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AI들의 교과서 '위키피디아'

앎의 고통을 건너뛰고 얻은 지식에, 무게가 있을까?

by TEUM Lab

집집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책장에 꽂아놓던 시절이 있었다.

상당히 고가였지만, 자식 교육을 위해 혹은 멋진 장식품으로.

1768년에 처음 간행된 이 시리즈는 오랫동안 그야말로 백과사전의 대명사였다.


똑똑한 전문가들을 모아놓고, 논문 심사하듯 깐깐하게 검수해서, 틀릴 리 없는 글만 차곡차곡 공개하는 것.

인류 지식의 보고인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오랜 전통이었다.


인터넷이 빠르게 보급되던 2000년대 초반, 온라인 백과사전을 만들자고 마음먹은 사람들 역시 당연하게 이 방법을 답습했다. 그중 하나가 '누피디아(Nupedia)'.

하지만 1년이 지나도 완성된 글은 고작 21개. 브리태니커를 대체하기는커녕, 발매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 제안을 한다.

"위키(Wiki)란 방법을 써보는 건 어때?"


하와이어로 '빠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

호놀룰루 공항의 '위키 위키 셔틀'에도 남아 있는 그 말.

1995년, 워드 커닝햄(Ward Cunningham)이 만든 '위키'는 브라우저에서 편집 버튼만 누르면 누구나 바로 내용을 바꿀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wikipedia founders.jpg 위키피디아의 공동 창립자인 지미 웨일스(Jimmy Wales)와 래리 생어(Larry Sanger) [출처: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에, 그걸 넣는다고?

2001년 1월 15일, 만든 사람들도 반신반의하며 위키피디아(Wikipedia)가 문을 연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냉소했다.

백과사전이란 전문가들의 엄선된 지식이었지, 일반인들의 집단지성이 아니었다.

'위키'라는 개념 자체도 일반인들에게는 지나치게 생소했다.


우려했던 '반달리즘(Vandalism)'은 곧바로 튀어나왔다.

역사를 왜곡하는 문장, 유명인의 악의적인 사망설, 회사 홍보 문구. 보고 있으면 피곤해지는 것들.


그런데 신기한 현상이 발생했다.

낙서가 올라간 지 몇 분도 아니고, 몇십 초 만에 누군가가 슬쩍 들어와 지우고, 되돌리고, 출처를 붙이고, 말투를 다듬어 놓는 일이 계속 벌어진 것이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자원봉사자들(혹은 지식을 과시하고 싶은 일반인 전문가들)이, 말 그대로 전 세계의 업데이트 기록을 들여다보면서.


선의(善意)의 숫자가 악의보다 많을 것이라는 대담한 가정하에 실시된 사회 실험은 놀랍게도 성공적이었다.


위키피디아의 핵심 장치는 '중립적 관점(NPOV: Neutral Point of View)'이다.

"A는 옳다"라고 박아두지 않고, "A라는 주장이 있고, B라는 반론도 있다"라고 나란히 놓고, 거기에 출처를 달아둔다. 정치, 종교, 역사 문제처럼 불꽃이 튀는 주제에서는 '토론' 페이지가 거의 전쟁터가 된다.

다만 이상하게도, 그 전쟁의 잔해가 시간이 지나면 기사라는 형태로 정돈된다.

누군가의 확신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검증과 반박과 합의가 겹겹이 쌓인 결과로.


전문가 한 명이 만든 "완성된 정답"보다, 수많은 사람이 계속 만지작거리며 고친 "아직도 수정 중인 글"이 더 빠르고, 더 넓고, 때로는 더 정확해진다.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이제는 꽤 익숙해진 개념이지만, 이 개념을 대규모로 구현하고 증명한 것은 위키피디아가 최초일지도 모른다.

List_of_Wikipedia_articles_by_language_-_March_2024.svg.png 위키피디아에 등록된 언어별 문서갯수 (2024년) [출처: Arief Azazie Zain / CC0 1.0]



AI의 가정교사, 그리고 역설

2026년의 위키피디아는 묘한 자리에 서 있다.

왜냐하면 위키피디아를 읽고 자란 '아이들'이 세상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ChatGPT, 제미나이(Gemini), 클로드(Claude) 같은 AI들이 그 아이들이다.


AI가 이렇게까지 똑똑해진 이유는 수십 가지지만, 그중 하나는 '양 많고, 질 좋은 텍스트 데이터'.


의외로 학습에 쓸 만큼 정돈된 텍스트는 인터넷에 생각보다 적다.

광고, 스팸, SNS상의 잡담, 저작권으로 잠긴 콘텐츠. 전부 교과서로 쓰긴 부족하다.


그런 면에서 위키피디아는 최고의 교재였다.

300개가 넘는 언어, 완전히 무료, 목차로 정리된 구조, 그리고 무엇보다 출처. 로그인조차 필요 없었다.

만약 위키피디아가 없었다면, 지금의 AI 혁명은 몇 년쯤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문제는 그다음. AI가 확률론적인 계산을 통해 쏟아내는 "그럴듯한 정답"이 퍼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출처를 찾는 일을 귀찮아하고, 사실 확인을 미루며, 결국에는 "뭐 대충 맞겠지"라고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위키피디아가 지켜온 세계의 철칙, 그러니까 '근거와 출처를 명시하지 않으면 문장이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는 규칙은 점점 힘을 잃는다.



진실은 '과정'에 산다

'올바른 정보'란 뭘까?


검색창에 단어를 치고, 긴 글을 읽고, 행간을 따라가고, 출처 링크를 눌러보고, "이 말이 정말 맞나"를 확인하는 그 번거로운 여정. AI는 그걸 스킵해 준다. 너무나도 편리하다. 지나치게 친절하다.


그런데 여행을 하지 않은 여행자에게 풍경을 논할 권리가 있을까.

앎의 고통을 건너뛰고 얻은 지식에, 무게가 있을까.

정답이 너무 쉽게 오는 시대에 필요한 철학은 어쩌면 간단하다.

편리한 정답을 사랑하되, 그 정답이 만들어진 근거와 과정에는 끝까지 집요해지는 것.

주어진 지식에 자만하지 말고, 끊임없이 탐구하는 인간 본연의 자세를 잊지 말아야 할 것.


위키피디아는 우리를 '편집자'로 만들었다.

반면, AI는 우리를 '소비자'로 만들고 있다.


생각을 남에게, 혹은 기계에게만 맡기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손으로 진실을 엮어내기 위해.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구시대 방식대로 블로그에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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