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필사
우연히 필사 12일째.
"나이 들수록 그런 친구가 좋아.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지만,
오래간만에 만나도 편하고 전혀 애쓸 필요 없는 친구. 묵은지 같은 사이 말이야."
외출하기 전, 남편에게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딱 그런 친구를 2년 만에 만나는 날이었다. 사는 게 바빠서, 육아와 일에 치여 자주 만나지 못했기에 더욱 애틋했다. 유난히 오늘이 설렌 건 따뜻한 봄 날씨, 넉넉한 시간, 오래간만의 느긋한 여유까지 삼박자가 완벽히 갖춰졌기 때문이다.
옛 친구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추억을 처음 듣는 것처럼 깔깔 웃으며 나눴다. 서로 힘들었던 시간까지도 씁쓸한 웃음과 담백한 위로가 오갔다. 긴 시간 여행을 마치고 나니 마음이 박하향처럼 청량해졌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조금 힘들었던 걸까.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먼지가 거품 속에 씻겨 나간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여운은 계속 남아 있었다. 필사를 시작하려던 참이었지만,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무심코 연필을 집다가, "새 연필을 쓰고 싶어!" 하고 외치며 연필 수집 박스를 열었다.
한때 연필 수집이 취미였다. 고이 숨겨둔 보물 상자를 열 듯 기분이 설레었다. 오랜 친구를 만난 기분이 연필에게 옮겨갔다. 하나하나 꺼내보며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동안 아까워 쓰지 못하고 모아둔 연필 중 가장 아끼고 오래된 연필을 집으며 생각했다.
'너와 나 사이 같구나'
나이 든다는 것은 단순히 망가지고 시든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매 단계가 그렇듯이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어쩌면 괜찮은 나이> 헤르만 헤세
컴퓨터 대신 필사 노트를 꺼냈다. 찬찬히 노트를 넘기며 마음이 닿는 문장을 찾았다. 오늘은 필사보다 연필을 구경하고, 노트를 뒤적이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냥 모든 것을 느긋하게 하고 싶었다. 달달함이 빨리 녹아버리지 않게. 조급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필사는 내 감정에 따라 요리조리 움직이는 작은 생명체 같다.
헤르만 헤세의 문장이 마음에 닿았다. 그의 문장을 쓰는 동안, 오랜 친구와 내가 함께 걸어온 익숙한 시간이 겹쳐졌다. 그 사이 전이수 작가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고, 10대에 친구와 처음 만났던 순간까지 떠올랐다. 필사하는 동안 옛 기억과 현재의 나이 듦이 자연스레 섞였다.
한때 우리는 빛나는 청춘이었고, 지금은 조금씩 익어가는 시간 속에 있다.
천천히 시들어가더라도, 오래 머금은 만큼 깊고 은은한 향을 퍼뜨리는 나이이길 바란다.
오늘 하루는, 그리고 필사는 피스타치오 아몬드처럼 고소하고 달콤했다.
매일 이런 날일 수 있다면 참 좋겠는데.
<어쩌면 괜찮은 나이> 헤르만 헤세
-사람도 인생의 여름날이 끝나갈 무렵이면 나약해지고 죽어가리다.
뼛속 깊이 파고드는 서늘한 기운. 핏속까지 집요하게 몰려오는 허전함에 저항하게 되리라.
그러고는 새롭게 다져진 진정한 마음으로 삶의 작은 유희와 겉으로 드러나는 수많은 아름다움.
앙증맞은 색의 현란함. 빠르게 지나가는 구름의 그림자에 몸을 내맡긴 채 미소 지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를 꼭 끌어안고 불안해하면서 죽음을 바라보다가 서서히 그 안에서 두려움과 위안을 건져 올려
죽어갈 수 있는 예술을 배울 것이다.
-아무런 내용도 없지만 영원한 움직임, 죽음에 대한 영원한 항거로
삶이라는 이름의 연극은 영원하고 맹렬하다.
-따듯한 벽난로 앞에서
맛 좋은 붉은 포도주를 마시며
노년의 좋은 시간들을 보내다가
마지막으로 평온한 죽음을 맞이한다면 -
그러나 나중에. 아직 오늘은 아니다.
-마흔 살과 쉰 살 사이의 십 년은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과 예술가들에게는 언제나 힘겨운 세월이다.
마음이 불안하고, 삶과 자기 자신을 적절히 조화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종종 불만족에 시달리는 시기다.
그렇지만 그다음에는 편안한 시간이 온다.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전이수
내 마음이 가는 대로. 그런 게 자유일까.
가끔은 심장이 원하는 대로 뛰어가고 싶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싶다.
그건 어린아이들이 라면 해소되지 않은 호기심이 아직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기 전에는 이 많은 호기심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이 우리 어린이들이다.
그러나 나는 잠시 멈추어야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피해나 불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간의 이해가 있다면, 이런 우리들의 마음을 조금은 허락해 준다면
고마운 마음으로 커서 이 모든 것을 헤아리고 이해하는 좋은 어른이 될 것이다.
그때엔 정신도 몸도 좋은 습관으로 배어 있어서
억지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 심장을 따라 살아가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진정 자유로움을 줄 것이다.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해도 아무런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 그것이 자유다.
난 그런 자유를 찾아 좋은 습관이 몸에 배도록 익혀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