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현 수도 바르샤바에 소재한 바르샤바 궁. 파괴와 복원으로 점철된 바르샤바의 역사는 폴란드 역사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폴란드가 우리나라의 무기를 구매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우크라이나와 이웃하고 있으며 러시아와도 국경을 맞댄 폴란드의 위기감 역시 고조되어서였겠죠. 어쩌면 이로 인해 유럽 나라들 중에서는 비교적 생소한 편이었던 폴란드의 인지도가 올라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역시 듭니다.
폴란드는 국토의 90% 가량이 평지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때문에 평화로울 때는 동서 문화의 통로가 되었지만, 혼란스러울 때는 전 국토가 외적의 침입으로 쑥대밭이 되며 큰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서쪽으로는 독일, 동쪽으로는 러시아라는 강대국과 이웃하고 있고 그밖에도 오스트리아나 스웨덴, 헝가리 등 여러 나라들과 부대끼며 다사다난한 역사를 겪어 왔습니다. 폴란드 출신의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말했듯, 폴란드의 역사는 우리나라 역사와도 참 닮아 있죠. 이번 글들에서는 중세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폴란드가 겪어 왔던 부흥과 수난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몽골군과 폴란드 공국들 사이에 벌어진 레그니차 전투(1241) 기록화. 폴란드는 이 전투에서 군주를 잃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슬라브족의 일파인 폴란드인들은 대략 9세기 경부터 역사에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폴란드의 첫 번째 국왕인 미에슈코 1세가 로마로부터 가톨릭을 받아들이면서 기독교 세계의 일원으로 첫 발을 내딛었죠. 하지만 그것이 평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웃인 독일, 보헤미아(현재의 체코) 등과 수없이 갈등하고 여러 차례 전쟁을 벌이기도 했죠. 형제들 간에 왕위와 영토를 두고 다툼을 빚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동쪽에서는 더 큰 위협이 있었죠. 키예프 루스 등의 루스 공국들(현재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을 무너뜨린 몽골의 군대가 진군해온 것입니다. 당시 폴란드를 다스렸던 '경건고공' 헨리크 2세는 용감하게 몽골군에 맞섰지만, 레그니차 전투에서 대패하고 자신 역시 몽골군에게 목숨을 잃었죠.
재앙과도 같았던 몽골의 군대가 한바탕 유럽을 휩쓴 뒤에도 폴란드인들은 꿋꿋이 버텨 나갔습니다. 몽골의 침입 이후 전 유럽을 물들인 흑사병의 공포에서 폴란드는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죠. 이는 전염병의 특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던 당시 폴란드의 왕 카지미에시 3세 덕이었습니다. 그는 도시와 도시마다 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전염병을 전파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흑사병이 퍼진 도시를 격리 조치하는 등 최선의 조치를 취했죠. 전염병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당시는 물론, 오늘날을 기준으로 보아도 선구적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그의 혜안은 폴란드 백성들의 희생을 크게 줄였습니다. 농민들의 삶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여 '농민왕'이라는 별명도 있었던 카지미에시 3세는 오늘날에도 폴란드인들에게 '대왕'이라는 뜻의 '비엘키'로 불리며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야드비가의 외조부 카지미에시 3세(좌)와 아버지 러요시 1세(우)는 모두 백성들에게 '대왕'이라 불릴 정도의 명군이었지만,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카지미에시 대왕은 이처럼 폴란드 백성들을 흑사병으로부터 지켜내고 폴란드의 혼란을 수습했으며, 영토를 넓히는 등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한 가지 고민이 있었죠. 바로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사위였던 헝가리의 왕 러요시 1세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숨을 거뒀습니다. 러요시 1세는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던 동방의 강대국 오스만의 침공을 물리치고 유럽 각지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큰 활약을 했고, 장인처럼 '대왕'으로 불리기도 했죠.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역시 아들을 남기지 못한 채 1382년 갑자기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당시 10살 무렵이었던 막내딸 야드비가(1373 또는 1374-1399)가 아버지의 임종을 곁에서 지켰습니다.
러요시 1세에게는 딸이 셋 있었습니다. 그중 첫째였던 카탈린은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기 때문에, 둘째였던 마리어가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를 물려받았습니다. 본래는 폴란드 역시 마리어에게 넘어갔어야 했지만 무산되었습니다. 폴란드의 귀족들이 마리어의 남편이었던 지기스문트를 싫어했기 때문이었죠. 폴란드 귀족들은 "러요시 국왕의 따님이 폴란드에 거주하셔야만 충성할 것이다"라면서 저항했습니다. 귀족들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던 러요시 1세의 왕비 엘즈비에타는 결국 계획을 바꾸어 막내 야드비가를 폴란드로 보냈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지 2년 뒤인 1384년의 일이었죠.
야드비가의 원 약혼자였던 오스트리아의 빌헬름은 폴란드 귀족들에 의해 쫓겨났다. 야드비가가 도끼로 문을 부수고서라도 그를 따라가려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얀 마테이코 作
그리하여 야드비가는 아버지를 잃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자신의 고향 헝가리와 가족 곁을 떠났습니다.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에 한참 떨어진 이웃나라 왕관을 쓰게 되었죠.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폴란드의 귀족과 주교들 사이에 둘러싸인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아마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폴란드 귀족들은 야드비가의 결혼에도 제동을 걸었습니다. 야드비가의 약혼자는 오스트리아 공작 빌헬름이었습니다. 야드비가가 5살 무렵일 때부터 이미 정해진 결혼이었죠. 하지만 폴란드 귀족들은 오스트리아가 폴란드에 간섭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빌헬름과의 약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습니다. 빌헬름은 야드비가와 결혼하기 위해 당시 폴란드의 수도였던 크라쿠프까지 찾아왔지만, 귀족들에게 문전박대당하고 쫓겨나다시피 돌아가야 했죠. 일설에 따르면 야드비가는 빌헬름을 따라가서 만나려고 했고, 귀족들이 문을 막아버리자 '도끼를 가져와 이 문을 열어라'고 명령하기까지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빌헬름을 쫓아낸 폴란드 귀족들은 다른 남자를 찾아왔습니다. 폴란드의 동쪽, 막 강대국으로 발돋움했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공작 요가일라(1352 또는 1362-1434)라는 사람이었죠. 그는 야드비가는 물론, 야드비가의 원래 약혼자였던 빌헬름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습니다. 물론 애정보다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결혼에서 남녀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경우야 일상다반사지만, 요가일라의 경우는 또 다른 문제도 있었죠. 그가 기독교도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당시 리투아니아는 가톨릭도, 심지어 동방 정교도 믿지 않은 채 자신들의 발트 토착 신앙을 고수하던 '이교도'였습니다. 야드비가가 요가일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는 없겠지만, 야드비가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요가일라는 자신은 물론 리투아니아 전체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리투아니아를 폴란드와 하나로 합친다는 조건으로 야드비가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야드비가의 나이 12살 무렵이었습니다.
리투아니아 대공 알기르다스의 아들 요가일라는 야드비가와 혼인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며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로 불리게 되었다. 얀 마테이코 作
요가일라는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브와디스와프'라는 이름을 새로 받았습니다. 이전의 폴란드 왕들 역시 많이 사용했던 이름이었죠. 그의 이름 '요가일라'를 폴란드식으로 부르면 '야기에우워'였기 때문에, 그는 그때 이후로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헝가리에서 와 이제 막 폴란드어를 배우던 중이었을 야드비가와 평생 리투아니아에서 살다가 넘어온 야기에우워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폴란드를 공동으로 다스렸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남의 나라로 넘어와서, 귀족과 주교들의 입김 아래서 혼인조차 뜻대로 하지 못했던 어린 공주는 어느새 어엿한 지도자가 되어 있었죠.
외할아버지인 '농민왕' 카지미에시 대왕의 마음가짐을 이어받기라도 한 것인지, 야드비가는 특히 가난한 백성들에게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합니다. 왕실의 행차를 준비하느라 큰 부담을 짊어진 소작농들의 손해를 헤아리며 배려해주도록 남편을 설득한 일화가 전해진다고 하네요. 자신에게 맞서는 귀족들도 하나하나 복속시켜 나갔습니다. 비록 대부분의 폴란드 귀족들이 충성을 맹세했지만, 여전히 '헝가리에서 넘어온 어린 공주'와 '리투아니아 이교도'의 신하가 되길 원하지 않은 귀족들도 있었죠. 하지만 야드비가는 평생을 정치판과 전쟁통에서 살아 온 남편 못지 않은 수완을 발휘하여 폴란드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러 온 귀족들에게 자신뿐만 아니라 남편에게도 똑같이 충성할 것을 맹세하도록 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죠.
야드비가와 야기에우워 부부의 앞길을 막는 적들은 외부에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야드비가의 원 약혼자 빌헬름이었죠. 야기에우워를 싫어하던 한 폴란드 귀족이 야드비가와 빌헬름이 파혼 후에도 밀회를 가졌다는 소문을 퍼뜨리자 교황이 진상 조사를 명령하였습니다. 하지만 야드비가가 자신이 결코 그러지 않았음을 엄숙히 맹세하고, 그 귀족이 거짓 소문을 낸 것을 실토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였죠. 야드비가는 그 귀족에게 아무런 보복도 가하지 않았고, 이후 그는 계속해서 야드비가 부부의 신하로 있으면서 충성했다고 전해집니다.
야드비가의 형부인 지기스문트, 그리고 야기에우워의 사촌인 비타우타스도 부부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지배를 위협하는 경쟁자였습니다. 지기스문트는 현재의 독일 동부 지역을 거점으로 하고 있던 강력한 튜턴 기사단과 힘을 합쳐 계속 폴란드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비타우타스 역시 사촌으로부터 리투아니아를 빼앗기 위해 튜턴 기사단과 힘을 합쳤죠. 부부는 친인척들의 위협에도 현명하게 대처해 나갔습니다. 특히 야드비가는 매우 노련하면서도 공정하고 현명한 중재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합니다.
리투아니아의 비타우타스(좌)와 헝가리의 지기스문트(우)는 야드비가 부부와 오랜 기간 대립했던 라이벌들이었다.
지기스문트는 한참 전부터 폴란드 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죠. 한편 야드비가 역시 아버지 러요시 대왕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헝가리에 대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언니 마리어가 1395년 말을 타다가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야드비가는 헝가리의 대왕 러요시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이죠. 실제로 야기에우워가 이를 노리고 폴란드와 헝가리의 국경에 군대를 보냈고 지기스문트도 이에 대항하긴 했지만, 여러 사람들이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중재에 나섰습니다. 야드비가는 전쟁 대신 실리를 선택했습니다. '헝가리의 상속자'라는 칭호를 챙기면서 위신을 세우고,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는 불확실하지만 피해가 클 것은 명백했던 헝가리와의 전쟁은 막은 것이죠. 지기스문트 역시 전쟁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오스만의 위협이 너무나도 강대했고, 헝가리의 귀족들 역시 '오스만의 위협을 내버려둔다면 결코 지지하지 않겠다'며 견제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폴란드와 헝가리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편 야기에우워의 사촌 비타우타스와의 대립은 한층 더 치열했습니다. 비타우타스의 아버지 켕스투티스가 리투아니아의 대공 자리를 두고 야기에우워와 다투다가 패배해 목숨을 잃었지만, 비타우타스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죠. '이교도' 리투아니아를 개종시킨다는 명분으로 오래 전부터 리투아니아를 침략해 오던 튜턴 기사단 역시 사촌 간의 내분을 기회로 여겼죠. 하지만 야드비가는 평화를 추구했습니다. 그는 비타우타스, 그리고 튜턴 기사단과 끊임없이 협상을 가지며 설득하려고 노력했죠. 야기에우워는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하나가 되기로 한 조약을 밀어붙여서 리투아니아의 여러 지역들을 아내의 직할령으로 만들려고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그 '조약'은 야기에우워가 비타우타스 등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맺은 조약이었기에 리투아니아 내에서도 반대가 심했죠. 튜턴 기사단 역시 이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야드비가는 그것을 거절했고, 야기에우워도 아내의 뜻에 따랐죠. 두 사람은 이미 화해했던 지기스문트의 도움을 받아,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 도시 프라하(현 체코의 수도)에 리투아니아인들을 위한 대학을 세우는 프로젝트를 기획했습니다. 리투아니아인들을 회유하려는 목적이었죠. 야드비가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몇날 며칠을 잠도 못자고 매진할 정도로 정성을 들였다고 합니다. 비타우타스는 야기에우워의 요구는 물론 야드비가의 요구에도 반감을 가지고 오래 다투었지만, 결국 싸움을 멈추고 화해했습니다. 비타우타스는 야기에우워와 야드비가를 폴란드, 그리고 리투아니아의 왕으로 인정하였고, 대신 리투아니아의 총독 자리를 차지하여 실질적인 지배권을 얻는 조건이었죠.
폴란드 왕국의 수도 크라쿠프는 폴란드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도시였다. 사진은 세계 최초의 쇼핑몰로 알려진 '직물 회관'으로, 폴란드어로는 '수키엔니체'라고 부른다.
이처럼 외부와의 갈등을 매듭지은 야드비가는 폴란드를 가꾸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폴란드 전역에 병원과 교회, 학교 등을 세우고 노약자를 비롯한 백성들의 복지를 돌보았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찬송가를 부를 때 외국어가 아닌 폴란드어 사용을 장려하여 폴란드인들의 정체성을 뿌리내리는 데 힘썼죠. 외할아버지 카지미에시 대왕 때 건립되었지만 혼란으로 제 기능을 못하던 크라쿠프 대학을 재건하는 계획을 세웠고, 폴란드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교도이면서 모국어 헝가리어는 물론 라틴어, 독일어 등 여러 언어에 뛰어나고 교양과 지성 역시 뛰어났던 야드비가의 노력에 힘입어, 폴란드 국민들은 점차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야드비가는 항상 백성들을 위해 고민했던 현명한 지도자였고 늘 최선의 방책을 추구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야드비가조차도 외할아버지와 친아버지와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슬하에 자녀가 없었던 것이죠. 이로 인해 남편과도 한때 갈등을 빚었을 만큼, 야드비가의 후사 문제는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랬기에 야드비가가 마침내 임신을 하게 되자 모두들 기뻐했습니다. 남편은 물론, 오랫동안 대립하던 리투아니아의 비타우타스 역시 은으로 만든 요람을 비롯한 각종 값비싼 선물들을 보내며 임신을 축하했죠. 1399년 6월 13일, 야드비가는 마침내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들일 것이라는 점괘와는 달리 딸이었죠. 비록 아들은 아니었지만, 야드비가는 아직 젊었고 남편과 폴란드 역시 건재했으니 이것만 보았을 때는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야드비가는 딸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의 시신은 크라쿠프 바벨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하지만 그때 불행이 닥치고 말았죠. 교황 보니파시오 9세가 아이의 대부가 되어 주면서 '엘즈비에타 보니파시아'라는 어엿한 이름까지 짓고 축복을 기원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된 것입니다. 예정보다 빨리 출생한 것이 원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극정성으로 돌보았지만, 결국 엘즈비에타는 태어난 지 겨우 3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그리고 상심에 빠진 야드비가 역시 몸져 눕고 말았습니다. 야드비가는 자신이 죽을 것을 직감했지만, 죽기 직전까지도 폴란드와 남편을 먼저 챙겼습니다. 그는 남편 야기에우워에게 카지미에시 대왕의 손녀와 재혼하라고 말하고는 눈을 감았습니다. 딸이 죽은 지 겨우 나흘 만인 1399년 6월 17일이었습니다.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였죠.
야드비가의 죽음은 남편 야기에우워에게 상심도 안겨 주었지만, 동시에 정치적으로도 위기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가 폴란드를 통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아닌 폴란드의 적법한 상속자였던 야드비가의 남편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는 아내가 죽고 나서 폴란드를 떠나 리투아니아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폴란드의 귀족들은 그를 붙잡고 계속 폴란드의 국왕으로서 통치해달라고 요청했죠. 결국 그는 이를 받아들였고, 폴란드를 단독으로 통치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딴 '야기에우워 왕조'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야드비가의 유언에 따라 카지미에시 대왕의 손녀와 재혼하면서 폴란드 왕으로서의 정당성까지 손에 넣은 그는 아내처럼 폴란드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습니다.
카지미에시 대왕이 세우고 야드비가가 일으킨 야기엘론스키 대학은 코페르니쿠스 등 세계적인 인재를 배출하며 이름을 떨쳤다. 사진은 도서관 건물.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왕은 야드비가가 못다한 일을 이어받아 진행하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크라쿠프 대학의 재건 계획이었죠. 야드비가는 대학 근처 집들을 구입하거나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보석을 기부하여 대학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지만 이를 다 끝내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습니다. 야기에우워는 아내의 유지를 이어받아 '야기엘론스키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다시 열었습니다. 이후 야기엘론스키 대학은 유럽의 명문 대학으로 부상하며 많은 인재들을 육성했죠. 지동설을 처음 주창했던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오스만에 맞서 유럽을 수호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 폴란드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이름을 알린 위대한 인물들이 이 대학에서 공부하였습니다.
야기에우워 왕조는 이후 폴란드의 부흥을 이끌었습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오랜 숙적이었던 튜턴 기사단을 그룬발트 전투(폴란드어 명칭. 리투아니아어로는 '잘기리스 전투', 독일어로는 '탄넨부르크 전투'라고 합니다. 이전 브런치 글에서도 다룬 적 있었죠)에서 무찔렀습니다. 튜턴 기사단은 다시는 이전의 위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폴란드 국왕의 봉신으로 전락했다가 아예 세속화를 선언하며 해체되었습니다. 튜턴 기사단을 무찌른 후에도 양측의 잡음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야기에우워 왕조를 구심점 삼아 점차 뭉쳤죠. 그리고 1569년 루블린 조약을 통해, 두 나라는 정식으로 하나의 나라로 통합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로 거듭났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통합 직후인 17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유럽의 최강국으로까지 성장하게 되었죠.
크라쿠프의 바벨 대성당은 세 개의 탑이 인상적이다. 야드비가와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카지미에시 대왕 등 폴란드의 많은 왕들이 잠든 안식처이기도 하다.
야드비가의 개인사는 불우했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가족들과도 생이별한 뒤 한참 떨어진 이웃나라의 구중궁궐로 와야만 하는 처지였으니 말이죠. 게다가 가족들 역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첫째 언니는 어릴 때 병으로 사망했으며, 어머니는 정적들의 기습을 받아 붙잡혔다가 살해당했고, 둘째 언니는 갑작스런 낙마 사고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드비가는 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했고, 백성들을 돌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기세등등한 적들과의 다툼을 피해 협상으로 평화를 이끌어내려는 자세나, 약자들을 보살피고 쇠퇴한 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는 모습에서 이러한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비록 남편인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리투아니아의 비타우타스 대공처럼 전장에서 적들을 무찌르고 영토를 크게 확장한 '영웅'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야드비가의 이러한 헌신은 폴란드-리투아니아라는 유럽의 최강대국이 탄생하는 뿌리가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인재들의 요람이 되었던 야기엘론스키 대학의 수립에 얽힌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중세~근대를 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야드비가의 유산은 계속 폴란드에 이어졌던 셈이죠.
이러한 야드비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7년 8월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는 크라쿠프에서 야드비가를 성인으로 시성하였습니다. 야드비가가 평생을 돌보았던, 그리고 야드비가가 죽은 후에는 그의 관을 돌보고 있는 도시 크라쿠프의 바벨 대성당에서는 매년 7월 17일을 야드비가의 축일로 삼아 지금까지도 야드비가를 기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