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들이 세상을 움직인다
1983년, 남캘리포니아 대학교 정보과학연구소(ISI)의 젊은 컴퓨터 과학자 폴 모카페트리스(Paul V. Mockapetris)는 골치 아픈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인터넷의 전신인 아파넷(ARPANET)—미 국방부가 1969년 구축한 최초의 패킷 교환 네트워크—은 빠르게 성장 중. 하지만 문제는 컴퓨터끼리 통신하기 위한 ‘주소’였다.
당시 연구자들은 'HOSTS.TXT'라는 파일 하나에 모든 컴퓨터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 공유했다. 초창기에는 그럭저럭 돌아갔으나, 네트워크에 연결된 컴퓨터가 수천 대가 되자 파일은 엉망이 됐고, 일일이 업데이트하기에도 번거로웠다.
"이 방법은 전화번호부를 한 장 짜리 종이에 적는 격이다."
모카페트리스는 생각했다. 연구실 레벨의 연결에서 벗어나, 온 세상의 컴퓨터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방법을 고민해야할 시기가 찾아왔다.
1983년 11월, 모카페트리스는 RFC 882와 RFC 883을 발표.
DNS, 도메인 네임 시스템이라고도 불린 이 아이디어는 단순했다.
전 세계의 주소록을 한 곳에서 관리하지 말고, 계층적으로 나눈다.
'.com'을 관리하는 서버, '.kr'을 관리하는 서버 등으로.
우리가 웹브라우저에 'example.com'을 입력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컴퓨터는 먼저 가까운 DNS 서버에 묻는다. 'example.com'이 어디야?"
그 서버가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다른(루트) 서버에 물어본다.
결국 여러 서버와 통신하면서 적절한 IP주소 '192.0.2.1'을 찾아서 돌려준다.
이 모든 과정은 놀랍게도 수십 밀리초 안에 끝난다.
더 이상 사람들은 복잡한 숫자를 외울 필요가 없어지고, 기억하기 쉬운 알파벳이 컴퓨터의 주소가 되었다.
마치 우리 동네 주소와 같이.
이 편리한 기술이 등장하고, 인터넷의 주소 체계가 정립되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새로운 종류의 부동산이 탄생한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인터넷 상업화가 시작되자 도메인 이름은 새로운 자산이 되었다.
1999년 12월 1일, 'business.com'이 750만 달러에 팔린 것을 계기로 기업들은 자사 브랜드와 비슷한 도메인을 선점하려 혈안이 됐고, 투기꾼들은 유명 상표를 미리 낚아채 비싸게 되팔았다.
지금은 홈페이지가 없는 회사는 거의 없지만, 당시에는 미처 준비하지 못한 기업들이 많았기에, 수많은 혼란이 발생했다.
도메인 분쟁이 법적 분쟁으로 번지며 점점 확대되자, 국제 지식재산권 기구(WIPO)는 분쟁 해결 절차를 만들었다. 이름 하나를 두고 국경을 넘어 싸우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기록이 공개된 가장 값비싼 도메인은 2019년에 거래된 'voice.com'으로 3,000만 달러.
(더 비싼 도메인도 존재하지만, 대부분 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포함한 가격)
또한, AI.com과 같은 도메인의 가치는 현재 1억 달러 전후로 추정된다고 하니, 더 이상 단순히 '주소'라기보다 '부동산'에 가까운 개념으로 거래가 된다.
물리세계에서는 전화번호나 주소의 값어치보다는 실제로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땅'과 '건물'이 희소하며 가치가 있지만, 디지털 세계에서는 데이터를 저장할 공간은 쉽게 확장과 이동이 가능한 반면, 그 데이터를 저장한 장소로 사람들을 불러 모을 '주소'가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한편 DNS는 해커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2016년 10월 21일 금요일 아침, DNS 서비스 업체 '딘(Dyn)'이 대규모 디도스 공격을 받았다.
트위터, 넷플릭스, 스포티파이, 레딧, 페이팔, 뉴욕타임스가 몇 시간 동안 먹통이 됐다.
한국에서도 큰 문제가 되었기에 이름만은 친숙한 '디도스 공격'.
DNS가 현대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프라인지, 새삼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었다.
2026년, AI 에이전트들이 인터넷을 누빈다.
ChatGPT가 검색하고, 클로드가 요약하고, 제미나이가 예약을 잡는다.
이 모든 AI도 결국 DNS 위에서 움직인다.
'openai.com'을 찾고, 'anthropic.com'에 접속하고, 'google.com'의 API를 호출한다.
벨 연구소에서 태어난 UNIX가 인터넷 서버의 뿌리가 됐듯, 모카페트리스가 UNIX 기반 시스템에서 설계한 DNS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위에서 인공지능을 달리게 한다.
최근에는 DNS에 AI를 결합하려는 시도도 등장했다.
클라우드플레어와 구글은 AI 기반 위협 탐지 DNS를 내놓았고, 일부 스타트업은 자연어로 "가장 가까운 피자집"이라 말하면 알아서 주소를 찾아주는 '의미 기반 DNS'를 실험 중이다.
주소를 외우는 것을 넘어, 주소를 말할 필요조차 없어지는 미래.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이름과, 기계가 이해하는 숫자 사이를 연결하는 것.
우리는 매일 수십 번씩 DNS를 사용한다.
단 한 번도 의식하지 않으면서.
가장 위대한 기술은, 없어서는 안되지만, 동시에 사용자가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기술이다.
1983년에 탄생한 인터넷의 전화번호부는 우리가 글을 읽는 이 순간에도 내 컴퓨터와 세상을 연결하고 있다.
최대한 신중하게 팩트 체크를 거쳤지만, 기술과 역사를 다루다 보니 놓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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