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사랑스러움에 대하여
2007년 시작해서 12년 간 방영된 미국 시트콤, 빅뱅이론. 2019년 시즌 12를 끝으로 완결이 났다.
아무리 좋아하는 드라마라고 해도 다시 보는 것은 싫어하는 내가, 빅뱅이론은 서너 번 봤을 정도로 그에 대한 애정은 아주 크다. (사실 요즘도 시즌 1부터 정주행하고 있다.)
빅뱅이론의 주요 인물로는 쉘든, 레너드, 하워드, 라지를 꼽을 수 있다. 그들은 칼텍(캘리포니아 공과 대학)에서 일하는 일명 엘리트 혹은 너드 nerd다. 그리고 쉘든, 레너드네 옆집에는 페니가 산다. 페니는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배우를 꿈꾸는 '금발 미녀'다.
빅뱅이론은 이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빅뱅이론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뚜렷한데, 그중에서도 쉘든은 독보적이다. 천재라고 불릴 만큼 지능은 뛰어나지만 사회성은 그의 지능에 반비례하는 듯 거의 제로에 가깝다.
쉘든은 미친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자기중심적이며, 공감력도 떨어진다. 모든 것을 본인을 중심으로 결정하고, 상대방의 기분 변화도 눈치채지 못한다. 누가 봐도 (그것도 본인 때문에) 상대방 기분이 상했어도, 그 당사자에게 "너 지금 슬퍼? 화났어? 왜?"라고 물을 정도다.
사실 처음에는 쉘든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찜한) 자리에는 누구도 앉을 수 없고, 집의 온도 설정도 바꿀 수 없으며, 휘파람도 불지 못하게 하는 룸메이트라니, 누가 좋아할 수 있을까.
(알기 싫어도) 상대방의 기분 변화를 빨리 눈치채는 편이고 그래서 상대방을 섬세하게 살피게 되는 나로서, 쉘든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 쉘든은 그야말로 미친 사람 같았고, 초기에 빅뱅이론을 계속 봤던 이유는 단순히 '웃겨서'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쉘든의 매력에 빠져버린 나를 보게 되었다. 그저 미친 사람 같았던 그는 알면 알수록 묘한 매력이 있었고, 그것을 알아챈 순간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갈등을 싫어한다. 웬만하면 좋게 넘어갔으면 좋겠고, 그 과정에서 큰 소리도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남들에게 싫은 소리도 하기 싫어하고, 갈등 상황이 생길 것 같으면 피하는 편이다. 이런 성향은 친밀한 관계에서도 나타나는데, 그게 문제가 될 때도 있어서 내가 왜 그러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일단 에너지 레벨이 낮은 편인 나는, 갈등 상황 때문에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 자체가 너무 피곤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견고하게 잘 쌓아둔 관계가 갈등 때문에 무너질까 봐 두렵다. 그래서 웬만하면 싫은 소리를 하지 않고 좋게 넘어가서, 애초에 갈등 상황(관계가 무너질 수 있는 여지)을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
이런 나와 다르게, 빅뱅이론에서는 온갖 인물들이 본인의 주장과 감정을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래서 의견이 맞지 않거나 상대방 때문에 기분이 상했을 때 소리 지르면서 싸우기도 한다. 여기서 가장 놀라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계가 깨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아침에 소리 지르면서 싸우고, 저녁엔 테이블에 둘러앉아 함께 식사를 한다.
생각해봤다. 반복해서 보는 것은 질색팔색 하는 내가, 빅뱅이론은 왜 계속 보는지.
사실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누군가 실망할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내 주장이나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지 않고 남들에게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빅뱅이론에서는 아무도 본인의 개성을 감추거나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본인의 개성을 죽이지 않고 관계를 꾸려나간다.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본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친구들이 있기 때문 아닐까.
쉘든과 레너드네 거실에서 옹기종기 앉아 저녁식사를 먹는 장면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동물과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된 이후로 불편한 장면도 심심치 않게 보이지만, 이 글과는 다른 주제이므로 잠시 놓아두려고 한다.)
일을 끝마치고 나서 저녁식사를 함께 할 친구들이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일까. 소리 지르고 싸워도 이 관계가 깨지지 않을 거란 믿음은 얼마나 큰 안정감을 줄까. 무엇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단순히 웃기고 재밌어서 좋아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빅뱅이론에는 내가 꿈꾸는 그것들이 모두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