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왔다. 혼자 소풍 가는 날이다. 이제 전시를 보는 날은 내겐 소풍이다. 전시를 제대로 봐야 한다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바라보니, 그저 새로운 전시장을 찾아가서 낯선 그림을 보는 행위 자체로 즐겁다.
'오늘 전시장은 어떤 분위기일까? 근처 커피숍에서 책을 보고 올까? 오늘 보는 전시는 어떤 느낌이 들까?'
들뜨는 마음은 어릴 적 소풍 가기 전날 같다. 특히 오늘은 하루종일 혼자 여유롭게 보낼 수 있는 날이다. 일부러 일정을 오늘로 맞췄다. 전시를 보고 집에서 푹 쉴 예정이다. '전시 보고 뭐 하지?' 상상까지 더해져 이미 행복지수가 높다. 늘 그렇듯 한 가지 불안감만 빼면. 전시장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늘 난제다.
#전시장을 찾는 두려움, 새로운 장소에 대한 호기심
브라이언 레 전시장은 museum 209.
전시를 본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매번 새로운 전시장이다.
호기심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이 전시장 분위기는 어떨까? 하는 호기심.
공간에 대한 호기심은 아무래도 처음 전시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계기가 전시장을 놀러 가는 행위 자체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즉, 공간에 대한 즐거움이 먼저였다. 이후 전시장 분위기와 작품 분위기가 연결된다는 사실을 느낀 후부터 관심이 좀 더 생겼다.
# 길치, 오늘도 헤매다
뮤지엄 209위 치를 검색하면,
서울 송파구 잠실로 209 KT송파타워 3층/
신천동 29-1 /2호선, 8호선 잠실역 10번 출구에서 333m
이 정도면 한 번에 찾을 수 있다며 길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자신감은 'KT송파타워'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날도 나는 어김없이 헤맸다.
KT송파타워는 금방 찾았는데 전시장이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안내 직원분께 물어보니, 이 건물이 아니란다. 네?
"밖으로 나가서 스타벅스를 끼고돌면 입구가 있어요."
스타벅스를 끼고 입구를 두리번거리는데 안 보인다. KT송파타워와 다른 건물 사이에 구름다리처럼 연결돼 있었고 밑에 주차장이 보였다. 주차요원아저씨께 '여기가 KT송파타워'냐고 물었더니 '맞다'며 '옆 건물은 호텔'이라고 한다. '호텔 건물에 전시장이 있겠어?' 하며 다시 인포에 물어봤다. 전시장은 KT송파타워 호텔건물 3층이었다. 전시장 위치 설명이 너무 불친절하다!! 고 불만을 터트리고 집에 와서 확인하니, 전시장 주소 밑에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주)디커뮤니케이션이 운영하는 전시장 MUSEUM 209는 잠실 소피텔 앰배서더 호텔 3층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은 내 잘못... (길치는 주의력도 산만하다)그렇게 겨우전시장에 들어섰다.
전시장 조명은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게 적당했다. 이 또한 그림을 부각하기 위한 요소 중 하나겠지?
# 작가 브라이언 레
홍보 포스터를 보고 예상했지만, 일러스트 전시였다. 그림책 작가가 꿈인 나한테 일러스트 그림은 몰입도가 가장 높다. 직원분이 "곧 도슨트가 진행되는데 원하시면 이쪽으로 오세요." 했는데 오늘도 거절했다.
도슨트나 오디오 가이드는 이해를 전혀 하지 못하는 난해한 그림이 아닌 이상 듣지 않기로 했다.
다소 고집스러운 신념이다.
서문엔 이렇게 써져 있다.
"누구나 하나쯤은 털어놓고 싶은 사랑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누군가는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고, 누군가는 영화를 만들거나 선물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브라이언 레는 그림을 그린다."
브라이언레는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다. 특정 키워드에만 초점을 맞춰서 작품을 만드는 것도 꽤 즐거운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라이언 레 작가의 설명을 보면,
"브라이언 레는 십수 년 간 뉴욕 타임스 주간 칼럼 "Modern Love"의 고정 아티스트로 활동해 왔다.
(...) 다양하고 복잡한 사랑의 형태를 감정이 충만한 이미지
(...) 브라이언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랑이라는 주제에 몰두했고 650점 이상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 일러스트, 전시, 애니메이션, 설치작품, 벽화뿐 아니라 그가 저술한 책까지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거의 모든 작품들은 모던 러브에 뿌리를 둔 조용하고 사색적인 시각적 목소리에 의존하고 있다.
(...) 이번 전시는 브라이언이 모던러브 칼럼을 위해 제작한 650점의 일러스트 중 엄선한 100여 점의 작품들이 포함된다. 또한 그가 이번 전시를 위해 지난 1년간 특별히 제작한 드로잉원화, 글, 회화, 애니메이션 조각, 벽화, 스케치 등 사랑을 주제로 한 수백 점의 작품들을 선보인다."라고 설명한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작품 여행을 떠나볼까? 절로 웃음이 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다 보니 기댄 포즈가 많았다. 전시 보는 내내 그림책을 보는 느낌이라 즐거웠다. 그림 설명을 열심히 읽고, 때론 스토리를 상상했다.
사진을 먼저 찍고 그림 앞에 서서 찬찬히 감상했다.
그림동화 속 그림 같기도, 낙서 같기도 한 그의 그림이 눈에 띄었다.
그가 직접 사용한 연필. 천재는 없다. 노력하는 자만 존재한다. 난 이렇게 노력할 수 있을까?
엉뚱하게 그가 쓰는 연필이 사고 싶어졌다. 왠지 그가 쓰는 연필로 선을 그리면 나도 그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마치 마법연필처럼.
브라이언 레는 대부분 그림이 디지털이 아닌 직접 그렸는데 이유가 있다. 어느 날 집에 도둑이 들어 15년 동안 그린 디지털 그림을 모두 도난당했다. 이후 집착적으로 손으로 직접 그린다고 했다. 아니, 도대체 왜! 남의 분신 같은 작품을 훔치는 건지.
# 낙서? 아니, 작품
전시를 보는 내내 투박하고 거친 선의 매력에 빠졌다. 낙서 같은 그림. 이 정도면 나도 그릴 수 있겠다 생각이 들지만, 이내 '내가 낙서를 한다고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자 더 이상 낙서로 보이지 않았다.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해외 작가들 전시를 보다 보면 유독 연습장에 낙서한 듯한 그림도 함께 전시한다. 우리가 보기엔 낙서 혹은 미완성된 그림이지만, 분명 작품이다.
<취미는 전시회관람> 책에서 저자는 유학시절,
우리나라 교생실습과 비슷한 수업을 진행하면서 학생들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 놀란 경험담을 서술한다.
작품이 완성되면 작품 발표 시간을 갖는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질문한다.
"네 그림은 예술이니?"
"아니요"라고 하는 아이도 있고, "당연하죠"라고 말하는 학생도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그림이 작품인 이유, 그렇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작품을 교실 뒤에 전시해도 될까?"라는 질문에도 "전시를 해달라는 아이, 이번작품은 전시를 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며 거절하는 아이로 나뉘었다.
아이들에게 예술은 뭔가 거창하거나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완성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티스트처럼 잘 그리지 않았어도, 자신의 작품이 예술적 가치를 가졌다고 생각하면 예술작품이라 불렀다."
미완성된 그림, 낙서를 보는 내 생각도 조금 달라졌다.
이렇게 나는 또 조금 성장한다. 전시관람 취미는 나의 성장을 돕는 유쾌하고 좋은 친구다.
브라이언레 전시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고, 작품도 모두 따라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종이를 벗어나 모든 공간이 그의 스케치북이었다.
(지난번에 본 전시 <그림 깨우기: 크리스토프 루크헤베를레>가 떠올랐다. 그도 공간적 제약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