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하면 사춘기가 정말 도망가나요?

by 자몽



이번 주에 가까운 곳에서 토너먼트가 있었다.

10학년(한국 고등학교 1학년)인 첫째는 차 트렁크에 노란색 배드민턴 가방과 학교 가방을 던져 넣고는, 종이 한 장을 가지고 조수석에 탔다. 미국의 고등학생은 스포츠를 하더라도 틈틈이 할 일을 해내야 하기에 외울 게 있나 보다 했다.


근데 그 하얀 종이 한 장은 전혀 엉뚱한 순간에 다시 등장했다.




아들의 첫 경기는 BS(남자 단식)이었다. 상대는 시드 2. 즉, 남자 싱글 선수 중에서 2등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건 이기기가 아주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 아들은 그 정도 실력은 아니니까.


배드민턴 토너먼트에서 '시드(Seed)'는 실력이 검증된 상위 랭커들이 대회 초반에 서로 맞붙어 탈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대진표상에 미리 배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가장 강한 선수들을 대진표 끝과 끝에 찢어놓는 것'이다. 랭킹 1위인 시드 1과, 랭킹 2위인 시드 2는 결승전에 갈 때까지 서로 만날 일이 없다.


첫 판은 역시나 밀렸다. 실수가 많았다. 점수가 한 점, 두 점 벌어졌다. 12:21로 첫 판을 내줬다. 2세트가 시작하기 전, 3분 정도의 숨 고르기 시간에 그 하얀 종이가 다시 등장했다. '대체 저건 뭐지? 경기 중간에 공부를 하진 않을 것 아닌가. 아이는 종이를 가방에 올려두고 쪼그리고 앉아 찬찬히 읽고 있었다. 큰 차이로 졌지만 아이는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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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트는 분위기가 다르게 흘러갔다. 아들의 공격이 먹히고, 상대의 실수가 이어졌다. 상대가 한 점을 내면, 아들이 한 점을 가져왔다. 경기는 막상막하였다. 상대의 날카로운 공격을 아들이 슬라이드를 해서 받아냈다. 네트 끝으로 간 셔틀콕은 아슬아슬하게 넘어가 하얀 선 안쪽에 들어갔다. IN! 아이는 악! 소리로 기합을 올렸다. 더 집중하기 위해서, 상대의 기를 꺾기 위해서, 자신의 에너지를 더 끌어올리기 위해서. 그렇게 두 번째 세트는 21:19로 이겼다.


세 번째 세트가 시작됐다. 당연히 이길 거라고 생각한 경기에서 1:1 상황이 되자 상대 아이가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들마다 성격이 다르겠지만, 상대 아이는 기분에 따른 기복이 있는 것 같았다. 세 번째 세트는 한쪽이 11점을 내면 코트 위치를 바꿔 경기를 이어간다. 먼저 11점을 낸 쪽은 아들이었다. 점수 차이가 벌어졌다. 이대로면 이길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8점 차이도 따라 잡히는 경기를 무수히 봤다. 따라 잡히는 쪽이 늘 불안한 법이다. 상대 아이가 다시 최대한 집중해서 실수를 하나도 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아들이 흔들린다면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 아이는 그대로 무너졌다. 시드 2 아이가 21:13의 큰 차이로 첫 판에 진 셈이다.


상대 아이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고, 초반에 탈락한 선수들끼리 다시 붙는 Consolation 경기에 불참했다.


토너먼트에 나오는 아이들은 대부분 많은 시간 운동에 시간을 쓰는 아이들이기에 Cons 경기도 쉽다고 할 수 없다. 변수가 많은 경기이기에 강한 아이가 초반에 떨어지기도 한다. 때문에 공식 기록엔 들어 기지 않지만 Cons 경기에서도 1등에게는 메달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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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그 종이의 정체가 궁금해서 아이에게 물어봤다. "아까 그 뭐 잔뜩 써놓은 종이는 어딨 어?" "버렸지."


대체 뭔데 그렇게 쉽게 버리지? 싶었는데, 그 종이가 아이의 배드민턴 가방에서 나왔다. 드디어 궁금했던 종이에 대해 내용을 보고 나는 많이 놀랐다. 이 종이는 상대 아이에 대한 전력 분석지이자 전략 가이드였던 거다.


상대의 약점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공격 스타일 : 공격은 빠르지만, 각도가 예리하지 않고 파워가 아주 강하진 않음.

백핸드 약점 : 백핸드 쪽으로 공을 보내면 공이 낮고 평평하게 오는 경향이 있으니 이 점을 이용.

습관 : 뒤쪽으로 공이 올 걸 잘 대비하는 편이라 역으로 네트 앞에서 속임수(fake net)를 쓸 것.

기타 : 수비가 좀 엉성하고, 반스매시에 약함.


게임 플랜도 쓰여있다.

빠른 클리어를 보내고 상대가 대응하면 스매시로 마무리하기.

네트 앞 싸움에서 이겨서 찬스를 만든 뒤 스매시로 끝내기.




아들은 이 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상대 아이의 비디오를 찾아 분석하고, 전략을 세우고, 경기 중간에 리마인드를 해서, 실제로 적용했다. 그게 먹혔고, 상대를 흔들었고, 상대의 실수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결국 이겼다. 나는 어려울 거라고, 질 거라고, 그래도 최선을 다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아니었던 거다. 이길 방법만 생각했던 거다.


미국에서 취미로(고작 EC 한 줄에 들어갈 테니) 배드민턴을 시키기에는 돈도 시간도 많이 든다. 정말 많이 든다. 나는 아이가 셋이고, 남편은 바쁘다. 돈을 떠나 내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적이다. 이게 맞나? 무수히 생각했다. 대학 생각도 해야 하는데, 아이를 계속 시키는 게 잘 가는 방향일까 수백 번 고민했다. 취미로만 하면 좋겠다고, 그 시간에 다른 걸 하면 좋겠다 싶었다. 아이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어 지금까지 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요즘 내가 하는 생각은 이거다. 스포츠는 무조건 좋다는 것. 아이가 끝까지 해내고, 무너지고, 스스로 이겨내는 경험이 이보다 극적일 수 있을까. 정신적으로도 강해질 수밖에 없고, 체력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데다가, 그 무섭다는 사춘기 시절에도 아이가 건강한 쪽으로 풀다 보니 힘들지 않게 지나가는 것 같다.


그러니 아이들 스포츠 꼭 시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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