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콜카타 (December 2004)
2004년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던 어느 날 밤, 자정이 다 되어 도착한 인도의 밤을 가로지르는 택시 안에서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오래 꿈꾸었던 인도에 도착한 울렁거림에 가슴이 두 방망이질 쳤다.
내가 인도에 첫 발을 디딘 곳은 콜카타(Kolkata). 다른 곳을 들르지 않고 인도로 바로 오는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수도인 델리(Delhi), 혹은 남부의 대도시 뭄바이(Mumbai)로 입국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내 선택은 조금은 특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첫 도착지를 결정하는 데에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중학교 시절에 보고 아직까지 잔상이 남아있는 영화 <시티 오브 조이 City of joy>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언젠가 인도에 가게 되면 꼭 머물러 보리라 마음먹었던 곳이기도 하고, 내 나름대로는 바라나시(Varanasi)의 갠지스강과 더불어 가장 인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 여겼다. 무슨 근거였는지는 정확히 생각나지는 않지만 슬픈 역사인 영국 식민지 시절의 모습과 인도 내 유일하게 남아있는 트램이나 인력거, 그리고 지상 최대의 빈민가를 가진 도시라고 명명되는 것을 보면 그런 내 생각이 틀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부정적 수식어를 잔뜩 가지고 있는 이 거대한 혼돈의 도시가 과연 나에게는 영화처럼 ‘기쁨의 도시’로 다가올 것인지가 궁금하기도 했었다.
어둠 속에서 쌀쌀한 기운을 느끼며 비행기에서 만난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써더 스트리트(Sudder St.)로 향했다. 써더 스트리트는 방콕의 카오산 로드(Khaosan Rd.)처럼 콜카타의 유명한 여행자 거리이다. 상대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물가와 생활비 때문에 가난한 여행자들의 천국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그곳에서부터 나는 가난한 여행자 중 한 사람으로 출발하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가슴 벅차 새벽에 도착해 눈에 띄는 적당한 곳에 숙소를 잡고 감기지 않는 눈을 감고 아침을 기다렸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여러 마리의 까마귀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뜨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오감이 반응하며 깜짝 놀랐다.
‘난 지금 인도에 와 있구나. 여기는 콜카타 한가운데야.’
몇 시간 동안의 잠이 나를 눈 깜짝할 새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빨려 들어오게 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만큼 콜카타의 공기는, 그 냄새는, 나에게 생소하면서도 이상야릇한 기분에 젖게 했다. 숙소 앞 거리로 나가 아침 풍경을 마주했을 때 그 기분은 점점 더 극대화되었다. 써더 스트리트에 대한 첫인상이라 함은, 사람 사는 곳이 이렇게 더러울 수가 있을까, 혹은 자동차와 인력거와 사람과 동물이 한데 마구 섞여있는 이 거리에서 내가 한 발짝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까, 아니면 하얗고 커다란 눈을 굴리며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저들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전혀 두렵지가 않았다. 예전에 와보았던 것처럼, 언젠가 경험해본 적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과는 다르게 내 몸은 자연스럽게 반응하고 있었고 어느새 나는 그들 사이에 섞여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인도를 다녀온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별의별 말이 다 있다.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뉘는 곳이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여행자의 최고 난이도 코스로 인도 여행을 꼽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믿었다. 인도에 오게 된 사람은 인도가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선택을 받은 사람 중의 한 명으로 아마도 인도를 좋아하게 되리라는 것을.
아침산책을 하던 중, 길목 초입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을 발견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가까이 다가가는데 달콤하고도 알싸한 향이 코를 찌른다. 짜이 가게였다. 영국에서 지낼 때 홍차에 우유를 넣어 마시는 밀크티에 반해서 인도에 오면 제일 먹어보고 싶은 것도 인도식 밀크티였는데 생각보다 이르게, 생각보다 쉽게 마주친 것이었다. 현지인들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 짜이를 만드는 것을 한참 바라보았다. 가게랄 것도 없는 곳이었다. 길 모퉁이에 간판도, 문짝도 제대로 없는 좁은 공간에 차를 끓일 수 있는 도구만 갖춰두고 아저씨 한 명이 끊임없이 짜이를 만들고 있었다. 그 앞 골목길에 좌석이랍시고 기다란 나무 의자 몇 개 세워두고 그곳에 앉아서, 혹은 그냥 길가에 서서 짜이를 먹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도 한 잔 주문하고는 막 끓인 짜이를 받아 들고 나무 의자에 끼여 앉았다. 처음 맛 본 인도식 짜이는 아침잠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눈이 번쩍 뜨이게 할 만큼 맛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계피와 향신료 향이 듬뿍 실려 있는 데다 달달하기 까지 한 것이 아주 내 입맛에 딱 맞추어 놓은 레시피 같았다. 게다가 한 잔에 2루피(당시 한화 50원) 밖에 하지 않아서 나는 앉은자리에서 3잔을 해치웠다. 아침밥을 이것으로 대신할 셈인지 쉬지 않고 마셔대는 나를 인도인들이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천천히 마셔. 호호 불어가며 한 모금씩 음미하면서 마셔야 짜이는 더 맛있단다.”
내게 최상의 짜이를 끓여준 가게 주인아저씨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제야 나는 짜이와 짜이를 만드는 아저씨의 손에서 눈을 떼고 아저씨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사람 좋게 생긴 둥글둥글한 얼굴에 땀이 그득한 채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어릴 적 나에게 무한정 친절하기만 했던 사람 좋던 곰보 선생님처럼 얼굴 가득 곰보자국이 있었다. 그 날부터 나는 짜이 가게 주인아저씨를 ‘곰보딱지 아저씨’라고 부르기로 했다.
첫 만남에 한꺼번에 3잔을 마시며 얼굴도장을 찍은 뒤로, 수시로 오다가다 들러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짜이 가게 앞 의자에 붙박이가 되어 짜이를 마시곤 했다. 그러는 사이 자연스럽게 가게에서 일하는 아이들과 짜이 가게 단골손님들과도 친해지게 되었다. 낮 시간 동안 만들어진 짜이를 손님들에게 가져다주는 길거리 서빙을 하는 꼬마들이 대여섯 명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곰보딱지 아저씨가 가난한 아이들을 데려다가 먹여주고 재워주며 소일거리로 가게에서 웨이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여행 에세이에서 눈 스프레이를 가지고 와서 인도의 아이들에게 생애 첫눈을 보게 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는데 이 꼬마들 때문에 눈 스프레이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어느 날에는 콜카타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끊임없이 구애를 하는 릭샤꾼을 만났다. 인도를 여행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마담, 릭샤?’ 거나 ‘마담, 파시미나 숄?’ 일 정도로 절대 포기하지 않고 쫓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곤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중에 콜카타에서의 릭샤꾼은 나에게는 더욱 눈을 마주치기 힘든 상대였다. 당시 인도에서도 콜카타에만 남아있는 인력거 릭샤는 예전처럼 사람이 직접 두 발로 뛰어 끌었다. 그러나 그들의 뛰는 발은 맨발이거나 거의 다 낡아서 신지 않은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슬리퍼가 전부였다. 그런 그들의 등 뒤로 의자에 편하게 앉아 그들 등에 흐르는 땀을 보고 있을 자신이 없어서 나는 콜카타에 머무는 내내 릭샤꾼들을 외면하려 애써야 했다. 나를 끈질기게 붙잡는 릭샤꾼의 눈에서 하사리(영화 ‘시티 오브 조이’의 주인공)를 보았고, 당나귀 택시를 몰던 이집트 소년 스후트를 보았다. 돈을 벌지 못하게 되어 실망한 그의 눈을 마주치면 나는 곰보딱지 아저씨의 짜이 가게로 달려갔다.
“아저씨, 나는 도저히 인력거를 탈 수가 없어요. 땀이 흐르는 그들의 마른 몸을, 굳은살이 박힌 맨발을 보면서 앉아있을 자신이 없어요.”
“네가 마음이 여려서 그렇지. 이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편해지지 않을까? 네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인력거를 타고 돈을 내는 것은 네가 나에게 와서 짜이를 마시고 돈을 내는 것과 같아. 어때?”
“음, 그렇긴 해요. 아무래도 그들에게 살아갈 돈을 벌어주는 일이니까 굳이 외면할 필요까지는 없겠죠? 내가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요.”
결국 나는 콜카타를 떠나는 그 날까지 사람이 끄는 릭샤를 타보지 못했지만, 곰보딱지 아저씨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 내 불편한 마음에 대해 위안을 받고 있었다.
또 어느 날은 써더 스트리트를 벗어나 천천히 걸어 시내 구경을 하고 있었다. 여행자 거리를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거리환경은 더 험악해졌다. 차선도 없고 횡단보도도 없는 거리는 자동차든, 자전거든, 사람이든, 소든 먼저 지나가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얽힌 전깃줄은 사람의 키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내려 와 있고 쓰러질 듯한 건물과 거리를 뒤덮은 쓰레기는 위험해 보였지만 사방에서 쉴 새 없이 울려대는 경적소리는 어떤 생각도 깊이 할 수 없게 했다. 그래도 모든 생활이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콜카타의 순박한 사람들을 보면 또 한 순간 안도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여행자들이 많은 써더 스트리트에서는 인도 사람들의 원래 생활모습을 보는 것이 어렵기도 한데, 조금만 벗어나니 사심 없이 웃어주고 반겨주는 사람들이 인도의 속살을 보여주는 것 같아 기분이 싹 맑아지곤 했다. 어쩌면 이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해치는 것은 여행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해진 마음으로 써더 스트리트로 돌아오는 길에 휘황찬란하게 불 밝혀진 곳을 지나치게 되었다. 무언가 특별한 행사가 있는 것 같아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또 기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여기는 결혼식장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못 들어갑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결혼하는 것인지 문 앞의 경호원이 기웃거리는 것조차 제지하고 나섰다. 갑자기 오기가 생겨 한 번만 들어가 보자고 부탁해 보려던 찰나에 결혼식에 초청받아 들어가던 한 신사분의 호의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곳에 들어가 마주친 광경은 또 한 번 눈 깜짝할 새 다른 세상으로 이동한 듯했다. 흡사 영화에나 나오는 재벌들의 파티 장면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혼의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도 영화배우처럼 멋있고, 예뻤다. 어느새 나도 거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인 것처럼 그곳에서 마주치던 수많은 사람들이 눈 앞을 스쳐갔지만 신기한 마음으로 결혼식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이제 다 봤으면 나가세요.”
또 다른 경호원이 다가오더니 나를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는 내가 대문 밖을 나설 때까지 따라오며 확실히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돌아섰다. 기분이 상했다. 결혼식장을 빠져나오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거리의 풍경에 더 화가 났다. 결혼식장은 나에게조차 너무 먼 꿈속의 허상일뿐이었다. 그 길로 또 곰보딱지 아저씨의 가게로 갔다.
“아저씨, 지나가다가 결혼식장에 들어가게 됐는데 결국 쫓겨났어요. 엄청 부자인 사람들인가 봐요. 굉장히 화려한 파티였는데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지게 막 쫓아내더라고요. 거기서 나오자마자 거리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니 더 마음이 아팠어요.”
늘 내가 투덜거리면 한 마디로 정리해주는 아저씨였지만, 그 날만은 아무 말이 없었다. 대신 나에게 평소와는 다르게 토기에 담긴 짜이 한 잔을 내밀었다.
“오늘은 유리잔 대신 이 토기잔에 마셔봐. 다 마시고는 바닥에 힘차게 내던져 깨뜨리는 거야.”
“이걸 깨뜨리라고요? 아까운데….”
“그건 원래 일회용이야. 한 번 쓰면 다시는 쓰지 않아. 그러니까 네 마음 내키는 대로 최대한 힘차게 바닥에 내던져도 돼.”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짜이 한 잔을 냅다 들이마시고는 바닥에 힘껏 토기잔을 내던졌다. 서너 잔을 그렇게 하고 났더니 혼탁해졌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저씨, 이거 정말 스트레스 풀려요.”
“그래. 그걸로 결혼식장 일은 잊어버려.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우리같이 사는 사람도 있는 거지. 게다가 우리는 아직도 신분에 얽매여 살기도 해. 화 내봐야 소용없는 경우가 많지.”
아저씨의 담담한 말에 나는 뜨끔했다. 어쩌면 떠나는 순간 그만인 나보다 평생을 이 곳에서 거리의 사람들과 함께 하며 살아갈 아저씨가 더 화날 일이었다. 나는 경솔한 내 생각에 미안해졌다.
“아저씨, 나는요. 아저씨가 참 좋아요. 아저씨가 만들어 준 짜이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고요.”
아저씨는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듯 환하게 웃어주었다.
콜카타에는 세계인이 찾아오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테레사 Teresa 수녀가 세운 마더하우스이다. 나 역시 콜카타에 오기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찾아가려니 망설여지게 되었다. 애초에 나는 봉사가 아닌 여행을 목적으로 온 사람이고, 관광지를 구경하는 것처럼 짧은 시간 다녀가는 것이라면 아예 봉사하러 가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이상하지만 제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생이 어디 계획대로 되는 것이던가. 콜카타에서 만나게 된 다른 여행자들의 권유와 협박 아닌 협박에 결국 나는 마더하우스로 향하게 되었다. 선뜻 나서지 못하고 끌려가다시피 한 터라 나의 마더하우스 첫 방문 소감은 시큰둥했다. 그러나 첫날 봉사를 해보고 나서 나는 내 생각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시답잖은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억지로 만들어진 감동의 물결은 없었다. 그곳은 미약한 내 일손 하나도 절실하게 필요한 그 자체로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던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그곳에서 자랑스러운 한국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았고, 삶에 대한 안타까운 집착을 보았고, 죽음 앞에 선 이들의 두려움과 그들을 오로지 따뜻한 마음 하나로 감싸고 있는 고귀한 사람들의 마음을 보았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나도 그 공간에 동화되었고 내 손을 꼭 쥐어서라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어 주어 평온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삶과 죽음에 대한 말로 설명할 수 없이 복잡한 생각과 감정이 머리와 마음을 어지럽히는데 봉사시간 도중 중간 휴식시간이 되었고, 옥상 테라스에서 잠시 휴식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때 전 세계에서 온 봉사자들의 땀이 밴 지붕 위에 널어진 색색의 빨래들을,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이제는 정들어버린 콜카타의 거리를, 거부할 수 없이 사랑하게 되어버린 인도의 향기를 보며 마신 짜이 한 잔은 가슴이 기억하는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그리고 나를 이 곳으로 이끌어준 모든 것에 감사했다. 그 날 봉사가 끝난 후 곰보딱지 아저씨네 가게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들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아저씨, 자발적은 아니었지만 마더하우스에 다녀오길 정말 잘했어요. 이제까지 너무 좁은 세상만 보고 살아온 것 같아요. 그리고 덕분에 인도에 대해서, 인도 사람들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되었어요.”
“마더하우스는 인도 사람들에게도 고마운 곳이지. 우리는 그곳에서 봉사하는 모든 사람들을 ‘천사’라고 부른단다. 테레사 Teresa 수녀에게 그랬듯이 말이야. 아마도 앞으로도 영원히 전 세계의 수많은 천사가 콜카타를 찾아오고 머물테니 콜카타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니?”
“그렇네요. 그래서 내가 만난 콜카타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 사람들이었군요. 그 영향으로 나도 행복해지나 봐요. 마더하우스에서 마신 짜이 한 잔이 아저씨가 만들어 준 짜이를 마실 때처럼 나를 너무 행복하게 했거든요.”
처음 만난 인도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어느 것 하나 빠질 수 없지만 특히 콜카타의 써더 스트리트에는 곰보딱지 아저씨의 짜이 가게가 있어 행복했다. 1평도 안 되는 열린 공간에 맘씨 좋은 곰보딱지 아저씨와 두 아들, 그리고 오갈 곳 없는 꼬마들이 만들어가는 짜이 가게. 골목길 담벼락에 붙어있는 조그만 의자에 앉아 사람들과 인사하고 이야기하며 함께 보내는 시간 속에서 나는 행복했다. 나중에는 나에게 짜이를 내어 주고도 절대 돈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게다가 동네 사람들은 짜파티를 구워주거나 짜이와 함께 먹으라고 근처 리어카에서 팝콘까지 사다 주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매번 내가 먹은 것에 해당하는 돈을 내겠다고 싸움 아닌 싸움을 해야 했다. 곰보딱지 아저씨의 짜이 가게 때문에, 매일같이 그곳을 지켜주는 곰보딱지 아저씨 때문에 나는 콜카타가, 인도가 너무 좋아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나는 전체 여정을 40여 일로 생각하고 왔던 인도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일주일이 넘도록 콜카타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러나 언제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이다. 다른 도시로 이동을 하더라도 콜카타의 여운을 조금 더 오래 남기고 싶어 콜카타와는 완전히 다른 시골마을로 가기로 했다. 그래야 콜카타의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히말라야 산자락으로 올라가서 다만 며칠이라도 조용히 내 몸에 쌓인 콜카타의 기운이 온전히 나에게 각인될 수 있도록 시간을 갖기로 했다. 떠나는 날 저녁, 마지막으로 곰보딱지 아저씨의 가게로 갔다.
“아저씨, 저 오늘 밤 기차로 떠나요. 아쉽지만 콜카타를 더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해요.”
“드디어 떠나는 날이구나. 벌써 오랫동안 만난 사람인 것 같아 나도 아쉽지만 갈 사람은 가야겠지. 지금까지 한 것처럼만 하면 남은 인도 여행도 좋은 시간이 될 거야. 그리고 인연이 되면 다시 이 곳에서 만날 일이 있겠지. 항상 행복하렴.”
아저씨는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계피와 향신료를 듬뿍 넣어 큰 잔에 짜이를 한 잔 끓여주었다. 그것이 아저씨의 이별을 위한 인사 방법이었다. 그동안 정들었던 가게의 꼬마 웨이터들과도 한 번씩 안아주며 진한 작별의 아쉬움을 전했고, 친해졌던 동네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거의 매일 저녁 짜이 가게에서 만나다시피 했던 아저씨는 짜이를 마시다가 말고 자신의 택시를 가져와 나를 기차역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나에게는 충분히 기쁨의 도시였던 콜카타. 나는 그곳에서 딱히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행복했다. 가난한 여행자들의 거리 써더 스트리트에서 짜이와 함께 나누었던 인연들만으로도 나는 완벽하게 행복했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눈에 띄지 않는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짜이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고 싶다. 나를 향해 웃어주고 다독여주는 곰보딱지 아저씨와 사람들이 있는 그곳에서 지난 일을 이야기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