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낙서
매일 다니는 길목에 늘 쪼그려 앉아있는 '누군가'가 있다. 온통 회색으로 덮인 '누군가'는 정확한 형체를 알 수 없었다. 나는 같은 자리에 있는 '누군가'를 힐끔 보고 지나간다. 그냥 무시해도 되는데 굉장히 거슬린다.
하루종일 이리저리 치인 날.
만신창이가 된 채 터덜터덜 걸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와 미련은 내 삶에 기본값이다.
생각이 꼬일 대로 꼬여서 가뜩이나 머리가 아픈데,
'누군가'를 발견했다.
화를 낼 힘도 없다. 오늘따라 외면이 힘들다.
슬쩍 손을 내밀었더니 순순히 따라온다.
집에 들어와 따뜻한 물로 씻게 하고, 밥도 먹이고
포근한 옷을 주고 따뜻한 이불을 덮어 재웠다.
그렇게 며칠을 함께 지냈다.
의외로 이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분명 나는 '누군가'의 존재를 불편해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함께 있으니 오히려 현실을 잠깐 잊을 수 있었다. 왠지 계속 몸이 좋지 않았지만 무시했다.
어느 날, '누군가'가 말했다.
"이제 그만 나를 놓아주세요."
당황했다. 놓아달라니? 이제 와서? 아니, 그것보다 내가 언제 붙잡았어?
붙잡고 안 놔준 것처럼 얘기하면 곤란하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 가라앉혔다.
그저 불쌍해 보여 돌봐준 것밖에 없는데 이제 와서 내 탓을 하는 건가?
웃기는 군.
열받은 마음에 한 마디를 꽥 내질렀다.
"따라오지를 말던가!"
가만히 듣고 있던 '누군가'가 답했다.
"나는 당신을 거스를 수 없어요. 이제 그만 나와 끊어주세요."
"네가 뭔데?"
동정하던 대상에게 도리어 동정받는 기분은 별로였다.
자기 멸시. 나는 넘치는 화를 풀어야 했다.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누군가'가 말했다.
"나는 당신의 과거입니다."
한동안 과거를 끌어안고 살았다. 아니, 꽤 오래.
현재 삶의 불만족의 원인이 모두 과거에서 시작된 것 같았다.
과거 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만, 내가 놓지 못한 과거는 모두 나를 망가뜨리는 것 투성이었다.
후회, 미련, 자책과 자괴감에 몸부림쳤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과거를 벗어나지 못한 건 한 가지 풀지 못한 의문 때문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무리 꼬인 실타래라도 풀 수 있다면 풀고 싶었다.
딱 한 번만 제대로 찾아 해결하면 앞으로 내 삶은 탄탄대로일 것 같았다. 원인을 제거하지 못하면 미래도 없다고 생각했다.
후회와 자책만 있는 건 아니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고 두 손 불끈 쥐었다.
미래를 위한 준비이자 필요한 과정이라 여겼다.
내 나름대로 삶의 의지였고 의욕의 표출이었다.
어느 날.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과거만 보느라 현재가 희생되고 있다는 걸 몰랐다.
미숙해서 실패만 했던 과거로도 모자라 그 시간을 또 후회로 보내는 몇 년을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결국 나는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를 과거에만 매몰된 채 흘려보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재작년 겨울쯤으로 기억한다.
눈이 햇살에 비쳐 유난히 빛나던 날.
입김은 나지만 춥지 않은 날.
한적함에 흠뻑 빠진 순간.
미끄러질까 바닥만 보며 걷다가
문득 잠시 서서 고개를 들었다.
쭉 뻗은 산책길을 걸으며 머릿속에 두 글자를 새겼다.
오늘
이 날 이후, 나는 과거를 버리고 현재를 살기로 마음먹었다. 어제까지가 과거이니 털어버리고 오늘을 살기로했다. 아니, 오늘만 살기로 했다.
과거는 더 이상 어떤 힘도 없다.
그저 지나간 시간 혹은 추억일 뿐이다.
꼬인 실타래는 푸는 게 아니라 과감히 끊어야 했다.
삶은 유한하다. 언제까지 끌어안고 품을 순 없다.
가장 두려운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죽는 순간에 생각날 후회"라고 답할 거다.
'그럴걸. 그랬으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어지럽다.
다시 질문한다.
'내일 죽는다면 나는 무엇을 후회할까'
후회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틀기 위해 '오늘' 다시 애를 쓴다. 지금 또 다른 과거가 될 테니까.
죽는 그 순간까지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