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뛴다. 이유 없이 뛴다.
뜀박질 자체가 하나의 놀이다.
50미터든, 100미터든 있는 힘껏 뛰고 즐거워한다.
즐거운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부럽다. 관절이 튼튼한 덕이다. 뛸 수 있을 때 마음껏 뛰어라.'
나도 어릴 적 종종 이유 없이 뛰었다.
얼굴과 몸을 스치는 바람을 가르며 뛰다 보면 나만의 세상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 순간 주위는 나를 위한 배경일뿐이다.
어느 정도 거리까지 힘들지 않게 뛸 수 있을지,
얼마나 빨리 뛸 수 있는지 스스로 테스트도 해본다.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나보다 꽤 멀리 앞선 어른이 눈에 띈다.
목표지점을 찾았다! 저 어른을 제치면 내가 이긴 것.
상대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내 경쟁상대가 된다.
하나, 둘, 셋!! 힘껏 뛴다. 제쳤다. 당연한 승리.
지금은 느낄 수 없는 감정 중 하나다.
어른이 된 후에도 뛴다. 버스나 지하철을 놓칠 수 없어 뛴다. 신호등 불이 바뀌기 전에 뛴다.
뒤쳐지고 싶지 않아 뛴다. 걷고 싶지만 뛰어야 한다.
오롯이 뛰고 싶어 뛸 때란 없다. 목적은 늘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
나를(내 관절을) 희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잘 뛰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목적 달성여부가 가장 중요하다.
기껏 힘들게 뛰었는데 버스나 지하철을 눈앞에서 놓치면 억울하다. 숨이 차고 다리만 아프다.
맥이 빠지니 더 힘들 게 느껴진다.
‘괜히 뛰었다’
어른이 된 나의 뜀박질은 승리도 패배도 없다.
성공과 실패만 있을 뿐이다.
어느 날 길을 걷는데 내 옆에 나란히 걷던 어린아이가 있었다. 나는 평소 걸음 속도가 경보 수준으로 꽤 빠른 편이다. 아이는 자연히 뒤처진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데 그 아이가 마구 뛰더니 나를 앞서 걷는다.
처음엔 바빠서 뛰나 보다 하고 계속 걸었다. 조금 걷다 보니 그 아이가 또 뒤처졌는데 이내 곧 나를 앞선다.
그 순간 '피식'하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걸음 속도를 조금 늦췄다. 그 아이가 계속 내 앞을 걸을 수 있도록.
아마 그 자체가 놀이였을 거다. 혼자만의 경주.
왠지 지는 것 같아 그랬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나를 이긴다고 딱히 얻는 건 없다.
그 아이가 귀여우면서도 당시 비슷한 경험을 했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문득 '어른이 된 후 딱히 목적 없이 뛴 적이 있었나?' 곰곰이 떠올리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물론 요즘 달리기가 유행이라 뛰는 자체를 즐기는 사람도 많겠지만, 일단 나는 아니다.
10KM 마라톤 대회를 참가해 본 적 있지만 그때도 목적은 있었다.
'내가 완주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른이 된 이후 내 뜀박질은 뒤쳐지기 싫은 발버둥이 됐다.
남들과 속도를 맞추기 위한 삶을 위한 발버둥. 재미여부를 따지는 건 다소 사치스럽다.
열심히 뛰었는데 실패를 하면 다시 뛸 준비를 할 때까지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가뜩이나 떨어진 회복탄력성은 내 마음과 상관없이 더디기만 하다.
가끔 성공여부와 상관없이 순수하게 뛰고 싶지만 이젠 그럴 여유가 없다.
목적과 방향을 잡으면 일단 뛰어야 한다. 뛸 이유가 없는 데 뛰는 건 이제 낭비다.
가끔 목적 없이 순수하게 즐기던 그때가 마구, 엄청, 무지 그립다.
오롯이 좋아서 즐기던, 목적이나 결과 상관없이 몰두할 수 있던 그 시절.
돌아갈 수 없어서 더 빛나는 그 시절이 가끔은 사무치게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