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필사
우연히 필사 15일째.
몸과 마음이 지칠 때, '고전'에 기댄다.
나보다 나이 많은 선배를 찾듯.
고전은 조용히 힘이 세다.
오늘 필사는 다시 읽고 싶은 고전 중 하나,
<노인과 바다>
" '난 정확하게 미끼를 드리울 수 있지'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단지 내게 운이 따르지 않을 뿐이야.
하지만 누가 알겠어?
어쩌면 오늘 운이 닥쳐올는지.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 아닌가.
물론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그보다는
오히려 빈틈없이 해내고 싶어.
그래야 운이 찾아올 때 그걸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게 되거든"
운이라는 건 정말 있는 걸까?
있는 거라면 왜 나에겐 좀처럼 오지 않을까?
한참 동안 지인과 이야기를 나눴다.
운의 존재 유무, 그리고 운이 찾아오는 그 순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 보면, 운이라는 건 그냥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게 아니잖아. 무인도에 떨어졌다고 치자.
그저 가만히 구조되기만 기다린다고 누가 구해주지는 않아. 적어도 나무를 비벼 연기를 피우거나, 깃발이라도 흔들어야 우연히 지나가던 배가 날 발견해 줄 수 있는 거잖아.”
우리는 동시에 끄덕였다.
막연히 '운이 있다 없다'에서 운을 만날 수 있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로 방향이 바뀌었다.
어쩌면 ‘운을 만날 준비가 되었는가’의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그동안 내가 ‘운이 없다’며 투덜댔던 건,
감나무 아래에 멍하니 서서 ‘왜 감이 안 떨어지지?’ 하고 있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는걸.
운이 없었던 게 아니라,
운을 맞이할 준비조차 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은 정확하게 미끼를 드리우며 말한다.
"나는 빈틈없이 해내고 싶어.
그래야 운이 찾아올 때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운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열심히 미끼를 껴서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만이 그 우연을 만날 자격이 있다.
미끼 냄새를 맡고 달려오는 고기떼를 만나듯이.
망망대해에서 고기와 사투를 벌이면서도
노인은 삶의 생동감을 놓지 않았다.
무기력한 날.
그 생동감을, 오늘 나는 필사한 문장 사이에서 조금 받아왔다.
<필사 문장>
-두 눈을 제외하면 노인의 것은 하나같이 노쇠해 있었다.
오직 두 눈만은 바다와 똑같은 빛깔을 띠었으며 기운차고 지칠 줄 몰랐다.
-무거운 줄을 꽉 쥐고 있는 손이 뻣뻣하게 오그라들자 그는 혐오스럽다는 듯 그 손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놈의 손이람. 쥐가 날 테면 나라지. 매 발톱처럼 어디 오그라들어봐.
그래 봐야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까" 그가 말했다.
-'저 고기 놈이 되어보고 싶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오직 내 의지. 내 지혜에 맞서 모든 걸 갖고 싸우고 있는 저놈 말이야.
-"나는 그 아이한테 내가 별난 늙은이라고 말했지. 지금이야말로 그 말을 입증해 보일 때야"
그가 말했다. 지금까지 그는 그런 입증을 수천 번이나 해 보였지만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지금 또다시 그것을 입증해 보려고 하고 있었다.
매 순간이 새로운 순간이었고, 그것을 입증할 때 그는 과거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고기야. 네놈이 나를 죽이고 있구나.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네게도 그럴 권리가 있지.
한데 이 형제야.
난 지금껏 너보다 크고, 너보다 아름답고, 또 너보다 침착하고 고결한 놈은 보지 못했구나.
자. 그럼 이리 와서 나를 죽여보려무나. 누가 누구를 죽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노인은 몸뚱이가 뜯겨 성하지 않게 되어버린 고기를 이제 더 이상 바라보고 싶지가 않았다.
고기가 습격을 받았을 때 마치 자신이 습격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좋은 일이란 오래가는 법이 없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차라리 이게 한낱 꿈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고기는 잡은 적도 없고 지금 이 순간 침대에 신문지를 깔고 혼자 누워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고기 무게가 20킬로그램이 줄어 배는 그만큼 가볍게 달리고 있고 말이야.
-갖고 왔어야 할 것이 많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 늙은이야. 넌 그것들을 가지고 오지 않았잖아.
지금은 갖고 오지 않은 물건을 생각할 때가 아니야.
지금 갖고 있는 물건으로 뭘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