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필사
우연히, 필사 9일째.
요즘 필사하고 있는 책은 류시화 시인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시의 다양한 표현력을 배우고 싶어서 골랐다.
그런데… 또 깜빡했다.
나는 변화 없는 반복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걸
어제는 만화 대사를 적으며 변화를 줬고, 오늘은 독서노트를 뒤적였다. 완독 후 밑줄 친 문장을 기록하는 건,유일하게 꾸준히 해온 습관 중 하나다.
옵시디언(Obsidian)이라는 프로그램을 주로 쓰는데,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 문장을 찾아 필사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은 생태학자 델리아 오언스가 쓴 작품이다.
습지를 배경으로 한 카야의 성장담. 생태학자가 쓴 소설답게, 배경 묘사가 입체적이고 섬세하다.
이 책을 읽을 때, 문장을 정말 열심히 옮겨 적었던 기억이 난다.
독서노트를 적는 이유는 많다.
감동적인 문장, 나중에 인용하고 싶은 문구, 그리고 좋은 문장을 옆에 두고 반복해서 읽기 위해서.
하지만 사실, 다람쥐가 먹지 않을 도토리를 모아두듯, 모으는 행위 자체에서 희열을 느꼈던 것도 있다.
필사는 성격을 비추는 거울 같다.
나는 결과가 바로 나오지 않는 행위에 쉽게 싫증을 낸다. 그래서 필사를 꾸준히 하지 못했다.
지금 필사를 꾸준히 하고 있는 이유는 그 조급함을 가라앉히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 못한 이유도, 하려는 이유도 같다.
연필로 필사하면 느리고 차분한 맛이 있다.
답답하면 곧바로 볼펜을 집는다.
시집을 필사하고 싶어 시를 썼다.
시집만 필사하는 게 지겨워졌다.
그래서 독서노트를 뒤적이며 소설의 문장들을 따라 썼다.
이렇게 꾸준히 하고 싶은 욕심과, 쉽게 질려버리는 성격이 동시에 나를 이끈다.
결국 필사는 나를 닮아가는 작업 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끝까지 해볼 생각이다.
그래서 오늘도 필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