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오면, 우리는 '클릭'을 그리워하게 될까?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by TEUM Lab

1989년,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에 걸친 거대한 지하 터널 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이곳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비싼 실험 장비가 돌아가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CERN-group-around-collider.jpg CERN의 대형 강입자 충돌기 [출처: University of Bath]


그런데 우주의 기원을 밝히고, ‘신의 입자’를 찾기 위해 이 곳에 모인 수천 명의 천재들에게도 도저히 풀 수 없는 난제가 하나 있었다.


“그 실험 데이터, 도대체 누가 어디에 저장해 둔 거야?!”




정보의 블랙홀

CERN에는 전 세계 80개국에서 온 수천 명의 과학자가 매일 드나들었다.

문제는 그들이 가져온 컴퓨터가 다 달랐다는 점.

누구는 IBM 메인프레임을, 누구는 유닉스 워크스테이션을, 누구는 매킨토시를 썼다.


USB메모리도 없던 시절, 서로 다른 기종끼리는 문서 하나 주고받는 것이 고역이었다. 게다가 연구원들은 2~3년이면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들이 남긴 귀중한 데이터는 어디 처박혀 있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인류 지식의 최전선이자 '미니 블랙홀'을 발생시키는 실험까지 할 수 있는 CERN은, 역설적으로 '정보의 블랙홀'이었다.


이 난장판을 지켜보던 한 영국인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 성이 Lee지만 한국인이 아니다.


그는 1989년 3월, 상사에게 소심하게 제안서 하나를 내민다.

"정보 관리: 제안(Information Management: A Proposal)"

원본: https://info.cern.ch/Proposal.html


상사 마이크 샌달은 그 제안서 위에 이렇게 휘갈겨 썼다.

Vague but exciting
모호하지만 흥미롭다



세상을 연결하는 거미줄

팀 버너스 리의 아이디어는 모호했지만 단순했다.

"모든 문서를 거미줄(Web)처럼 연결하자."


이를 위해 그는 세 가지를 만들었다.

문서를 작성하는 언어 HTML(HyperText Markup Language)

문서를 주고받는 규칙 HTTP(HyperText Transfer Protocol)

그리고 문서의 주소 체계 URL(Uniform Resource Locator)

그리고 이 삼위일체로 인해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이 탄생한다.


팀 버너스 리는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난 후 만든 'NeXT' 컴퓨터를 이용해 세계 최초의 웹 서버를 만들었는데, 그 컴퓨터에는 빨간딱지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This machine is a server. DO NOT POWER IT DOWN!!
이 기계는 서버입니다. 절대 끄지 마시오!!

예나 지금이나, 서버는 절대로 끄면 안 된다.


1990년 크리스마스, 그는 벨기에 출신 엔지니어 로베르 카이오(Robert Cailliau)와 함께 세계 최초의 웹 브라우저와 웹 페이지를 완성. 입자 가속기를 돌리던 물리학자들의 데이터를 공유하기 위해 만든 이 시스템은, 곧 물리학 연구소를 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First_Web_Server.jpg 최초의 웹서버 [출처: Photo by CERN / CC BY 4.0]



모두를 위한 발명

웹이 지금처럼 폭발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팀 버너스 리의 기술적 천재성만이 아니다.

그는 이 엄청난 기술에 특허를 걸지 않고, CERN을 설득해, 웹 기술을 전 세계 누구나 공짜로 쓸 수 있게 풀었다.


만약 그가 웹 사용료를 받았다면?

그는 엄청난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오늘날의 인터넷은 조금 더 늦게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오늘날 유튜브를 보고, 인스타그램을 하고,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건, 어쩌면 30년 전 스위스의 한 연구소에서 "정보를 공유하고 싶다"는 순수한 학문적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가 무심코 클릭하는 그 링크 하나에, 인류를 연결하려던 한 연구자의 꿈이 담겨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 꿈은 원래 목표를 넘어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berners-lee.jpg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 [출처: History of the Internet]



거미줄에 걸린 인공지능

2026년, 이제 웹은 인간만의 공간이 아니다.

수많은 AI 에이전트들이 초당 수백만 번씩 이 거미줄을 오가며 정보를 읽고 배운다.

앞으로는 분명 인간보다 AI들이 더 많이 웹을 이용하게 될 것이다.

팀 버너스 리가 꿈꾸던 '시맨틱 웹(Semantic Web)'—기계가 문서의 의미를 이해하고 스스로 연결하는 웹—이 AI를 통해 비로소 완성되어 가는 듯하다.


최근에는 한 발 더 나아가, AI가 웹을 '보고' '클릭'하는 시대가 열렸다.

2024년 앤트로픽이 컴퓨터를 조작하는 AI를 공개한 이후, 2025년에는 오픈 AI의 '오퍼레이터(Operator)', 구글의 '프로젝트 매리너(Project Mariner)' 등이 연달아 등장.

이들은 화면에 보이는 버튼과 메뉴, 텍스트 필드를 마치 인간처럼 인식하고 조작한다.

"대구로 기차표 예약해 줘", "인터넷에서 이 제품 최저가 찾아줘"—사용자가 명령만 내리면, AI가 브라우저를 열고 스스로 클릭하고, 입력하고, 결제까지 처리한다.

구글 크롬은 얼마 전 브라우저에 자사 AI 제미나이(Gemini)를 공식 탑재했다. (아직 미국에서만 서비스 중)


인터넷이 전 세계 컴퓨터를 연결하는 도로망이라면, 웹은 그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다.

이전에 소개했던 DARPA가 핵전쟁에도 끊기지 않는 네트워크를 꿈꿨고, TCP/IP가 서로 다른 컴퓨터들에게 공통 언어를 선물했으며, DNS가 복잡한 숫자 주소 대신 사람이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을 붙여줬다면—팀 버너스 리는 그 위에 '클릭 한 번으로 지식을 건너뛰는 마법'을 얹었다.


웹의 등장으로부터 36년이 지난 지금, AI는 그 웹 위에서 인간이 수십 번 클릭해야 할 작업을 단 한 번의 명령으로 대신 수행한다. 가까운 미래에 웹은 인간이 직접 탐색하는 공간이 아니라, AI들만이 활동하는 공간이 될지도 모른다.


그때가 오면, 우리는 '클릭'을 그리워하게 될까, 아니면 더 큰 자유를 얻게 될까?


최대한 신중하게 팩트 체크를 거쳤지만, 기술과 역사를 다루다 보니 놓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 부족한 점 발견하신다면 너그럽게 댓글로 알려주세요. 여러분의 조언이 모여 더 좋은 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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