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 메디나에 위치한 '예언자의 모스크'. 예언자 무함마드를 시초로 한 이슬람교는 세계 4대 종교 중 하나로, 기독교를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사람이 믿는 종교이다.
세계 4대 종교 중 하나인 이슬람교는 중동,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걸쳐 수많은 신자를 가진 거대 종교입니다. 4대 종교라고 불리는 다른 종교들에 비하면, 사실 이슬람교는 일종의 '후발주자'였습니다. 비교적 늦은 시기인 서기 7세기에 '예언자'로 불리는 무함마드와 함께 등장한 종교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슬람교는 마치 후발주자가 앞선 주자들을 따라잡기 위해 스퍼트를 내는 것처럼 아주 폭발적인 속도로 교세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오늘날 이슬람교의 중심으로 여겨지는 소위 '중동' 지역은 원래 비잔틴과 페르시아가 주도권을 다투던 지역이었지만 '성전'을 표방한 이슬람 전사들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죠. 이슬람 세력은 이미 약해져 있던 두 제국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탈라스 전투에서 당나라까지 무찌르면서 중앙아시아의 주류 종교로 발돋움하였습니다. 또한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로 진출한 이슬람 세력들은 이후 수백 년 동안 현재의 스페인, 포르투갈 지역을 다스리기도 했습니다. 지난 글에서 보았던 것처럼, 인도에서도 오랜 싸움 끝에 마침내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기도 하였죠. 사하라 사막 너머로도 진출하여, 서아프리카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죠.
이처럼 이슬람교는 '선발주자'들 못지 않게, 어떤 의미로는 더욱 더 빠르고 광범위한 확장에 성공하였습니다. 하지만 단지 영토만을 확장하고 말았다면, 이슬람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슬람 교도들은 영토와 신자를 확보하는 '물리적인 팽창'에만 신경을 기울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큰 번영을 일구었고, 사회적, 문화적으로도 당대 최고 수준의 성과를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중세의 '최대 선진국'으로까지 거듭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원형 구조와 수많은 운하가 인상적인 바그다드는 몽골의 훌라구에게 파괴되기 전에는 인구 200만 명의 세계 최대 도시였다고 한다.
오늘의 주제는 중세 이슬람 제국의 중심 바그다드입니다. 아바스 왕조의 5번째 칼리프 알 만수르는 티그리스 강 서쪽에 원형 도시를 조성하고, 그곳을 '마디나트 알 살람', 즉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바그다드는 이미 메소포타미아 문명 때부터 있었던 도시였지만,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최대의 대도시로 거듭났습니다.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와 학문을 배우러 멀리 유럽에서까지 유학생들이 찾아오던 배움의 도시였으며, 어느 누구든 무료로 의료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복지의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평화의 도시'에 걸맞은 곳이었죠. 바그다드는 어떻게 평화의 도시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슬람교가 등장한 지 3세기 후인 서기 10세기경, 아바스 왕조의 7번째 칼리프였던 알 마문은 어떤 인물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알 마문과 몇 가지 문답을 주고받은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금에 대해 충고해주는 인물이 있다면 그를 금처럼 대접해야 한다." 알 마문은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고대 철학자들의 저술을 아랍어로 번역하도록 지시했다고 합니다.
그의 꿈에 등장한 인물은 아리스토텔레스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이슬람 교도들에게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철학자이자 사상가였습니다. 비록 '이교도' 취급을 받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고대 그리스 철학은 당시 이슬람교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아바스 이전 왕조였던 우마이야 왕조부터 비잔틴으로부터 그리스의 철학, 과학 서적을 입수하여 아랍어로 번역해오고 있었기 때문이죠.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린 아바스 칼리프들 또한 마찬가지였고요. 하지만 알 마문은 이전의 이슬람 지도자들보다도 훨씬 더 적극적으로 번역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알 마문 본인부터가 천문학 등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었고, 무슬림들 사이의 내전으로 혼란스러워진 질서를 회복하는 데도 도움이 되리라 판단하였기 때문이었죠.
알 마문은 당시 아바스의 수도였던 바그다드의 한 도서관을 '베이트 알 히크마'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지혜의 전당'이라는 뜻이었죠. 그는 서적을 수입하고 번역하는 데 비용을 아끼지 않았고, 출신과 종교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인재들을 불러들여 번역 사업에 투입했습니다.
아랍인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인, 인도인 등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지혜의 전당에 고용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어는 물론 라틴어, 시리아어,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 등 다양한 언어로 된 수많은 서적들을 번역했죠. 번역가 대다수는 이슬람교도였겠지만, '이교도' 역시 많이 있었죠. 번역 대상이 된 분야도 여러 가지였습니다. 번역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자들의 책은 물론, 천문학이나 기하학, 지리학, 의학 등 다양한 학문 서적들을 모두 아랍어로 번역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업에 비판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이슬람적이지 않은 사상이나 논리 등이 이슬람의 사고방식에 해를 끼칠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많이 있었죠. 그들의 '보수적'인 생각도 잘못되었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슬람이 탄생하기 한참 전부터 뿌리 내리고 고도로 발전해왔던 외국 문물을 받아들임으로써 의도치 않은 '역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당시 이슬람 사회에서 주류를 차지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매우 개방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역효과'보다는 바깥 문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더 많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이슬람 율법을 있는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 역시, 외국 학문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학생들에게 가르치기까지 했습니다.
1962년 이라크에서 발행한 알 킨디 우표. 알 킨디는 지혜의 전당으로 대표되는 중세 이슬람의 학문적 분위기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진리가 어떤 기원으로부터 나왔건, 혹여 고대인이나 외국인들이 전한 것이라도 우리는 진리를 인정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아야 한다.
아랍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야쿠브 이븐 이스학 알 킨디(803?-873?)의 이 말이 당시 이슬람 학자들의 마음가짐을 잘 나타내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는 철학, 천문학, 약학, 화학, 수학 등은 물론 음악 이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저술을 남긴 뛰어난 학자였죠.
알 킨디는 스스로의 학문적 원칙을 크게 두 가지로 정의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고대인들이 말한 내용을 그대로 완전히 인용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고대인들이 충분하게 표현하지 않았던 것을 아랍어의 용례, (알 킨디 자신이 살았던)현재, 나의 능력에 맞추어서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 등 외국의 '선배' 학자들이 말한 것을 일단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부족한 부분을 당시 이슬람의 방식과 가치관, 학자의 역량 등에 맞추어 보완하는 것이 알 킨디의 지론이었던 것입니다.
어려운 내용이지만, 이러한 알 킨디의 주장은 오늘날의 입장에서 봐도 상당히 합리적인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슬람의 학문은 고대 그리스는 물론 비잔틴, 페르시아, 인도, 그리고 중국 등 주변 나라들에 비하면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좋은 것이라면 그게 어떤 것이든 가리지 않고 '꼭꼭 잘 씹어서 소화'한 결과 무럭무럭 성장하게 되었죠. 알 마문이 만든 '지혜의 전당'은 이슬람 학문의 '성장기'를 상징하는 곳이었습니다.
이처럼 '잘 먹고 잘 자라난' 이슬람의 학문은 지혜의 전당뿐만 아니라, 바그다드 전체를 '지혜의 도시'로 만들어 나갔습니다. 또한 외국으로까지 퍼져 나갔죠. 그리스 서적의 입수 경로였던 비잔틴은 물론, 후일 십자군 전쟁으로 크게 다투게 되는 서유럽 역시 이슬람의 학문적 성과를 많이 받아들였습니다. 예를 들어,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은 이슬람 수학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연구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슬람 수학자들은 기하학원론을 공부하며 더 많은 해법과 공식을 찾아냈고, 그것을 반영한 개정본을 여러 차례 발간했습니다. 이슬람 수학자들의 성과는 다시 유럽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유럽인 수학자들에 의해 한 차례 더 발전하여 오늘날에 이르렀죠.
불행하게도, 세계 학문의 요람이었던 바그다드와 지혜의 전당은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몰락하였습니다. 몽골인들은 바그다드 사람들을 학살하고 바그다드에 보관된 수많은 책들을 강에 내다 버렸습니다. 처음에는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피로 강이 붉게 물들었고, 다음에는 책에서 배어나온 잉크 색깔로 인해 강이 검게 물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유산은 계속해서 명맥을 유지하며 더 넓은 범위로 퍼져나갔고, 더 오랜 시간 동안 존속해 왔습니다.
세종대왕 때 편찬된 달력인 칠정산은 원나라의 수시력을 다룬 '내편'과 회회력을 다룬 '외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회회'는 무슬림을 이르는 표현이다.
세종대왕이 우리 문화와 학문에 미친 영향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훈민정음과 자격루, 그리고 집현전 등으로 대표되는 세종대왕의 업적들 역시 맨땅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령 『농사직설』의 경우,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선진 농법과 조선에서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온 산 증인이자 농사 '전문가'였던 조선 농부들의 경험을 더한 결과물이었죠. 세종 시대에 꽃핀 조선 문화의 밑거름은 이처럼 주로 이웃나라인 중국, 그리고 한반도에서 대대로 전해지던 지식들이었지만 다른 것들도 있었습니다. 이슬람의 과학 지식 역시 그 중 하나였죠.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달력이었습니다. 세종 때 편찬된 달력인 『칠정산』은 크게 내편과 외편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외편'은 '회회력'을 연구 및 해설한 것이었습니다. '회회'는 우리나라에서 무슬림을 부르는 말이었으니, 여기서의 '회회력'은 바로 이슬람 달력을 말하는 것이었죠.
이슬람 학자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인 분야가 바로 천문학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정해진 시각마다 이슬람의 성지 메카를 향해 예배를 드리는 '키블라'를 행하려면, 지구 어디에 있든 메카의 방향, 그리고 현재 시각을 알아야 했기 때문이죠. 당장 옆에 있는 핸드폰 화면을 키기만 해도 지금이 몇 시이고, GPS만 작동시켜도 내 위치를 알 수 있는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해와 달, 별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때문에 이슬람 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들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천문학을 중시하고 연구해 왔지만, 이슬람의 천문학은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죠. 아이러니하게도, 이슬람의 학문은 이슬람을 파괴한 장본인인 몽골 제국을 통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까지 수입되었습니다. 동서양을 하나로 묶어버린 몽골 제국을 징검다리 삼아서 넘어온 이슬람 학문은 중국의 학문과 결합했고, 그것이 조선의 학문으로 재탄생한 것이었죠. 이슬람 학문이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 등의 학문을 밑거름으로 삼아 피어난 것처럼 조선의 학문은 이슬람 학문을 바탕 삼아서 만들어졌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알 콰리즈미가 저술한 대수학 서적의 일부. 그의 이름은 '알고리즘'의 어원이 된다.
이슬람의 태동을 일으킨 아랍 전사들보다도 더 빠르게 드넓은 공간으로 확장되었던 이슬람의 학문은 시간적으로도 확장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슬람 학자들의 유산이 오늘날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단어에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죠.
'알코올', '알칼리', '알고리즘'. 다 많이 들어보신 단어일 것입니다. 이 단어들은 하나같이 '알'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전부 아랍어의 흔적입니다. 앞서 몇 차례 언급하였던, 아바스의 칼리프들인 알 만수르와 알 마문의 이름에도 '알'이 들어가 있고, 철학자 알 킨디의 이름도 마찬가지죠. 아랍어의 '알'은 영어 정관사 'the'에 해당하는 말로 수많은 단어에 사용된다고 합니다. '알코올'은 휘안석을 갈아 만든 눈 화장품을 뜻하는 아랍어 '코흘'에 '알'이 붙은 것이고, '알칼리'는 타고 남은 재를 뜻하는 아랍어 'القلوي'에서 유래했다고 하죠. 그리고 '알고리즘'은 지혜의 전당에서 활동했던 수학자 '알 콰리즈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덧셈과 뺄셈, 곱셈, 나눗셈을 최초로 도입하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겨 '대수학(algebra, 이것 역시 아랍어 'al-jabr'에서 유래하였습니다)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인물이죠.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중세 이슬람 사회를 일컬어 흔히 '이슬람의 황금기'라고 표현합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절부터 경제적으로도 번영했던 지역이었고, 군사적으로도 비잔틴과 페르시아라는 양대 제국을 위협할 정도로 강성했으며, 무엇보다도 학문과 문화에서 이토록 많은 유산을 남겼던 시기에 걸맞은 이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비록 지금은 지구의 화약고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온갖 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위험 지역이 되면서 '평화의 도시'라는 별칭과는 동떨어지게 되었지만, 바그다드에서 이루어졌던 인류 문명의 발전을 알고 나니 이곳이 다시 보이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