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필사 14일째
내가 싫은 날은 한 달에… 그러니까, 많으면 3일쯤? 대략 1/10 정도 온다. 자주 오는 날이라 그런지 이제는 그 방문이 그다지 새삼스럽지 않다.
그냥, 또 왔구나. 무심하게 맞이한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그날의 감정이 예고 없이 깊어진다. 평소라면 가볍게 넘겼을 일들이 마음속에서 뭉치고 무거워져 나조차 왜 그런지 알 수 없는 날이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조금 시니컬해진 기분에 독서 노트를 뒤적였다.
묘하게도 오늘의 기분을 그대로 비추는 문장을 금방 찾았다.
셰익스피어, <리어 왕> 그리고 <맥베스>.
오늘 나의 마음을 대신해 줄 목소리였다.
<리어 왕>
"인간이란 큰 병을 앓으면 작은 병쯤은 아무것도 아니란다. 곰을 보면 누구나 피하지. 하지만 눈앞에 성난 바다가 가로놓여 있다면 곰과 사생결단을 할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이다. 마음이 편안해야 몸의 고통도 느끼는 법 아닌가.내 마음속에 폭풍이 이렇게 부는데 심장의 고동소리 외에 어떤 감각이 있겠느냐" -리어 왕
"마땅히 가야 할 곳도 없으니 눈도 필요 없네.
눈이 보일 때에도 나는 헛디딘 적이 많았어. 하지만 의지할 게 없으면 오히려 더 강해지지" -글래스터
"더 나빠질 수도 있으니 '이것이 최악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한은 최악이 아니다" - 에드가
<맥베스>
"시간아 그대가 먼저 나를 앞질러 가는구나. 아무리 계략이 좋다 해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면
모든 게 허사로다. 이제부터 생각을 하면 즉시 실천에 옮겨야겠구나"
"내일. 내일. 내일. 시간이 천천히 발을 끌면서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에 도착할 때까지 걸어가는구나.
(...) 꺼져라. 눈 깜짝할 사이의 촛불이여. 인생은 비틀거리는 허황한 그림자일 뿐. 얼마 있으면 영영 잊혀지는 가련한 배우가 아니더냐. 자신이 할당받은 시간만큼 무대 위에서 서성거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디론가 사라져야 하지"
필사를 하며, 다시금 셰익스피어의 문장력에 감탄한다.
몇백 년 전의 대사가 지금의 내 마음에 이토록 정교하게 들어맞는다니. 그의 상상력, 비유,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깊은 시선이 새삼 부럽다.
리어 왕의 절규, 글래스터의 담담함, 에드가의 생존 철학, 그리고 맥베스의 체념과 실천에 대한 다짐까지.
마치 이 모든 대사가 오늘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기분 좋은 날엔 기분 좋은 글을 따라 쓰고,
마음이 울적한 날엔 나를 달래줄 문장을 찾는다.
필사와 희로애락을 함께 한다.
이쯤 되면 필사는 단순히 손을 움직이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의 온도를 살피는 행위 같다.
마음이 어지러운 날 문장을 통해 나를 다잡는다.
언젠가 지나가겠지만 오늘의 감정도 나의 일부다.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이런 날엔 그냥 셰익스피어에게 내 마음을 맡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