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컴퓨터가 대화하게 된
단 하나의 약속

TCP/IP

by TEUM Lab

1973년 봄, DARPA 소속 과학자인 빈트 서프(Vint Cerf)와 밥 칸(Bob Kahn) 앞에 놓인 문제는, 간단하면서도 거대했다—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컴퓨터들을 어떻게 대화시킬 것인가.


당시 컴퓨터 네트워크는 그야말로 바벨탑.

ARPANET은 ARPANET끼리만, 위성 네트워크는 위성 네트워크끼리만 연결되던 시절.

대학마다, 기관마다, 나라마다 제각각의 방식으로. 모두 다른 언어를 쓰는데 통역사는 없는 상황이었다.


서프와 칸은 생각했다. 언어를 하나로 통일하긴 어렵지만, 번역 규칙을 만드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탄생한 TCP/IP.

오래된 컴퓨터 유저라면 한 번쯤 들어봤는데, 어딘가 불친절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

Transmission Control Protocol과 Internet Protocol—복잡해 보여도 핵심은 단순하다.

데이터를 잘게 쪼개서 각 조각에 주소를 붙이고, 어떤 경로로든 목적지까지 보낸 다음, 도착하면 다시 조립하는 것.


편지를 예로 들자면, 긴 편지를 여러 장의 엽서로 나눈 뒤, 각 엽서에 번호와 주소를 적는다.

엽서들은 제각각 다른 길로, 어떤 건 비행기로 가고 어떤 건 배로, 또 어떤 건 트럭으로 여행하게 된다.

도착 순서야 뒤죽박죽일 수 있지만 번호가 있으니 다시 순서대로 맞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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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성이라는 철학

TCP/IP의 진짜 혁명은 기술보다 '어떤 네트워크도 차별하지 않는' 철학에 있다.

유선이든 무선이든, 빠르든 느리든, 미국이든 소련이든—규칙만 따르면 누구나 연결될 수 있었다.


'플래그 데이(Flag Day)'라 불리는 1983년 1월 1일은, 미국 국방부가 만든 최초의 컴퓨터 네트워크인 ARPANET에 연결된 모든 컴퓨터가 낡은 통신 규약인 NCP에서 TCP/IP로 일제히 전환하던 날.

전환하지 않은 컴퓨터는 네트워크 접속이 차단됐다. 꽤 강제적이긴 했지만 효과적이었고, 결국 6월까지 모든 컴퓨터가 전환을 마쳤다.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인터넷이 비로소 가능해진 순간이다.


모든 표준의 역사가 그렇듯, TCP/IP에게도 강력한 라이벌이 존재했다.

유럽의 OSI는 국제표준화기구(ISO)가 밀어준 '정석' 같은 모델이었는데, 네트워크 통신을 7개 층으로 나눠서 각 층의 역할을 완벽하게 정의하려 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OSI의 승리를 예상했다.


그런데 마치 VHS와 Beta 규격의 싸움과 같이 '성능적 열세'였던 TCP/IP가 이겼다.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작동했으니까.

OSI는 이론적으로 우아했지만 실제로 만들어 쓰기엔 너무 복잡했고, TCP/IP는 4개 층으로 단순하고 좀 불완전해도 일단 돌아갔다.


역사에서 늘 반복되듯, 가장 좋은 기술이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니다.

Arpanet_in_the_1970s.png 1970년대 미국의 네트워크 연결도 [출처: Semaforo GMS / CC BY-SA 4.0]



AI 시대의 새로운 바벨탑

2026년 오늘, 각 기업이 만든 AI 모델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데, 데이터 형식도 소통 방법도 제각각. 1970년대의 컴퓨터 네트워크와 닮은 꼴이다.


AI들을 연결하는 공통 프로토콜은 언제쯤 나올까?


앤트로픽이 MCP(Model Context Protocol)를 발표하면서 AI 모델이 외부 도구와 데이터에 접근하는 방식을 표준화하려 하고 있고, 구글은 A2A(Agent-to-Agent) 프로토콜을 공개해서 AI 에이전트들이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는 방식을 정의하려 한다.

1970년대에 TCP와 IP가 각자 역할을 나눴던 것처럼, AI 세계에서도 역할 분담이 시작된 셈이다.


바벨탑은 신의 벌로 무너졌다고 한다.

급속도로 AI가 발전하는 시대. AI와 AI사이의 공통 언어는, 신의 벌을 받아서 공든 탑이 무너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정해야 하는 중요한 약속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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