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도우베야짓 (June 2004)
어쩌다 계획에도 없던 터키 동부 여행을 하게 되었지만, 30여 분만 걸어가면 국경을 통과하여 이란으로 넘어갈 수 있는 터키 땅의 동쪽의 끝인 도우베야짓까지 가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늘 정해진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에서 어느 곳이든 그곳에 내 발길이 닿게 되는 것은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2004년 6월, 그 시간에 내가 도우베야짓에 머물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오후, 돌무쉬(미니버스)를 타고 도우베야짓에 도착했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거리에서 배낭을 메고 뛰던 우리를 위해 열 발자국 돌아가면 되는 것을 도우베야짓 사람들은 돌로 징검다리를 만들어 웅덩이를 건널 수 있게 해주었다. 덕분에 비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서도 기분이 좋아져 중심 거리에 대충 아무 곳이나 숙소를 정하고 짐을 풀었다. 이미 여행은 한 달을 훌쩍 넘고 있었고, 이제는 웬만한 곳이면 두 다리를 쭉 펴고 편히 잘 수 있어 숙소를 고르는 것도 까다롭지 않았다. 바로 밖으로 나와 주요 거리부터 어슬렁어슬렁 걷기 시작했다. 터키 동부지방으로 넘어오면서 다른 여행자들도 찾기 어려운 데다 유난히 현지인들의 시선을 많이 받기는 했지만, 도우베야짓은 한층 더 강도가 셌다. 하긴 좁은 마을에 난데없이 나타나 우산도 없이 비에 쫄딱 젖고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꼴이나 그리스와 이집트를 거쳐오면서 꼬질꼬질 새까맣게 탄 피부가 더욱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우베야짓에는 여행자인 나의 시선을 끄는 것도 확실히 존재했다. 도심 한복판에 차이듯 서 있는 군인들과 건물 뒤편에 세워져 있는 탱크 같은 군장비들이 그것이었다. 처음 거리의 분위기를 보고 살짝 겁을 먹긴 했지만, 국경도시이기 때문에 다른 도시에 비해 경비 강화가 되어 있을 뿐 특별히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기에 금세 잊어버렸다. 워낙 작은 도시라서 중심 거리만 몇 번 오가도 금세 마을 사람들과 친해져서 어느새 나도 도우베야짓에 동화되어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점심을 먹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거리에 앉아 한숨 돌리고 있을 때였다.
“안녕, 나는 메멧 Memet이라고 해. 넌 한국인이지?”
“어, 어떻게 알았어요? 피부가 새까맣게 타서 한국인처럼 안 보일 텐데.”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니까 다 알 수 있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메멧 Memet 아저씨는 나에게 다가왔다. 거리에 앉은 채로 함께 차를 마시며 그는 나에게 도우베야짓에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딱히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이 발길이 닿는 대로 찾아온 곳이었기에 얼버무리는 나에게 메멧 Memet 아저씨가 제안했다.
“그럼 오랜만에 한국 친구를 만난 기념으로 내가 너의 가이드를 해줄게. 내 차를 타고 내가 보여주고 싶은 곳들을 가는 거야. 어때?”
나는 가이드라는 말에, 이제까지 나에게 한 말들이 영업을 위한 서비스였나 싶어서 일순간 실망했다. 그리고 굳이 유료 가이드까지 고용하여 유명한 곳을 둘러보는 것은 내 취향으로는 선뜻 내키지 않아 거절했다. 거듭 나에게 권유하는 아저씨에게 결국은 내가 거절하는 이유까지 밝히게 되었다.
“난 돈을 내고 가이드를 고용하여 여행하는 돈 많은 여행자가 아니에요. 그리고 가이드가 해주는 설명을 들으며 유명한 곳을 둘러보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요. 그것보다는 그냥 이 거리에 앉아서 동네 사람들과 차 마시고 이야기 나누는 게 더 좋아요.”
“이봐, 친구. 내가 가이드해주겠다는 것은 돈을 받겠다는 뜻이 아니야. 단지 오랜만에 한국에서 온 친구를 만나서 반가운 것뿐이야. 우리는 친구 사이에는 돈을 받지 않아.”
내가 무언가 단단히 오해한 것 같았다. 그리곤 너털웃음을 짓는 메멧 Memet 아저씨와 아저씨의 막내아들 무스타파 Mustafa와 함께 하는 도우베야짓 드라이브가 시작되었다.
터키의 동부 아나톨리아(Anatolia) 지역의 광활한 자연과 왠지 모르게 황량한 생각이 먼저 드는 국경지대의 모습의 느끼고 싶어 나는 마을 밖으로 벗어난 드라이브를 제안했다. 터키와 이란을 가로막은 국경선은 내가 태어나 처음 본 육로 국경의 모습이었다. 다른 나라에 가려면 비행기를 타는 것이 거의 당연시되는 우리나라에서 자란 나는 그 생소한 풍경에 한동안 마음을 빼앗겼던 것 같다. 게다가 더욱 재미있는 것은, 종교에 상관없이 모든 여자들은 히잡을 쓰고 머리카락과 팔, 다리를 감추어야 하는 이란에서 터키로 국경을 넘어오는 여자들의 모습이었다. 국경이라고 정의된 철조망이 무엇이라고 그 선을 넘자마자 제일 먼저 히잡을 벗어 새까맣고 탐스러운 머리칼을 날리며 걸어오는 여자들의 모습이 꼭 짜고 하는 연극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저 얇디얇은 철조망이 이렇게 많은 것들을 양 쪽으로 가르고 있구나, 싶어서 동시에 38선으로 나뉜 한반도도 이미 오래전에 많은 것들이 나뉘어 버려서 다시 하나가 되는 길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상념에 젖어 바람에 얼굴을 내맡기고 열심히 달려가는 자동차 안에서 별안간 눈에 불꽃이 튀었다. 아라라트산(Ararat Mt.)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 산에 가고 싶어요!”
“하지만, 아라라트산에는 못 가. 입산하려면 일주일도 전에 미리 신청해야 해. 그리고 등반도 힘들어서 네가 신은 샌들로는 안 돼.”
해발 5000미터가 넘어 꼭대기는 만년설로 덮힌 아라라트산은 그림처럼 동그란 구름 고리를 머리에 끼우고 있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계획이 없는 여행은 더 큰 재미와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가끔은 사소한 실망감을 주기도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멀리서 바라보는 모습만으로도 아름답고 신비로워 그것으로 대신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승애, 그럼 아라라트산 대신에 노아의 방주에 가볼래? 거긴 산비탈이라서 입산허가 없이도 들어갈 수 있어.”
성경에는 특별한 관심도 없으면서도, 아라라트산의 초입이라도 가볼 수 있다는 생각에 흔쾌히 가겠다고 나섰다. 수풀로 가려져 잘 보이지도 않는데도 무스타파 Mustafa는 여러 번 와봤던 듯 수풀을 잘도 해치고 나아갔다. 그곳에 비밀스럽게 배 형태를 띤 흙 무더기가 숨어있었다. 여전히 진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지만 선명하게 남아 있는 100미터가 넘는 방주의 흔적은 분명 사람이 아닌, 이 우주를 지배하는 어떤 다른 힘이 존재함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뜻밖의 드라이브로 양파의 속살을 꺼내듯 도우베야짓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메멧 Memet 아저씨가 그 날 마지막으로 데려간 곳은 이삭 파샤 Isak Paşa 궁전이었다. 이삭 파샤 Isak Paşa 궁전은 워낙 유명한 데다 카이로에서 만났던 여행자에게서 사진을 본 적이 있어서 익숙했다. 그러나 직접 가서 본 아름다움은 사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려 100년에 걸쳐 지어진 이 궁전은 긴 세월 속에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지만, 초현실적인 풍경의 언덕 위에 애초부터 자연과 함께 했던 것처럼 자리 잡고 있어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감동을 주었다. 이삭 파샤 Isak Paşa 궁전을 보기 위하여 일부러 도우베야짓을 찾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메멧 Memet 아저씨가 여기에 데려온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늘 이삭 파샤 Isak Paşa 궁전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어. 너도 가면 분명 좋아할 거야.”
그렇게 아저씨의 장담 속에 출발한 길이었기에, 이 아름다운 곳에서 있을 재미있는 일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궁전 입장 시간이 끝날 무렵, 서서히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관광객이 아닌 내가 도우베야짓 시내 길에서 마주쳤던, 이 곳에서 살아가는 바로 그들이었다. 알고 보니 잔치를 겸한 마을 회의가 이삭 파샤 Isak Paşa에서 열리는 날이었던 것이었다. 몽롱한 달밤의 기운에 더욱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이 가지 않는 풍경이 내려다 보이는 오래된 유적에서의 마을 회의라니 이렇게 낭만적일 수가. 그 낭만적인 모임에서 나는 메멧 Memet 아저씨의 초대로 임시 마을 주민이 되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어 영광일 따름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회의가 끝나고, 한데 어우러져 본격적인 잔치가 시작되었다. 나는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도미노 게임을 하며 환호성을 지르다가 문득 진짜 도우베야짓 사람이 된 듯한 착각을 느꼈다. 불현듯 메멧 Memet 아저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때?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니?”
“메멧 Memet 아저씨, 덕분에 너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거봐, 내가 너도 좋아할 거라고 했잖아.”
또 너털웃음을 짓는 아저씨에게 미안한 마음도 불쑥 올라왔다.
“처음에 만났을 때 아저씨를 오해해서 죄송해요. 혼자 여행 다니면 호객꾼들에게 시달리는 경우가 많아서 나도 모르게 사람을 경계할 때가 있어요.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괜찮아. 그건 나도 이해해.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언뜻 보면 무뚝뚝한 것 같지만 친해지면 굉장히 정 많고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라는 걸 알아. 그래서 나는 너도 좋은 사람인 걸 알았지.”
“아저씨를 포함해서 터키 사람들도 정 많고 친절하고 좋아요!”
그때, 잔치의 마지막을 알려왔다. 세계 어디든지, 어떤 모임이든지, 마지막은 화려하다. 다 같이 일어나 춤추기 시작했다. 쿠르드족의 전통 춤이라는데 여러 명이 줄지어 서서 발을 움직이는 춤으로 어렵지 않아서 나도 금방 따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땀이 나도록 어깨동무를 하고 발을 굴렀다. 음악이 흥겨웠는지 기분에 취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덩실덩실 절로 춤이 춰지던 그날 밤을 떠올리면 아직도어깨를 들썩거리게 된다.
다음날 메멧 Memet 아저씨의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아저씨 집은 쿠르드족의 가족답게 대가족을 이루고 있었다. 아주머니와 딸 둘, 아들 무스타파 Mustafa에 손주들까지. 바깥활동을 하는 아저씨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 하고도 영어가 통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나를 반가운 손님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가족들 모두 둘러앉아 아주머니가 정성껏 차려주는 점심을 먹었다. 의사소통이 잘못되어 배부른데도 자꾸만 음식을 더 가져다주는 바람에 곤란했던 헤프닝도 있었다. 마당에 나가 함께 텃밭에 심어 놓은 채소도 따고, 나무 그늘 아래에 누워 장난도 치고, 손주들과 뛰어놀다 보니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승애, 네가 도우베야짓에 며칠 더 머물지 모르겠지만, 괜찮다면 우리 집에 와서 지내는 게 어때? 우리는이미 널 가족처럼, 친구처럼 여기고 있고 굳이 숙박비를 낭비하지 않아도 되잖아.”
우연이 인연이 되어 결국 나는 메멧 Memet 아저씨의 집에 머물게 되었고, 진짜 가족이 된 것처럼 여행 중 가장 행복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아저씨의 딸들도 집 안에서는 히잡을 벗고 지냈는데 그런 그녀들의 머리를 땋아주고 있을 때였다.
“승애, 네 긴 머리가 참 예쁘구나. 쿠르드족 여자들도 머리를 길게 기르지. 너도 계속 긴 머리를 간직하렴.”
내가 진짜 쿠르드족 가족이 되기를 바랐던 걸까. 우리를 바라보던 아저씨가 말했다. 나는 미소로 답했다. 마음이 괜스레 두근거리고 따뜻해졌다. 터키 변방의 조그만 도시에서 잃어버리고서도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가족을 찾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지냈을 때였다. 여행을 떠났을 당시 나는 영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던 중이었는데, 영국에 맡겨두고 온 내 짐에 문제가 생겼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이스탄불로 돌아가서 유럽으로 넘어가야 했다. 내가 일부러 계획하지 않아도 이별의 순간은 저절로 다가온다. 내 말을 전해 들은 메멧 Memet 아저씨는 나보다도 걱정이 태산이었다. 동쪽 끝 도우베야짓에서 이스탄불까지는 버스로 무려 24시간이 가까이 걸리는 거리였다. 혼자 그 긴 여정을 가겠다니 염려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아저씨는 바로 다음 날 출발할 수 있는 버스표를 구해다 주었고, 이별해야 할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 메멧 Memet 아저씨는 정작 떠날 사람인 나보다도 바빴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긴 시간 동안 멀미 나지 않고 다리를 편하게 펼 수 있는 자리로 나를 앉혀 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운전기사를 붙들고 나는 터키 말을 못 하니 중간에 식사를 할 때마다 밥 제대로 먹을 수 있게 옆에서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잠깐 기다리라더니 잠시 사라졌다가 또 헐레벌떡 뛰어왔다.
“승애, 이건 간식 좀 쌌으니까 버스에서 배고플 때 먹어.”
아저씨는 나에게 봉지 한 가득 먹을거리를 안겨 주었다. 그리고는 손에는 쪽지 한 장을 쥐어 주었다. ‘우메르 Ömer’라는 이름과 연락처가 적힌 쪽지였다.
“이스탄불에 내 큰 아들이 살아. 이름은 우메르 Ömer야. 네가 이스탄불에 도착하면 우메르 Ömer가 터미널에 나와 있을 거야. 우메르 Ömer가 지내고 있는 집에 가서 머물면 될 거야. 내가 이야기해 두었으니 무엇이든 필요하면 이 녀석한테 부탁하면 돼. 너와 동갑이니까 편하게 부탁해도 돼.”
어떤 말도 필요치 않았다. 아저씨와 내가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은 꼭 이산가족 상봉 후 다시 남북으로 헤어져야 하는 가족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도우베야짓에 머무는 동안에 아저씨가 나에게 베풀어 준 것만 해도 당장 보답할 길이 없어 감사하고 미안한데, 떠나가는 날 위해서까지 이렇게 애쓰는 아저씨가 진짜 우리 아빠 같아서 눈물이 봇물 터지듯 터져버린 것이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를 친구라고 여겨주었던 사람, 떠날 때는 그 사람의 가족이 되어 떠나게 되었다. 생각보다 너무 짧았던 우리 인연이 다하지 않았기를 바라며 아저씨가 쥐어준 쪽지를 꼭 쥐고 버스에 올랐다. 겨우 창문 밖을 향해 인사를 하고 슬슬 도우베야짓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 아저씨가 준 간식 더미를 안고 한참을 울었다.
이스탄불까지 오는 24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너무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혀 긴 시간인 줄도 모르고 지나간 것이었다. 아저씨가 말했던 것처럼 우메르 Ömer는 이스탄불 터미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저씨와 전혀 닮지 않아 나는 몰라봤는데 우메르 Ömer는 단번에 나를 알아보았다. 버스에 탄 외국인이 나뿐이었기 때문이겠지만.
우메르 Ömer를 따라간 곳은 메멧 Memet 아저씨의 동생, 즉 우메르 Ömer의 작은 아버지 집이었다. 우메르 Ömer는 돈을 벌기 위해 이스탄불에 있는 작은 아버지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곳에서 메멧 Memet 아저씨와 똑같이 닮은 동생을 만나게 되었지만, 이미 대도시 사람이 되어서일까. 메멧 Memet 아저씨의 동생은 아저씨와는 조금은 다른 느낌이었다. 나를 집에 머물게 해 주었고, 특별히 나에게 불친절하지는 않았지만 메멧 Memet 아저씨에게서 느껴졌던 따뜻함은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나에게 터키 아빠는 한 명이면 충분했으니까.
우메르 Ömer와 함께 기차역에 가서 일단 그리스로 가는 기차표를 샀다. 이제 터키에서 남은 반나절. 메멧 Memet 아저씨에게 전하고픈 선물을 사고 싶었다. 바자르를 몇 바퀴를 돌다가 우메르 Ömer에게 물어서 아저씨가 좋아하는 색으로 찻잔세트를 샀다. 아저씨를 포함한 가족 모두를 위한 선물이었다. 마침 우메르 Ömer가 주말에 집에 간다고 하니 빨리 전해줄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도우베야짓 가족이 차를 마실 때마다 나를 떠올려 주기를 바라며 곱게 포장했다. 그리고는 바자르를 떠나려는데 눈에 띄는 한 가지가 있었다. 도미노였다. 샨리우르파에서 처음 게임하는 방법을 배우긴 했지만, 도우베야짓 이삭 파샤 궁전에서의 잔칫날의 추억이 있기에 오래 기억하고 싶어 만지작거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우메르 Ömer가 선뜻 나에게 그것을 선물해 주었다.
“우메르 Ömer, 너무 고마워. 메멧 Memet아저씨와 너를 포함해서 너희 가족들에게 너무 많은 사랑을 받고 가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 정말 이번 터키 여행은, 그리고 도우베야짓은 잊을 수 없을 거야.”
“네가 기억해주면 그걸로 됐어. 터키와 도우베야짓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한 사람 더 늘어난 거잖아. 그거면 돼.”
메멧 Memet 아저씨의 따뜻한 마음은 우메르Ömer에게서도 그대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가 보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터키에서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가고 행복했던 기억들은 이미 한참 전에 흘러간 추억같이 느껴졌다. 그시간, 내가 있었던 그곳이 현실이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터키를 떠나도 당분간은 현실이 아닌 것처럼 지내고 싶었다. 나는 영화 혹은 소설 속에서 아주 따뜻하고 선한 천사들과 함께 웃으며 노닐던 날들이 있었노라고 되뇌면서.
그렇게 오래전 소설처럼 ‘오리엔탈 특급열차’를 타고 나는 이스탄불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