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필사
우연히 필사 10일째
시계를 보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고 조금 있다 다시 보면 두 시간이 지나 있다.
시간 도둑이 사는 걸까?
‘시간이 쏜살같다’는 표현이 이렇게 와닿을 수가.
요즘 정신이 없다.
새롭게 배우는 것도 있고, 꾸준히 하는 것도 있고… 욕심은 많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거북이라면, 등에 진 등딱지가 버겁게 느껴져 벗어던지고 싶은 심정....
사실 엄살이다. 그냥 갑자기 바빠진 일정에 살짝 투정을 부려본다.
필사 10일째.
아직은 진행 중. 기특하다.
독서노트를 뒤졌다. 예전에 적어두고 잊고 있던 문장들이 쏟아져 나온다. 우연히 발견한 오래된 사진첩처럼 하나하나 들춰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문장들을 찬찬히 읽다가 깨달았다.
나는 사람에게 위로받는 것보다,
책에서 나의 감정과 맞닿은 문장을 만났을 때 더 큰 위로를 받는다는 걸.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으려면 여러 조건이 맞아야 한다
적당한 투정, 당시의 상황, 상대방의 기분, 공감대 형성을 위한 적절한 분위기…
책은 다르다.
별다른 과정 없이, 무심코 펼친 페이지 속에서 우연히 마주한 한 문장이 그냥 '훅'하고 마음에 꽂힐 때가 있다그 문장 하나로 울컥해 버린 적이 몇 번인지 모르겠다.
사람에게 위로를 받을 때는 '고맙다'는 감정이 앞서지만, 책에서 만난 문장은 마음을 쿵 하고 내려앉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오늘도 무의식적으로 위로받을 문장을 찾았다.
정확히 어떤 말이 필요했는지 몰라도 상관없다.
자석이 철 조각을 끌어당기듯 내 눈길이 저절로 멈추는 곳이 있다.
*나이는 새로 시작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개인의 역사다. 나이가 들수록 삶의 기억과 역사도 두터워진다.
'중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절반쯤 쓰인 책이다. 그 속에는 지우고 싶은 구절이나 사건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 마흔의 시간을 견디며 살아온 것만으로도 당신의 마흔은 무한히 빛나고 있다.
<흔들리는 나이, 마흔> 중
오늘 필사한 문장은 내 40대를 쓰다듬고 있었다.
사십 년이란 시간이 그냥 흘러간 게 아니라고, 힘겹게, 무료하게, 즐겁게 보낸 그 모든 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어쩌면 나도 모르게 가볍게 지나쳐버린 시간들, 때로는 후회하고, 때로는 잊고 싶었던 순간들까지도 결국은 나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자꾸 지워버리고 싶은 문장들만 떠올릴까. 다시 쓰고 싶은 과거, 아예 없던 일로 만들고 싶은 시간들. 그런 순간들이 많아서일까.
"마흔의 시간만으로도 빛나고 있다."
이 말이 처음엔 낯설었다.
진짜 빛나고 있는 게 맞나?
그저 겨우겨우 견디고 있는 건 아닐까?
진짜 사십 년을 살아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히 빛나는 일 아닐까 믿고 싶어진다.
지금 나는 '나만의 인생'이라는 책을 쓰는 중이다.
어떤 장면은 지우고 싶고,
어떤 문장은 더 아름답게 다듬고 싶겠지만,
결국 이 책은 나만 쓸 수 있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