오랜 친구들처럼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여 마음을 나누었다. 낯선 땅과 낯선 공기가 만들어주는 마법 같은 시간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왠지 그곳에서라면 어떤 말을 늘어놓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이상한 믿음이 생겼다. 그 믿음 속에서 사막의 밤을 수놓아 우리는 함께 웃고 울어주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고, 마지막 세 사람이 남았다. M과 J, 그리고 나였다. 밤이 깊어질수록 점점 더 추워져 잠들기도 어려울 테지만 우리 셋은 어차피 하루 밤으로 정해진 시간을 자는데 쓰고 싶지 않았다. 추위를 쫓기 위해 뛰어다닐 기운도 더는 없는 상태였다.
“좋은 생각이 났어. 둘 다 이리 가까이 와서 무릎을 붙여봐.”
J는 M과 나를 불러 각자 무릎을 세우고 셋의 무릎을 맞댄 채 가까이 붙어 앉게 했다. 그리고는 꽃잎같이 다닥다닥 붙은 우리 셋의 머리 위로 마지막 남은 담요 한 장을 덮었다. 담요 한 장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은 장난꾸러기 어린애들 꼴이 되었다. 서로의 몸이 닿아 체온이 느껴지고 서로의 얼굴이 한 뼘 안에 있어 입김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으니 남은 밤을 보내기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있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그만 플래시를 조명 삼아 켜두고서 우리는 남은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새해를 맞이하는 각오, 인도에 와서 느낀 점들,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다는 바람, 그리고 다시 한번 서로서로 격려하고 힘차게 파이팅을 외쳐주었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우리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대로 웅크려 모여 앉은 채로 밤새 노래를 불렀다. 누구라고 지명하지도 않고 어떤 노래를 부를지 정하지도 않았지만, 어느 한 사람이 노래를 시작하면 어느새 셋이 함께 부르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다가도 갑자기 우스워 낄낄대다가 또다시 노래를 부르고, 노래가 끝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또 다른 이가 노래를 시작했다. 그러면 우리는 또 셋이 함께 불렀다.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마음과 마음이 오가고 있었다. 얇은 담요 속에서 얼굴을 맞대고 노래를 부르며 우리는 새해의 첫 날을 맞이했다.
잠 한 숨 못 자고 추위에 떨며 특별한 하루 밤을 보낸 뒤 우리는 자이살메르로 돌아왔고, 그곳에 며칠을 더 머물렀다. 밤마다 다 같이 숙소 옥상에 모여 수다를 떨기도 하고 사막의 여운을 곱씹기도 했다. 하나 둘 친구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가고 마지막으로 M과 J와 인사를 하게 되었다. 사막에서 서로의 소원을 빌어주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며 밤새도록 함께 노래해주었던 이들에게 헤어짐의 순간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 여행을 하면서 나는 인연의 힘을 믿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저 웃어 주었다. 만날 사람이면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 우리가 카주라호, 오르차, 아그라, 자이푸르에 이어 자이살메르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처럼. 언제 어디서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에도 서로에게 힘이 되는 말 한마디 해줄 수 있는 인연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혹여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아쉬울 것은 없다. 우리는 함께였던 순간 서로에게 진심으로 친구가 되어 주었고, 행복한 시간을 함께 나누어 가졌으니 그것으로 우리는 좋은 인연임에 틀림없다.
지금도 가끔은 SNS를 통하여 연락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길지 않았던 인도 여행과 여행친구들과의 만남의 추억으로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참 많이 행복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나오는 말처럼 여행을 하는 동안만큼은 우정을 나누는 방법도‘웃음’처럼 참 쉽다.
웃음은 우정을 시작하기에 결코 나쁘지 않은 방법이며, 우정을 끝내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