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필사
우연히 필사 16일째.
세상은 시끄럽고,
야속하게 비는 안 오고,
나는 지친 날.
'필사는 건너뛰자'
마음먹는 건 아주 쉬웠다.
필사를 안 써도 되는 명분은 흘러넘쳤다.
아무 자책도, 찝찝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으로 TV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렸다.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멈춘 예능 프로그램에서 마침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오늘따라 그 노래가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
몸이 쑤시고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나는 일순 책상 앞에 앉아 노래를 검색했고 필사를 시작했다.
우연히 듣게 된 노래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마음을 끄집어냈다.
오늘 필사한 노래는,
크라잉 넛의 <밤이 깊었네>
장미여관의 <퇴근하겠습니다>
아이유의 <LOVE POEM>
노래 듣기가 한때 취미였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화가 날 때도, 불안할 때도 음악을 들었다. 하루 종일 음악만 듣는 날도 있었다. 가사에취하고 음에 취해 나만의 세상에 갇힌 듯한 느낌이 좋았다. 신나는 곡을 들으며 입만 벙긋대면서도 온갖 몸짓을 다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슬픈 노래를 듣다가도 성에 차지 않아 위로하는 곡을 연신 들었다. 가사 속 주인공이 전부 나인 듯, 세상에서제일 불쌍한 사람을 만들어 놓고 오열하기도 했다.
그렇게 노래를 들으며 웃고 울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한동안 잊고 지낸 스트레스 해소법.
첫 번째 곡 <밤이 깊었네>를 유튜브에서 찾았다.
익숙한 멜로디와 듣고 싶은 가사가 흘러나왔다.
가사를 따라 적으면서 손이 아픈 것도 잊었다.
노래를 따라 부르고, 손으로 적고, 눈으로 읽는다.
이것은 원래 아주 좋은 공부법이 아닌가.
최고의 필사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잠시 노래를 멈추고 가사에 집중했다.
그냥 따라 부를 때와 글로 적으며 의미를 음미할 때는 확연히 느낌이 다르다.
가사는 원래 고르고 고른 표현들로 이루어진 집약체가아니던가. 모두 적고 난 후 다시 노래를 틀었다. 눈을 감고 입을 벙긋대며 몸을 흔들었다.
현실을 잊고 잠시 무아지경에 빠진다.
이 순간엔 오직 나뿐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마치 큰일이라도 끝낸 듯한 뿌듯함과 시원함으로 날숨을 길게 내쉬었다.
'시원하구나'
여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연이어 두 번째 곡을 틀었다.
장미여관의 <퇴근하겠습니다>.
마음이 울적할 때, 훌훌 떠나고 싶은 기분이 들 때 자주듣는 노래다. 좋아하는 곡이지만 가사를 필사하면서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 노래 가사를 필사하며 새롭게 알게 된 점!
일상적인 표현만 있는 노래보다는 시적인 표현이 곁들여 있거나 배우고 싶은 창의적인 문장이 있는 노래가 필사할 때 더 재밌다.
<퇴근하겠습니다>는 좋아하지만 전부 일상 언어뿐이라, 필사용으로는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 있었다.
아쉬움에 마지막 곡을 골랐다.
아이유의 <LOVE POEM>
감성에 젖고 싶거나 마음이 울적할 때, 울기 싫지만 울컥하는 자극이 필요할 때 듣는 노래다.
연필로 밑줄 긋는 데 가장 오래 걸린 곡이었다.
밑줄을 그으며 문장을 천천히 음미했다.
긁힌 상처에 빨간약을 조심스레 발라주는 듯한 느낌
표현이 시적이고 마음에 깊게 와닿았다. 가장 만족스러운 필사였다. 이 노래는 워낙 좋아해 노래를 듣고 이미지를 떠올리며 리뷰를 쓴 적도 있다.
필사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필사= 스트레스 해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관계가 의외로 제격이었다.
필사는 '꼭 이래야 한다'는 제약이 없다.
그래서 좋았고, 메뚜기처럼 그때그때 끌리는 글을 찾았다. 어느새 글씨를 쓰는 순간보다 마음이 따라가는 글을 찾는 시간이 더 큰 위로가 되었다.
오늘은 내 마음이 노래 가사에 닿았다.
필사를 안 하기로 마음먹은 오늘.
오히려 가장 긴 시간, 가장 오래 쓴 날이 되었다.
필사는 앞으로 종종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제가 될 것 같다. 노래 가사 필사의 매력을 발견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