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데이트를 시작하다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는 창의력을 되찾기 위한 '비움과 채움'의 방법을 제시한다.
비움이 '모닝 페이지'라면, 채움은 '아티스트 데이트'다.
1. 모닝 페이지
잠에서 덜 깬 상태에서, 검열이 느슨한 뇌로 3 페이지를 쓴다.
무의식의 문장을 흘려보내는 일이다.
쓸 말이 없으면 “쓸 말이 없다”라고 적어도 좋다.
핵심은 ‘무조건 쓰는 것’.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을 비워내는 행위다. 쓰다 보면 내면의 먼지가 조금씩 쓸려 나간다.
이건 생각보다 쉽게 시작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펜을 잡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다르게 느껴졌다.
2. 아티스트 데이트
머릿속을 비워냈다면, 이제 아티스트 데이트로 채운다. 일주일에 한 번, 평소 하지 않던 일을 해보는 것이다. 문방구에서 평소 사지 않던 물건을 사거나, 서점에서 늘 가던 카테고리를 지나쳐 전혀 관심 없던 분야의 책을 살펴본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방문해도 좋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하루를 채우는 것도 방법이다. 창의성을 회복하기 위해, 뇌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 행위다. 쉽게 말해, 일주일에 한 번쯤 소소한 일탈을 통해 비운 공간에 새로운 경험을 채우는 것이다.
모닝 페이지는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었지만, 아티스트 데이트는 달랐다. '일주일에 한 번 어딘가에 가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니 왠지 막막했다. 문방구, 서점이 먼저 떠올랐다. 좋아하는 공간이지만 내키지 않았다. '어디를 가야 할까?'. 이번엔 낯선 공간이 필요했고, 불현듯 '예술의 전당'이 떠올랐다.
20대 때 몇 번 가본 기억이 전부지만 너무 낯설지도 않고, 익숙하지도 않은 공간이다.
나의 첫 아티스트 데이트 장소로는 적당해 보였다.
지나치게 새로운 공간은 부담스러웠다.
회원가입을 하고 전시 목록을 살펴보며, 오랜만에 생긴 설렘을 느꼈다. “그냥 한번 둘러볼까”가 “이건 꼭 보고 싶다”로 바뀌는 순간, 고요하던 마음속 어딘가가 깨어났다.
오랜만에 ‘기대감’이라는 감정이 돌아왔다. 새로운 감각이 켜지는 순간이었다. 이 급격한 변화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오랫동안 삶의 새로움은 없었다. 아니, 결핍조차 느끼지 못했다.
막상 스위치가 켜지니 눈앞에 새로운 세상에 감정이 동했는지도 모르겠다.
첫 전시를 정했다. <영국 현대미술의 거장: 마이클 크레이크 마틴>과 <앤서니 브라운의 원더랜드 뮤지엄>이었다. '재밌겠군!' 이 작은 이벤트는 왠지 모를 기대감을 주었다. 왠지 전시를 보고 나면 내 창의력 레벨이 마구 올라갈 것 같은 흥분상태였다.
예술의 전당은 리모델링이라도 한 건지, 마치 호텔 로비 같았다. 신기하다며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고 "너 20세기에 마지막으로 왔던 거 아니야?"라며 친구가 놀렸다. 하긴, 마지막으로 왔던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진짜 10년 간 이곳을 온 기억이 없었다. 말문이 막혔다. 세월이 흐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그동안 주위는 변했는데, 나만 멈춰 있었다. '아티스트데이트'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곳이 이렇게 변한 것도 모른 채 살아갔겠지. 역시 사람은 계기가 있어야 움직인다.
한때 가만히 있어도 변화가 찾아오는 시절이 있었다.
몸을 실으면 저절로 움직이는 무빙워크처럼.
내 의지 없이 끌려가는 기분에 종종 그 레일에서 내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제는 스스로 ‘선택’ 하지 않으면 변화는 없다.
그날, 나는 선택했고, 변화가 왔다.
오랜만에 스스로를 움직였다.
주변 풍경이 달라진 게 아니라 나의 시선이 바뀐 것임을 알았다.
전시 두 개를 연달아 보고 나온 길.
발꿈치부터 꾹꾹 누르며 걸었다.
감각이 깨어난 느낌이었다.
'설렘'이라 부를 수 있는 감정.
나의 첫 아티스트데이트는 성공적이었다.
전시 관람취미의 작은 시작점이 됐다.
이 날 이후 전시나 공연이 좋아졌다.
'이래서 문화생활을 하는 거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물꼬가 트이고 나니 마음이 동하고 설레고 들뜬다.
욕심이 생긴다.
볼 수 있는 건 다 보고 싶다.
솔직히 봐도 잘 모른다.
미술사에 관심은 있지만 지식은 전혀 없다.
예술은 어려운 것이라고 외면했다.
하지만 이젠 '그래서 뭐?'라는 생각이 든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즐기면 그만인 걸.
단지 기분이 좋아지면 그만인 걸.
삶의 변화는 생각보다 빠르게,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일어날 때가 있다.
나는 단순히 작품을 감상한 것이 아니었다.
이 경험은 내게 삶 속에서 자극을 찾고 그 안에서 의외성을 발견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익숙한 일상 속에서 늘 같은 경험을 반복하며 자신도 모르게 정체되곤 한다.
하지만 새로운 경험을 통해 삶의 다른 면모를 발견하고, 그 속에서 숨겨진 재미와 의미를 찾아갈 수 있다.
아티스트데이트는 결국 창의성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삶의 의외성을 발견하는 일상의 작은 도전이었다.
이런 사소한 일탈이 내 일상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확신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새로운 삶의 변화는 참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