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필사
우연히 필사 19일째
오늘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책 <비천무>를 필사했다. 6권을 펼쳐 좋아하는 문장에 포스트잇을 붙이며 책장을 다시 넘겼다.
문장을 찾는다는 핑계로 그림과 글을 음미하고, 그 과정이 즐거워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8쪽을 따라 쓰고 나니 손은 얼얼했지만 마음은 충만했다.
똑같은 장면에서 여전히 울컥하고, 그 감정에 빠져 나만의 세계에 잠긴 날.
이런 날은 꼭 기록해둬야 한다.
"황금빛 깃발.. 황성은 아득히 멀고
강호의 어부는 낡은 그물을 당긴다.
흐르는 구름 아래 꽃가지 하나 시름에 겨운 봄날..
가끔은 기억되고 더러는 그저 잊혀진
어느 무사의 전설...
어느 무녀의 정한..
황토빛 바람 속을 떠도는 한 많은 지초들의 잊혀진 춤..
만리장성 아래 어느 한촌에서는
지금도 말리꽃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는가... "
-<비천무 6권> 중
<비천무>는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작품이다. 한때 전권을 소장했지만 친구들에게 빌려주다 대부분 사라졌고, 그 후로도 마음 한편에 남아있었다. 40대가 되어 어렵게 다시 중고로 구입했고, 이제는 평생 간직하고 싶은 책이 되었다.
(* 만화책 일부를 올리는 건 저작권 위반이 될까 염려되지만, 작품 내용이 직접 담긴 장면은 아니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문제가 될 시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봄꽃, 가을 달은 언제나 다하리.
지난 일은 잊혀 가네.
지난밤 누각에 봄바람은 다시 불었건만,
고국을 밝은 달 아래 되돌아보지도 못하고
아로새긴 난간과 대리석 섬돌은 그대로 있으리.
다만 붉은 얼굴만 바뀌었으리.
묻노니- 그대의 시름은 모두 얼마인가?
마치 온 강의 물이 동으로 흐르듯"
-이욱의 '우미인'
"빗소리는 선율.. 가늘게 떠는 풀잎은 하늘을 오르는 춤.
알 수 있겠니? 설리.. 지난 한 해 동안의 내 마음을..
때로는 바람이 흔들리는 나뭇잎으로...
때로는 인적도 없는 황톳길에 서걱이는 갈대풀로..."
<비천무>는 원이 멸망하고 명나라가 건국되는 격변의 시대, 멸문한 가문의 마지막 아들 진하와 몽고 귀족의 서출 설리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린다.
고요한 산골 마을 '산매'에서 소박하게 살아가고 싶었던 두 사람은,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모든 것을 잃어간다.
어린 시절에는 역사적 배경을 잘 몰랐지만 이들의 사랑과 인생은 깊이 각인되었다.
흑백 만화 특유의 수묵화 같은 그림체는 마치 동양화 한 편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고,
작품 곳곳에 흐르는 한시와 시적인 대사들은 인물의 감정을 섬세하게 담아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들의 한과 아픔이 진하게 응축되어 있었다. 한 번쯤 필사하고 싶다고 마음먹었던 장면들. 오늘 드디어 목표를 이뤘다.
나는 끈기가 없는 사람이다.
계획을 세워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자책과 한탄도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그냥 그런 사람'이라 스스로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체념보다는 수용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내가, 비록 매일은 아니지만 20일 가까이 필사를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놀랍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이끌었을까.
생각 끝에 남은 건 하나였다.
쓰고 싶은 것을 쓴다.
단순하지만 강력한 원칙이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방식으로 쓰다 보며 자연스럽게 꾸준히 이어졌다.
예전의 필사는 늘 '추천 문장'이나 '필사에 좋은 책'을 따라 했기 때문에 금세 흥미를 잃었다.
지금은 다르다. 좋아서 쓴다.
감정이 끌리는 대로, 듣고 싶은 노래나 좋아하는 대사를 따라 손을 움직인다.
아직 필사하고 싶은 것들이 넘쳐난다.
좋아하는 노래만으로도 아마 1년은 충분히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하하.
오늘도 그렇게 나만의 방식으로 한 시간을 채웠다.
끈기 없던 내가 이렇게까지 이어올 수 있었다는 건, 참 대단한 일이다.
나조차도 몰랐던 끈기의 가능성.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방식으로 하다 보니, 나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