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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필사] 필사, 국어공부하는 중

우연히 필사

by 감정 PD 푸른뮤즈


하루 한 장 필사 책을 쓰는 재미에 푹 빠졌다.

신기한 일이다.

예전엔 '그냥 필사할 책 보고 연습장에 쓰면 되는데 굳이 필사 책이 왜 필요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내가 원하는 문장이 아니라,

타인이 검수해서 정리해놓은 문장들은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두부처럼 반듯하고 매끈했다.


나는 그런 반듯함보다는,

투박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모양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일을 더 좋아했다.


그런 나에게 우연히 한 권의 필사 책이 선물로 들어왔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필사는

그동안 내가 가졌던 생각을 뒤집어 놓았다.


처음엔 단지 매일 필사할 문장을 고르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어서 편했다.

이 문장이 왜 좋은지 생각 없이 그냥 손으로 베낄 뿐이었다.

하지만 의미 없이 문장을 옮겨 적는 시간이 반복되다 보니 점점 흥미가 떨어졌다.

SE-28fc9bfa-0563-4ac7-aa78-66bf843b4ad1.jpg?type=w1 처음엔 필사를 하고 마음에 드는 문장 밑줄 긋기만 했다.

어느 날, 짧은 문장 하나를 필사했다.

5분 만에 필사가 끝났고 왠지 허전했다.

문장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표현이 독특했다.

SE-c9b5e9ca-bb38-4577-a7b3-a47c3cf43300.jpg?type=w1 이날이 시작이었다.

'아롱아롱~ 목소리? 목소리에 이런 표현을 쓰나?'

툭 던진 질문이었는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시계를 보니 30분이 흘렀다.

이게 시작이었다.


그날을 계기로 필사를 한 후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국어 공부하듯, 의미를 곱씹으며 적어보기도 하고

궁금한 표현이 있으면 찾아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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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요령이 생겼고, 필사 보다 '필사 이후의 행위'가 더 흥미로웠다.

문장을 따라 쓰고

생각의 흐름대로 의문이나 해석을 적어본다.

궁금한 게 생기면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도 찾거나 고민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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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국어사전이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인터넷을 활용할 수 있지만, 오랫동안 방치된 국어사전을 꺼내 손으로 넘겨보는

그 아날로그 감성이 이 시간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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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적으면 포스트잇도 붙이고, 프린트 해서 첨부한다.

내 생각을 적고 궁금한 점을 덧붙인 뒤,

AI를 활용해 문장의 의미를 분석해 본다.

내 해석과 AI의 분석을 비교해 보면

비슷한 점도, 전혀 다른 해석도 나온다.


AI가 정답은 아닐지라도,

필사라는 혼자만의 작업에

타인의 관점이 더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묘한 활력이 돈다.


필사 시간이 예전보다 길어졌지만

체감 시간은 오히려 짧아졌다.

하루에 딱 한 장, 그 시간만큼은 마음이 풍요롭다.

아침에 쓰기도 하고, 저녁에 쓰기도 하며

유연하게, 내가 쓰고 싶을 때 즐긴다.


필사를 하다 보면 문득

예전 국어공부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다른 과목은 싫어도 국어는 재미있었다.

필사가 곧 국어 공부는 아니지만

그 시절의 감각과 지금의 감정이 어딘가에서 이어지는 것 같아

괜히 마음이 푸근해진다.


아마 이 필사 책을 다 써도

나는 쉽게 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 안에는 내가 골라낸 문장들뿐 아니라

문장을 통해 떠올린 생각들,

내가 나눈 질문과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곁에 두고

가끔 들춰보며 다시 읽고 싶은

또 하나의 일기장이 돼줄 테니까.

SE-f1130a39-c9ea-4afe-8295-86d01547fa84.jpg?type=w1 오늘도 필사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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