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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뮤즈 Dec 20. 2024

백지를 사랑할 수 있다고?

[브런치 입문러의 글쓰기 연습장]

필사를 하던 중 깜짝 놀라 타이핑을 멈췄다.


"글을 쓰려고 할 때, 내 앞에 놓인 백지를 사랑한다. 백지 앞에 있으면 어딘지 마음이 정갈해지고 순백의 태도가 된다. 백지를 마주할 때마다 다시 시작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조금 과장 하자면 그때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 같다. 나의 마음은 백지 앞에서 깨끗함과 투명함을 갖춘다. 그 앞에서는 매번 새로운 장소로 떠나는 여행자의 마음이 된다.

-책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중-


백지를 사랑할 수 있다고?

백지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머릿속에서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려면, 나를 놀라게 한 문장과 잠시 대화를 나눠볼 필요가 있다. 나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혹은 이 문장에 반박하기 위해.


글을 쓰기 위해 매일 백지 앞에 앉는다.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불안이 올라오기 전에 힐링 음악을 튼다. 바로 내 글을 쓰기 무서워 남의 글을 필사하며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인다. 두려움은 흙이 물 밑으로 가라앉듯 서서히 가라앉는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면 글감을 모아둔 소재창고를 뒤지기 시작한다.


이 루틴은 백지를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압박감을 피하고자 만든 것이다. 글감은 차고 넘친다. 오히려 너무 많아 정리가 안 된 어지러운 집처럼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자신 있게 담아둔 글감을 부드럽게 풀어낼 자신이 없다.


그 결과 나는 글 하나를 쓰다가 막히면 '이 산이 아닌가보다'하며 다른 글로 후다닥 도망친다. 어렵게 붙잡고 쓴 글을 도중에 미뤄두는 게 싫어서, 꾸역꾸역 완성하려다 후회한 날도 많다. 결국 미완성의 하루를 마무리하며 허무함을 느낀다.


백지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


작가는 백지 앞에서 매번 새로운 장소로 떠나는 여행자의 마음이 된다고 했다.


그 마음이란 새로운 글로 채우는 두근거림을 뜻하겠지

이 글은 어떤 기분, 무슨 감정을 줄까 하는 기대감이겠지?  


바위처럼 단단한 작가의 태도 앞에서 잠시 못난 마음이 올라온다.


'전문작가니까 가능한 거야. 시작도, 필력도, 글을 끌고 나가는 힘도, 표현력도 좋으니까 시작하는 게 쉽겠지.'


사실 알고 있다. 글을 오래 쓴 작가도, 솜씨가 좋은 유명 작가도 모두 글을 쓰는 순간을 힘들어한다는 걸. 다만 수없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글력을 단단히 만든 덕분이라는 걸. 그런 노력도 없이 그 수월함을 얻겠다는 건 놀부 심보라는 것을, 불행히도 잘 안다.


잠시 몹쓸 마음을 내려놓고 생각해 본다.


나는 왜 백지를 사랑하지 못한다고 단정 지을까?

글솜씨가 없어서? 아니면 글을 쓸 능력이 부족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백지를 보면 채워야 한다는 압박감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한 문장, 한 단어를 음미하면서 내 과거에, 감정에, 기억에 귀 기울이는 여유가 없다. 백지는 그저 눈앞에서 해치워야 할 숙제 같다. 마치 이걸 빠르게 해치우고 나가 놀고 싶은 엉덩이가 들썩이는 어린이의 마음 같다.

천천히 글을 쓰다 보면 원하지 않아도 내 글의 첫 번째 독자는 '나'다. 글이 지나간 자리를 눈이 따라가다 곧잘 멈춘다. 순간 부끄러움이 밀려든다. 그래서 눈이 글을 하나하나 살필 여력이 없도록, 풀린 실타래를 얼른 감아버리듯 후다닥 쓴다.


그래서일까. 내 글에 만족해 본 적이 별로 없기에, 항상 '알맹이가 없는 글'처럼 느껴졌다. 짧은 한 문장이라도깊은 맛을 내는 장인과 달리, 나는 사족을 덧붙이며 양으로 승부를 본다. 그게 내 글쓰기의 문제라고 스스로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대책을 세우는 일에는 소홀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백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작가처럼 백지를 마주할 때마다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설렘을 느낄 수 있을까?


결론은 어쩌면 간단하다.


내 글에 대한 작은 자신감을 쌓는 일이 우선이다. 


대책을 세워본다.


1. 구체적인 에피소드 위주의 글쓰기.

: 감정에 치우친 글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이고 뾰족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2. 책을 많이 읽고 표현력 키우기

: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책은 언제나 표현력의 원천이다.


3. 퇴고 습관 만들기

:글을 다시 읽으며 흐트러진 부분을 바로 잡고, 벗어난 이야기는 다른 글로 분리하기.


대책도 그다지 새롭진 않다. 그래서 씁쓸하다. 하지만 작지만 구체적인 목표가 하나 생긴 기분이다.


나도 언젠가 백지를 마주할 때, "자, 이제 무엇을 풀어볼까?"라고 여유롭게 말할 수 있길 바란다. 글쓰기가 힘든 숙제가 아니라, 나의 생각과 감정을 맛있게 요리해 내는 과정으로 느껴지길 바란다.


백지를 사랑한다는 말이 아직은 낯설지만, 언젠가 내게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 순간을 기대하며 나는 오늘도 필사를 하고, 글을 쓴다.


백지를 사랑하지 못한다고 단정 짓지 말자.


마녀수프를 잘 끓이는 글쓰기 마녀처럼,

어떤 재료든 맛 좋은 마녀수프를 만들 수 있는 실력이 생기면 좋겠다.


좀 더 고민해 보자.

백지를 사랑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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