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초보 개인주의자
20대 후반 어느 날,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깨달았다.
외로움에 익숙해진 지 꽤 오래되었다는 것을.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은 언제나 뻔했다.
“괜찮아, 다들 바쁘니까.” 하지만 그날따라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이 외로움은 그냥 감정일 뿐일까? 혹시 내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의 신호는 아닐까?'
흔히 외로움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외롭다는 말속에는 어딘가 부족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아서다.
그래서 외롭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애쓴다.
모임 초대를 거절하면 소외되는 것 같아 억지로 나가고, 마음에도 없는 자리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문득 찾아오는 공허함은 피할 수 없다.
유난히 춥던 어느 겨울날, 바쁜 도심 속에서 입김을 내뿜으며 걷다가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외로움을 단순히 피해야 할 감정으로만 여겼을 뿐,
그것이 내게 던지는 질문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외로움은 단순한 고립감이 아니라, 나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것은 내 마음이 진정으로 나 자신에게 집중해야 할 때임을 알려주는 중요한 알림이었다.
왜 외로움을 두려워할까? 진화 심리학적으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공동체에서 벗어나는 것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한다. 과거에는 무리에서 떨어지는 것이 곧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외로움은 다르다.
관계 속에서도, 끊임없이 연결된 사회 안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외로울 수 있다.
SNS 속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만 뒤처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외로움은 무조건 채워야 하는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작은 쉼표 같은 시간이다.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누구를 위한 시간을 살고 있지?”
놀랍게도 그 대답은 종종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고 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가족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친구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 과정에서 정작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외로움을 해결하려면 건강한 개인주의가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주의는 이기적으로 타인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소중히 여기고, 나만의 가치와 시간을 존중하는 태도를 뜻한다.
건강한 개인주의는 ‘타인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정과 필요를 우선하는 태도다.
가령, 억지로 모임에 참석하기보다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는 것.
타인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결정을 내리기보다, 내 감정과 필요를 우선하는 것.
혼자 있는 시간도 관계 속에서의 시간만큼이나 존중하는 것.
과거의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외롭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시간이 오히려 나를 위한 쉼표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이제 외로움을 느낄 때 '나'를 찾는다.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걸으며 풍경을 감상하기도 하고, 조용한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즐긴다.
전시회를 혼자 관람하며 온전히 작품과 마주하는 시간은 내게 더없이 소중하다.
나를 위한 요리를 하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스스로를 돌본다.
이 시간은 나 자신과 가장 친밀하게 연결되는 순간이다.
외로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 신기하게도 마음이 더 가벼워졌다.
누군가에게 외롭다고 말할 용기도 생겼다. 외로움은 더 이상 숨겨야 할 감정이 아니다.
내가 더 건강한 개인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징후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외로움은 극복해야 할 감정 아닌가요?”
이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외로움은 극복할 대상이 아니라,
나를 재발견하라는 초대장이다.
외로움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동시에 가장 솔직한 내면의 소리를 들을 기회를 준다.
그 속에서 나를 돌보고 나만의 의미를 찾을 때, 조금 더 단단해진다.
외로움은 삶에 꼭 필요한 감정이다.
건강한 개인주의는 그 외로움과 함께 나를 돌보는 것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