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영광과 수난의 역사

2편 - 폴란드의 구원자, 기독교의 방패, 그리고 아인슈페너의 시초(?)

by 서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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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의 한 카페(좌)와 아인슈페너(우). 역사와 음악, 문화의 도시 빈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카페의 도시'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관광 명소입니다. 그리고 오랜 역사와 문화를 지닌 도시이기도 하죠. 뭐니뭐니해도 빈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역시 음악일 것입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 등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의 활동 무대였고, 지금도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 등으로 유명하니 말이죠.


하지만 빈은 커피로도 유명한 도시이기도 합니다. 커피 사랑이 각별하기로 이름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인기 있는 '아인슈페너' 역시 이곳 빈에서 만들어진 커피입니다. 빈의 별칭인 '비엔나'를 딴 '비엔나 커피'로도 잘 알려진 이 커피는 독일어로 '말 한 마리가 끄는 마차'라는 뜻으로, 마차를 모느라 한 손으로는 늘 고삐를 잡고 있어야 했던 마부들이 즐겨 마셨다고 하네요. 지금도 빈에 가면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카페하우스들이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고 합니다.


분명 글의 주제는 폴란드일 텐데, 왜 글머리부터 다른 나라 수도가 등장하는지 의아해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 답은 빈에 커피콩이 전래된 계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유럽인들이 빈을 침공해온 오스만 제국 군대를 몰아낸 뒤, 그들이 버리고 간 커피콩을 입수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외에도 몇 가지 설이 전해지지만,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외교관이자 첩자로 활약했던 쿨치스키라는 사람이 전쟁 이후 빈에 카페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도 빈의 카페들에서는 그를 기리는 축제를 연다고 하니 말이죠.


그렇다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어쩌다가 빈에서 오스만 제국과 싸우게 된 것이었을까요? 이번 글의 주인공은 당시 유럽의 가장 큰 위협이었던 오스만 제국에 맞선 방패,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그 왕 '얀 3세 소비에스키'입니다.


Chorągiew_królewska_króla_Zygmunta_III_Wazy.svg.png 1587~1668년 사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통치한 '바사 왕가'의 깃발. 폴란드의 상징인 독수리와 리투아니아의 상징인 기사가 함께 그려져 있다.


야드비가, 그리고 후일 브와디스와프 야기에우워로 개명하는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의 혼인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한 지붕 아래 사는 식구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똑같은 임금만을 모시고 나라는 다른 한 지붕 두 살림이었지만 이후에는 아예 하나로 합쳐졌죠. 그러면서 붙은 이름이 바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었습니다.


처음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다스린 것은 브와디스와프 야기에우워의 후손들, 즉 '야기에우워 왕가'의 국왕들이었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강대국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튜튼 기사단, 러시아, 스웨덴 등 이웃 나라들과의 전쟁에서도 여러 차례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죠. 이후에는 헝가리 등 이웃나라들에도 브와디스와프 왕가 인물들이 국왕으로 추대되기도 했습니다.


Denkmal_bohdan_chmelnyzkyj.jpg 키이우에 있는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동상. 그가 일으킨 카자크 봉기는 폴란드 몰락의 단초가 되었다. 키이우에서는 카자크 봉기를 기념하는 행사가 치러진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라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광 역시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뒤흔들었습니다. 1648년 카자크인 영주였던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일으킨 봉기가 대표적이었죠. 연방의 귀족들에게 맞서 일어난 카자크인들의 항쟁은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동부 지역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이곳은 현재의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우크라이나 지역 소작농들은 물론 유목민인 타타르족까지 합세하여 1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외부적으로도 위기가 닥쳐왔죠. 특히 숙적 스웨덴과 러시아의 침공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들은 흐멜니츠키 봉기로 폴란드-리투아니아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연방은 패전을 거듭했고, 절반이 넘는 영토와 3분의 1에 달하는 인구를 상실한 채 몰락했습니다.


Schultz_John_III_Sobieski.jpg 루테니아(현재의 벨라루스 및 그 인근 지역) 귀족인 소비에스키 가문의 얀 3세는 젊어서부터 외교관 겸 장교로 활약한 결과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다니엘 슐츠 作


후대에 '대홍수'라고 불리게 되는 이 국가적 위기로부터 연방을 구해낸 왕이 바로 얀 3세 소비에스키(1629-1696)였습니다. 이름 있는 귀족 집안이었던 그는 야기엘론스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방문하고 유명 인사들과 교류를 다지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죠. 그러던 그는 앞서 소개했던 흐멜니츠키의 봉기와 국왕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함께 유학을 다니던 형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형과 함께 기병대를 이끌고 적들과 맞서 싸웠지만, 형이 타타르족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고 자신 역시 그들의 인질이 되기를 자청해야만 하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이후에는 오스만 제국으로 파견되어 외교관 노릇을 하기도 했죠. 이때의 경험은 소비에스키 개인은 물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게도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소비에스키는 타타르와 오스만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의 문화를 가까이서 접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후일 연방과 타타르족이 동맹을 맺는 데 기여했습니다. 동맹을 맺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타타르 군인들을 지휘하며 전투를 벌이기도 했죠. 카자크인들과의 협상과 조약 체결에도 외교관으로서 참여하는 등, 전투와 외교를 가리지 않는 그의 활약에 힘입어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대홍수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실권을 잡고 있던 이들은 '슐라흐타'라고 불리는 대 귀족들, 그리고 귀족들의 의회인 '세임'이었습니다. 소비에스키는 다방면에서 활약하면서 유능한 외교관이자 지휘관, 그리고 국가에 헌신하는 충신으로서 대 귀족들에게 눈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674년 5월 19일,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이 되었습니다. 왕족이 아니었던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세임의 투표로 국왕을 선출하는 연방의 시스템 덕이기도 했지만, 오랜 기간 다방면에서 활약해온 그의 공헌이 더 큰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Hagia_Sophia_Mars_2013.jpg 이스탄불의 랜드마크 아야 소피아 그랜드 모스크. 동방 정교회의 대성당이었던 이 건물이 이슬람 모스크로 바뀐 것은 '로마 제국'의 소멸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오랜 전쟁으로 황폐해지고 옛날의 영광과 위세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나라의 왕이 되었지만, 소비에스키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즉위 전과 마찬가지로, 그가 가장 힘을 쏟은 것은 바로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사방이 적이었습니다. 연방을 멸망의 기로로 몰아붙인 스웨덴과 러시아는 물론이거니와, 과거 야기에우워 왕가에게 패망하며 사라진 튜튼 기사단의 후신이자 현재 독일의 전신이 되는 프러시아 등이 있었죠. 소비에스키는 군대의 혁신을 통해 오래 전 강군으로 이름을 떨치던 연방 군대를 복원하려고 했습니다. 최신 무기였던 화승총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여 병사들을 무장시키고, 연방의 자랑이었던 기병 역시 더욱 보강했죠.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위세를 떨치던 나라는 이슬람 세계의 오스만 제국이었습니다. 현 튀르키예 영토인 아나톨리아의 조그만 부족에서 시작했던 이들은 어느새 전 세계를 호령하는 최강대국이 되어 있었죠. 서로마가 망한 후에도 1000년 가까운 세월을 존속했던 비잔티움(동로마)조차도 오스만이 불러 온 파란에서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1453년 비잔티움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에게 완전히 무너졌고, 오스만 제국은 아예 그곳으로 수도를 옮긴 뒤 스스로를 로마 황제로 격상시켰습니다. 물론 기독교 세계에서는 이 '로마 황제'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지만, 자신들도 비잔티움의 뒤를 따르지 않을까 전전긍긍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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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에우워 왕가의 브와디스와프 3세(좌)와 러요시 2세(우)는 모두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사망했다. 오스만은 헝가리와 발칸반도를 정복하며 유럽의 공포로 자리매김하였다.


실제로 오스만은 비잔티움 정복에만 만족하지 않고, 전 유럽을 정복할 기세로 뻗어 나갔습니다. 이미 헝가리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오스만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졌죠.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가 역시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소비에스키의 시대 200여 년 전인 1444년, 폴란드와 헝가리의 국왕이자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의 아들인 브와디스와프 3세가 직접 출정하여 바르나(현 불가리아)에서 오스만과 싸웠지만 무력하게 패배하고 전사하기도 했죠. 그로부터 80여 년 뒤인 1526년에도 야기에우워 왕가 출신의 헝가리 국왕 러요시 2세가 모하치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참패하고, 자신도 후퇴하다가 강에 빠져 죽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동유럽의 강국이었던 헝가리를 완전히 멸망시켜버리면서, 유럽인들의 공포는 점차 현실로 다가오는 듯 보였습니다. 오스만의 다음 목표는 바로 빈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신성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던 빈은 철통 같은 방비를 갖춘 요새였습니다. 빈의 시민들은 요새에 의지하여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한 번 막아낸 적도 있었죠. 하지만 오스만은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동서 유럽을 잇는 주요 거점인 빈을 장악하면 곧 서유럽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셈이었으니까요. 오스만은 오래 전부터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레오폴트 1세를 견제하기 위해 물밑 공작을 벌여 왔고, 곧 레오폴트 1세에게 저항하는 반란과 내분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을 기회로 여긴 오스만 제국은 15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켜 빈으로 진군했습니다. 소비에스키가 즉위한 지 10년 만인 1683년 7월의 일이었죠.


1280px-TB_Angriff.gif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문화와 음악의 도시로 이름난 곳이지만, 수백 년 전에는 오스만의 파상공세를 받은 격전의 도시였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로메인 더 호흐 作


오스만의 군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였습니다. 군대의 숫자도 월등했고, 200여 년 전 콘스탄티노플을 무너뜨릴 때도 빛을 발했던 대포도 충실히 갖추고 있었습니다. 오스만의 자랑이었던 정예 기병대인 '시파히'와 정예 근위병 '예니체리'도 건재함을 과시했죠. 레오폴트 1세는 온 유럽에 지원을 호소하면서 빈에서 결사항전을 준비했습니다. 빈의 시민들도 손을 보탰죠. 그들은 오스만 군대의 손에 넘어가지 못하도록 성 바깥의 식량과 물자들을 모두 성으로 들이거나 아예 없애버리고, 성벽 바깥의 집들을 헐어 성벽을 보호하는 바리케이드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빈 수비군은 점차 불리해졌습니다. 오스만 군대는 어마어마한 양의 물자를 가지고 와서 도시를 포위한 뒤 아예 눌러 앉아버렸고, 수비군은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갔습니다. 지휘관들은 경비 중 조는 자가 있으면 즉결 처형하겠다는 초강수까지 두며 경비 태세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죠. 오스만 군대는 오랫동안 염원하던 빈의 점령을, 빈 수비군은 무시무시한 오스만 군대의 손에 끝나버릴 자신들의 운명을 예감했습니다.


한편 레오폴트 1세의 지원 요청을 받은 얀 3세 소비에스키는 이를 받아들여 군대를 일으킨 뒤 빈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그의 지원은 다른 유럽 나라들에게도 빈을 구원해야겠다는 동기를 주었습니다. 분명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를 위협하는 강적'이었지만, 정작 기독교 국가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마음을 먹고 있었죠. 특히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아예 오스만과 동맹을 맺고 눈엣가시였던 신성 로마 제국을 물리치려고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오스만 제국과 투쟁하며 여러 차례 큰 승리를 거두었던 소비에스키가 레오폴트 1세를 지원하기로 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었습니다. 소비에스키는 빈으로 사람을 보내 자신이 온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글머리에서 소개했던 쿨치스키가 그 주인공이죠. 그는 튀르크족으로 위장한 채 빈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고, 빈 시민들은 쿨치스키가 전해준 소식에 희망을 얻었습니다.


Winged_hussar,_historical_reconstruction.jpg 윙드 후사르 재현사진. '후사르'는 세르비아인 경기병 '구사르(습격대)'에서 유래했다. 이례적으로 중무장을 한 폴란드 후사르는 특유의 날개 장식 때문에 '윙드 후사르'로 유명하다.


그 해 9월 12일, 오스만 군대는 도시를 향해 마지막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소비에스키의 지원군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안 오스만 군대는 서둘러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공격을 퍼부었죠. 한 번에 두 곳에서 싸울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빈 사람들은 악착같이 싸우며 버티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그 날 오후 소비에스키의 지원군이 빈에 당도했습니다. 그는 지체없이 오스만의 측면을 공격했고, 상당수의 군대가 빈으로 투입되어 있던 오스만 군대는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최악의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강의 군대로 여겨지던 오스만 군대는 쉽사리 무너지지 않으면서 그 이름값을 했죠.


여러 차례 격전을 벌이던 소비에스키는 최후의 공격을 준비했습니다. 무려 18000명에 달하는 기병들을 앞세워, 네 군대에서 돌격을 가하기로 한 것이죠. 오래 전부터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는 명성을, 적들에게는 악명을 떨쳐온 연방의 주력 기병대 '윙드 후사르' 3천 명이 선두에 섰습니다. 오스만 편에서 싸우던 동족들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투구에 짚을 꽂은 타타르족 기병들이 좌우에서 윙드 후사르를 보조했죠. 얀 3세 소비에스키 자신이 직접 공격을 지휘하였습니다. 왕의 지시가 내려지자마자, 기병 18000명이 사방에서 오스만 군대를 향해 돌진했습니다. 이것은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기병 돌격'이라고 불릴 정도였죠.


King_John_III_Sobieski_Sobieski_sending_Message_of_Victory_to_the_Pope,_after_the_Battle_of_Vienna_111.png 얀 3세 소비에스키(가운데)는 카이사르의 명언을 인용하여 교황에게 빈 전투의 승리를 알렸다. 왕의 뒤로 폴란드군의 상징 윙드 후사르 부대가 보인다. 얀 마테이코 作


이미 몇 달 동안이나 싸워 오느라 지칠대로 지쳐 있었던 오스만 군대는 결국 두어 시간 만에 무너졌습니다. 후사르들은 오스만 군대의 한가운데에 있는 지휘부까지 밀고 들어오면서 결정타를 날렸죠. 이미 빈을 공격하면서 큰 피해를 입었던 오스만 군대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망자를 내면서 자기 나라로 쫓겨나야 했습니다. 빈의 시민들은 기적적인 승리에 환호했습니다. 국왕의 몸으로 군대의 최선두에서 용맹하게 싸웠던 얀 3세 소비에스키는, 이 전투가 끝나고 교황에게 보낸 서신에 아래와 같이 썼습니다.


왔노라. 보았노라. 신께서 이기셨노라.


익히 알려진대로, 이 말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남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변형한 것입니다. 아마도 빈 시민들에게는 소비에스키 왕과 그의 군대가 카이사르 못지않은 영웅으로 보이지 않았을까요? 얀 3세 소비에스키와 신성 로마 제국의 레오폴트 1세는 빈에서의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도망치는 오스만 군대를 추격하여 옛날에 오스만에게 빼앗겼던 헝가리 등의 동유럽 세계를 되찾았습니다. 오스만에게는 충격적인 패배였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비롯한 기독교 세계에게는 그야말로 '신의 승리'인 셈이었죠.


Scutum_Sobiescianum.png 요하네스 헤벨리우스 作 《우라노그라피아》의 천체목록. 가운데의 방패 양 옆에 적힌 'SCUTUM SOBIESCIAN'은 라틴어로 '소비에스키의 방패'이다.


로마 교황은 소비에스키 왕의 왕비에게 보낸 편지에서, 얀 3세 소비에스키를 '빈과 서유럽의 수호자'로 칭하며 찬양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얀 3세 소비에스키 왕은 '신앙의 수호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오스만 제국에서는 그를 '레히스탄(오스만에서 폴란드를 부르던 이름)의 사자'라며 두려워하였습니다. 1690년, 독일의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헤벨리우스는 자신이 발견한 별자리에 '소비에스키의 방패'라는 이름을 붙이며 오스만 제국에 맞서 유럽을 지켜낸 '방패' 역할을 한 왕을 칭송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방패자리'가 되었죠.


얀 3세 소비에스키 왕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대홍수의 나락으로부터 구해 낸 왕이었습니다. 비록 그조차도 유럽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폴란드인들은 망해가던 나라를 구해내고 기독교 세계 전체의 방패가 되었던 그의 업적을 지금도 기리고 있죠. 폴란드에게는 기사회생의 기회를, 유럽 전체에는 '신앙의 수호자'로서의 이름을, 천체관측을 취미로 삼는 이들에게는 별자리를 남기고 빈에는 유구한 카페하우스들의 전통(?)을 남긴 얀 3세 소비에스키 왕은 폴란드 역사의 또 다른 영광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미지 출처

1. 빈의 카페(좌)와 아인슈페너(우)

(좌-https://en.wikipedia.org/wiki/Vienna#/media/File:Caf%C3%A9_Demel_interior4,_Vienna.jpg)

(우-https://en.wikipedia.org/wiki/Viennese_coffee_house#/media/File:Einspaenner.jpg)

2.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바사 왕가의 깃발(https://en.wikipedia.org/wiki/Polish%E2%80%93Lithuanian_Commonwealth#/media/File:Chor%C4%85giew_kr%C3%B3lewska_kr%C3%B3la_Zygmunta_III_Wazy.svg)

3. 키이우에 위치한 보흐단 흐멜니츠키 동상(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D%9D%90%EB%8B%A8_%ED%9D%90%EB%A9%9C%EB%8B%88%EC%B8%A0%ED%82%A4#/media/%ED%8C%8C%EC%9D%BC:Denkmal_bohdan_chmelnyzkyj.jpg)

4. 얀 3세 소비에스키 초상화. 다니엘 슐츠 作(https://en.wikipedia.org/wiki/John_III_Sobieski#/media/File:Schultz_John_III_Sobieski.jpg)

5. 아야 소피아 그랜드 모스크(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D%9D%90%EB%8B%A8_%ED%9D%90%EB%A9%9C%EB%8B%88%EC%B8%A0%ED%82%A4#/media/%ED%8C%8C%EC%9D%BC:Denkmal_bohdan_chmelnyzkyj.jpg)

6.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사망한 폴란드 왕들인 브와디스와프 3세(좌)와 러요시 2세(우)

(좌-https://ko.wikipedia.org/wiki/%EB%B0%94%EB%A5%B4%EB%82%98_%EC%A0%84%ED%88%AC#/media/%ED%8C%8C%EC%9D%BC:Bitwa_pod_Warn%C4%85_(fragment_-_W%C5%82adys%C5%82aw).jpg)

(우-https://hu.wikipedia.org/wiki/Moh%C3%A1csi_csata#/media/F%C3%A1jl:Dorffmaister_The_death_of_Louis_II_of_Hungary_1795-1796.jpg)

7. 빈 전투 기록화. 로메인 더 호흐 作(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Vienna#/media/File:TB_Angriff.gif)

8. 2013년 촬영된 윙드 후사르 재현사진(https://en.wikipedia.org/wiki/Polish_hussars#/media/File:Winged_hussar,_historical_reconstruction.jpg)

9. 교황에게 승전보를 전하는 얀 3세 소비에스키. 얀 마테이코 作(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Vienna#/media/File:King_John_III_Sobieski_Sobieski_sending_Message_of_Victory_to_the_Pope,_after_the_Battle_of_Vienna_111.PNG)

10. 요하네스 헤벨리우스 作 《우라노그라피아》에 묘사된 방패자리(https://ko.wikipedia.org/wiki/%EB%B0%A9%ED%8C%A8%EC%9E%90%EB%A6%AC#/media/%ED%8C%8C%EC%9D%BC:Scutum_Sobiescianum.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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