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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늘 낙서

짐의 무게

오늘, 낙서

by 감정 PD 푸른뮤즈

어떤 세상이 있어.

그곳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큰 문이 있었어.

그 문은 조금 특별해.

모양은 사람인데,

사람크기보다 조금 더 큰 구멍으로 뚫려있어.

그 구멍을 통과해서 지나가야 하지.

문을 지키는 문지기도 있었어.


첫 번째 남자가 큰 짐을 어깨에 둘러맨 채 낑낑대며

문을 통과하려 해.

그런데 짐이 너무 커서 구멍을 통과할 수가 없었어.

문지기가 말했어.


"이 문은 이 모양과 크기에 맞아야 나갈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짐을 모두 메고는 이 문을 나갈 수 없으니,

짐을 내려놓고 지나가세요.

그 짐은 우리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당신은 도와줄 수 없어요.

이 짐 없이 문을 지나갈 수 없다면 나는 차라리 돌아가겠습니다."


첫 번째 남자는 돌아서 자신의 길로 떠났어.


두 번째 남자가 문 앞에 섰어.

짐이 많진 않지만 모양과 달라서 나갈 수 없었어.


문지기가 말했어.


"이 문은 이 모양과 크기에 맞아야 나갈 수 있습니다.

당신의 짐을 모두 메고는 이 문을 나갈 수 없으니, 짐을 내려놓고 지나가세요.

그 짐은 우리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


"그게 진짜입니까?"


두 번째 남자는 신난다는 듯 짐을 전부 던지고

문을 지나갔어.

문지기는 왠지 뿌듯했어.


세 번째 남자가 문 앞에 섰어.

이 남자도 짐이 제법 많았어.

문지기는 말했어.


"이 문은 이 모양과 크기에 맞아야 나갈 수 있습니다.

당신의 짐을 모두 메고는 이 문을 나갈 수 없으니, 짐을 내려놓고 지나가세요.

그 짐은 우리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


세 번째 남자는 말없이 고민에 빠졌어.

주섬주섬 짐을 내려놓기 시작하더니 짐 하나를

어깨에 메었어.

짐이 적진 않지만 문을 통과할 수는 있는 정도 크기였지.


문지기가 궁금해서 물어봤어.

"왜 짐을 모두 내려놓지 않는 겁니까?"


세 번째 남자가 대답해.


"당신들이 내 짐을 덜어준다니 참 고맙습니다.

덕분에 짐을 조금 덜었어요.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건 오롯이 내가 짊어져야 하는 짐입니다.

힘들지만, 내가 또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기도 하죠.

내 몫은 내가 감당하겠습니다. "


세 번째 남자가 살짝 미소 지으며 인사하고 떠났어.

문지기는 첫 번째 남자처럼 힘든 표정도, 두 번째 남자처럼 신난 표정도 아닌 그 미소를 꽤 오래 마음에 담았어.


삶은 어깨에 짐을 하나씩 하나씩 얹는 과정이었다.

결혼을 하니 전보다 더 무겁고 많은 짐이 있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를 얽매는 족쇄 같을 때도 있어서 도망치고 싶었다.

이 모든 짐을 던져버리면 홀가분할 것 같았다.

모든 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짐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던 어느 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될 대로 돼라'하는 심정으로

어깨의 짐을 잠시 내려놨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제야 나만큼 힘든 누군가 보였다.


'나만 힘든 게 아닌데'



뒤늦게 알았다. 내가 느낀 짐의 무게가 허상이었음을.


그 무게를 혼자 감당하고 있다는 건 착각이었다.

함께 짊어진 짐이었다.

그땐 내 짐이 너무 무거워 차마 상대의 짐까지 볼 수 없었다.

스스로 시야를 차단했다. 아니,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비단 모든 짐을 던져버리고 싶은 건 나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온전한 내 몫의 짐이 있었다.

누구의 잘못도, 책임도 없는 순수한 내 몫.


착각을 덜어내고 나니,

짐은 짊어질 수 있을 정도 무게로 바뀌어 있었다.


여전히 짐은 많다. 다만 달라진 건 그 무게를 버겁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쓸모없는 족쇄 같던 짐은 때론 내가 열심히 사는 원동력이었다. 그게 나를 위해서든, 그 누군가를 위해서든.


적당한 무게의 짐을 적당히 나누면서

그렇게 내 인생의 모양에 맞는 문을 찾아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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