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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필사 18일째

우연히 필사

by 감정 PD 푸른뮤즈

우연히, 필사 18일째.


감기 때문에 한동안 헤롱거렸다. 해야 할 일만 겨우겨우 해내며 보낸 시간.

오늘 아침, 드디어 컨디션이 돌아왔다. 건강이 돌아왔다는 건 곧 의욕도 함께 돌아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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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회복되자 다시 하고 싶은 일들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는 '<아리랑> 읽는 일'이었다.

올해 상반기 목표 중 하나가 <아리랑(12권)> 완독이었고, 감기 덕분에 그 목표에 성큼 다가갔다.

아파서 몸은 힘들었지만, 그 덕에 실컷 책을 읽었다. 7권까지 읽고 이제 8권 시작.

중반부를 지나면서는 밑줄 친 부분을 다시 써보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다.

오늘의 필사는 그래서 <아리랑>


대나무 숲이 사운 거리고 있었다. 바람이 부는 기미라고는 없는데 대숲이 소곤거리듯 읊조리듯 사운 거리고 있었다. 어둠이 드리워지면서 작은 새들의 지저귐도 그쳐 대숲에는 정적이 깊었다. 깊은 정적 속에서 여리고 보드랍게 여울 짓는 대숲의 사운 거림은 어떤 소리가 아니라 무슨 향내 같기도 했다. 어쩌면 다른 나무숲에서는 들을 수 없는 그 특이한 사운 거림은 대숲의 채취인지도 몰랐다."

- <아리랑> 7권 중-


필사를 하면서 살짝 후회했다.

'아, 밑줄을 좀 더 많이 그어둘걸'

<아리랑>은 워낙 가독성이 좋아서 밑줄 칠 새도 없이 빠져 읽게 된다. 이미 3권쯤 읽었을 때 밑줄을 긋지 못했다는 후회를 했다. '다음에 다시 읽을 때 줄을 쳐야겠다'라고 넘어갔다. 고전은 결국 한 번 이상 읽게 되나 보다.


이 작품이 특히 놀라운 건, 인물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쉰다는 점이다. 표현은 말할 것도 없고, 서사와 감정의 흐름, 배경 묘사까지도 생생하다. 화가 났다가 허무했다가, 슬펐다가.. 감정이 요동치고, 책장을 덮고 나면 마치 그 장면에서 막 빠져나온 기분이다. 전개의 강약, 흐름, 사건, 갈등, 모든 것이 매끄럽고 흡인력 있다. 이게 정말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이야기일까? 차라리 작가가 과거를 직접 보고 베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특정 작품이나 작가를 예찬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현재이야기 속에 흠뻑 빠진 독자로서, 이 놀라운 세계를 만들어낸 사람에게 절로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작가님의 필력, 어휘력, 묘사와 비유 실력은 정말 부럽다. 필사를 하면서 작은 소망을 품어본다.

나도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고, 필사도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조금은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오늘의 필사는 감탄과 부러움, 그리고 희망이 섞인 시간이었다. 내일의 글쓰기를 조금 더 나아지게 해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


필사는 나에게 그런 희망을 싣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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