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 검은 독수리 3마리에게 3번에 걸쳐 잡아먹힌 흰 독수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우크라이나 및 우크라이나를 돕던 동맹들의 관계에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최근 폴란드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하였죠. 주된 이유는 우크라이나의 농산물 수출로 알려져 있습니다. 러시아가 흑해를 장악하면서 우크라이나 곡물의 수출로가 막히자, 대신 폴란드 등의 육로를 거쳐서 수출하기로 합의를 보았죠.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값싼 곡물이 이웃나라들에 유입되면서 이웃나라들의 농민들이 상대적으로 피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한미FTA가 체결될 때 미국산 농축산물의 유입으로 우리나라의 농축산물 유통에 피해가 갈 것이라고 우려하는 의견이 많이 있었죠. 폴란드, 헝가리 등의 이웃나라들 역시 이러한 반발에 직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더해 폴란드의 총선이 다가오면서, 폴란드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게 된 것이죠.
우크라이나와 이웃나라들의 갈등 및 분열은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변동할 수 있는 국제관계의 냉혹한 일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체제 이후 생겨난 현재의 국제관계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한국사만 봐도 잘 알 수 있죠. 고구려와 신라, 백제는 어느 한 나라가 강해지면 다른 둘이 힘을 합쳐서 맞서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사대주의에 매몰되어 맹목적으로 명나라와의 동맹을 고집하다 병자호란을 맞이했다'는 평가를 받곤 하는 인조 시기의 조선조차도, 실제로는 명나라를 적극 돕기보다는 현상 유지에 주력하는 행보를 보였습니다.
이러한 외교정책이 성공하면 국제적으로 큰 이득을 볼 수 있지만, 반대로 외교적으로 고립된 뒤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는 사례도 많이 있었습니다. 한때 유럽에서 가장 큰 국토를 자랑했고, 이슬람 세계로부터 유럽을 지키기도 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몰락은 아마도 여기에 가장 잘 부합하는 사례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 편에서 살펴보았듯,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대홍수'라는 위기로부터 기사회생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물리치는 주역으로 발돋움하였습니다. 이를 발판으로 하여 다시금 유럽의 강자로 일어설 수 있었다면 폴란드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으나, 역사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웃나라들에서는 여러 명군들이 등장하여 점점 강해지고 있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그렇지 못했죠. 얀 3세 소비에스키 다음 국왕으로 선출되었던 아우구스트 2세는 스웨덴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겠다고 전쟁을 일으켰다가 오히려 대패한 뒤 왕위에서 쫓겨났습니다. 스웨덴은 꼭두각시 왕을 세워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했죠. 하지만 러시아가 이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습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황제였던 예카테리나 2세는 친러파 귀족이었던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1677-1766)라는 인물(예카테리나가 황제에 오르기 전에는 연인 관계였다고도 합니다)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죠. 그는 러시아를 등에 업고 폴란드 의회에서 국왕으로 선출되어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로 즉위하였습니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러시아의 힘으로 국왕이 되긴 했지만, 러시아의 꼭두각시로 남으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기존의 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죠. 하지만 그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폴란드를 속국으로 삼기 위해 온갖 압력을 가해 왔습니다. 폴란드인들도 그를 인정하지는 않았죠. 어떤 이들은 스타니스와프를 러시아의 앞잡이라고 여기며 싫어했고, 또 어떤 이들은 그가 이루려는 개혁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스타니스와프 2세를 몰아내려는 귀족들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고 말았죠. 현재의 우크라이나 지방 '바르'라는 곳의 이름을 따 '바르 연합'이라 불리는 이 귀족들은 스타니스와프 2세를 쫓아내고, 러시아 역시 몰아내려고 했습니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속했던 우크라이나 땅에는 수많은 소작농들과 카자크인들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홍수 때 그랬듯 폴란드 귀족들에게 저항하였습니다.폴란드 및 러시아를 견제하려던 오스만 제국은 그들의 반란을 배후에서 조종했죠. 게다가,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도 이를 지원했습니다. 프랑스와 프러시아, 그리고 오스트리아였죠. 그들은 점점 강해져만 가는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공통된 목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직접 러시아를 꺾을 정도로 힘이 세지는 못했기에, 오스만을 도와서 간접적으로 러시아를 약화시키려고 한 것이었죠. 물론 그들 역시 완전한 동맹은 아니었습니다. 러시아에 맞서면서도 서로를 견제하는 것을 잊지 않았죠. 이처럼 각자의 꿍꿍이를 숨긴 이웃나라들 사이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점점 쪼그라들었습니다.
이러한 경쟁 속에서 동유럽 지역의 패권을 거머쥔 나라는 러시아 제국이었습니다. 한때는 유럽의 공포로 불릴 만큼 무시무시했던 오스만 제국은 이미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크림 반도를 두고 러시아 제국과 싸웠지만 패배하였습니다. 떠오르는 태양 같았던 러시아 제국은 그 기세를 살려 발칸 반도 등 인근 지역에까지 손을 뻗쳤죠. 서유럽 나라들은 당연히 이것을 막고 싶어했지만, 얼마 전 끝난 7년 전쟁의 상처를 아직 회복하지 못한 상황이라서 힘이 부족했습니다. 한편 러시아 역시 스타니스와프 2세가 주도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개혁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이것을 억누르려고 했습니다. 계속된 갈등 끝에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이웃한 세 강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프러시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셋으로 쪼개 나눠 가지는 것으로 '합의'를 보기로 했습니다.
1771년 11월, 세 나라는 거의 동시에 연방을 공격하여 바르 연합의 반란을 진압하였습니다. 그리고 3개월 뒤인 1772년 2월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나눠 가지기로 공식적인 '약속'을 했습니다. 1683년 폴란드-리투아니아 군대가 대활약을 펼치며 오스만으로부터 구해냈던 바로 그 도시가 90여 년 만에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몰락시킨 주 무대가 된 것입니다.
그 해 8월, 세 나라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군대를 보내 영토를 잠식했습니다. 옛날에 연방에게 빼앗겼던 지역을 탈환하기도 했고, 오래 전부터 탐내며 눈독을 들여오던 땅을 빼앗기도 했으며, 다른 나라에게 빼앗겼던 지역을 대신하여 연방의 땅을 가지는 것으로 합의를 보기도 했죠. 폴란드와 스타니스와프 2세 입장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외세의 침입을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 등 다른 유럽 나라들도 연방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죠. 한참 떨어진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외에는 아무도 연방의 분할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어졌고, 수도 바르샤바도 외세에게 둘러싸여 버렸습니다.
러시아와 프러시아, 오스트리아는 스타니스와프 2세와 연방 의회인 '세임'에게 폴란드 분할을 공식 인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러시아 군대의 위협에 굴복한 의회와 귀족들은 결국 이를 받아들여 세 나라에게 빼앗긴 영토에 대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권리를 포기하였습니다. 이것이 1차 폴란드 분할이었죠. 1773년의 일이었습니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못다한 개혁을 완수해야만 나라를 구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죠. 1791년 5월 3일, 스타니스와프 2세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였습니다. 1787년 제정된 미국 헌법을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제정된 성문 헌법이자, 유럽에서는 최초로 나온 헌법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헌법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보완하려는 취지였습니다. 귀족 공화제가 깊게 뿌리내렸던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귀족들의 힘이 과도하게 강했습니다. 의회에서 단 한 명의 귀족이라도 반대를 표하면 법안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러한 귀족 공화제는 국왕의 독재를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연방의 발전을 위한 법안조차도 귀족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깃장을 놓는 부작용 역시 심했습니다. 스타니스와프 2세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죠. 새 헌법은 귀족들에게 억압받던 소작농의 권리를 신장시켰고, 국왕과 의회, 사법부의 역할을 명확히 분리하는 삼권 분립의 내용도 담고 있었습니다. 유럽에서는 시대를 앞선 헌법이었죠.
하지만 바로 그래서, 폴란드-리투아니아 5월 헌법은 외국의 반발을 샀습니다. 절대왕정을 송두리째 흔드는 이 헌법을 위험하게 받아들였던 나라들이 많았기 때문이죠. 그들은 프랑스 혁명이 자신들에게도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했던 것처럼, 5월 헌법의 영향력 역시 걱정하였습니다. 이웃나라들과 마찬가지 이유로 이 새로운 헌법에 반대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일부 귀족들 역시 같은 속내였습니다. 결국 이 귀족들은 타르고비차 연맹을 결성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헌법이 제정된 이듬해인 1792년의 일이었죠. 헌법이 제정되었다는 소식에 불같이 분노한 참이었던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선전포고조차 하지 않은 채 폴란드-리투아니아를 공격했죠.
스타니스와프 2세는 1차 폴란드 분할 이후 울며 겨자먹기 격으로 동맹을 맺었던 프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프러시아 국왕 프리드리히 2세는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프러시아는 1차 분할 때 차지하지 못했던 영토를 폴란드로부터 뜯어낼 기회라고 여기며 러시아에 협상을 제안했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동맹을 파기하는 대가로 영토를 요구한 것이죠. 결국 1793년 흐로드나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마지막 의회가 열렸습니다. 러시아와 프러시아는 의원들을 매수, 혹은 위협하여 폴란드 분할에 합의하게 하였습니다. 5월 헌법 역시 무위로 돌아갔죠. 자기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외세까지 끌어들였던 타르고비차 연맹도 자신들의 행동이 이처럼 커다란 파국을 가져올 줄은 몰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이후 그들의 이름은 폴란드인들에게 매국의 대명사로 남게 되었죠. 우리나라의 '을사오적'처럼 폴란드 역사에서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길이 기억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폴란드인들은 국왕의 개혁 실패와 귀족들의 매국 행위, 그리고 외세의 두 차례에 걸친 침탈에 분노하였습니다. 곧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났죠. 이 저항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폴란드 장군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1746-1817)였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미국으로 넘어가 미국 독립 전쟁의 영웅이 되었던 특이한 인물이었습니다. 농노나 흑인 노예 등, 당시에는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던 이들의 권리까지도 중시했던 코시치우슈코는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귀국하여 폴란드인들의 저항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대승하였고, 연방의 주요 도시인 바르샤바, 빌뉴스 등을 외세로부터 해방시키는 등 대활약을 벌였습니다.
폴란드인들의 저력에 놀란 폴란드 분할의 주역,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러시아 삼국은 본격적으로 진압에 착수했습니다. 코시치우슈코는 러시아군에 사로잡혔고, 실권을 모두 잃은 채 국왕 자리만 유지하고 있던 스타니스와프 2세 역시 왕위에서 물러났습니다. 두 사람 모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끌려갔죠. 스타니스와프 2세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연금을 지급받는 등 나름대로 대우를 받았지만, 남은 평생을 러시아 제국에게 감시당하며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1795년,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는 수많은 폴란드인들을 학살한 뒤 세 번째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분할하였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1795년의 3번째 분할을 통해 완전히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러시아 등은 그들의 저항 정신을 송두리째 꺾기 위해, 아예 '폴란드'라는 이름을 역사에서 지워버리려고 시도했죠. 하지만 수많은 폴란드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른 나라로 망명하여 저항을 이어나갔습니다. 앞서 러시아군에 사로잡힌 코시치우슈코 역시 석방된 후 프랑스로 향했죠.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와 함께 봉기를 이끌었던 얀 헨리크 돔브로프스키(1755-1818), 스타니스와프 2세의 조카이자 숙부가 주도한 개혁의 동반자였던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1763-1813)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이 집권하여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등과 대립하고 있었죠. 나폴레옹에게 협력하지 않고 스위스로 넘어가 여생을 마쳤던 코시치우슈코 등을 제외한 대다수 폴란드인들은 나폴레옹이 자신들의 조국을 되찾는 것을 도와주리라고 여겼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러시아 등의 적들을 격파하고, 폴란드에 바르샤바 공국이라는 나라를 세워서 그들의 의지에 답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바르샤바 공국을 프랑스의 '위성국'으로 삼아 정복 전쟁에 활용하려는 의도였지만, 폴란드인들은 그런 형태로나마 자신들의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죠.
폴란드인들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나폴레옹에게는 유럽 정복을 위해 꺾어야 하는 상대였지만, 폴란드인들에게는 조국을 되찾기 위해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산이었죠.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와 얀 헨리크 돔브로프스키는 바르샤바 공국의 수뇌부이자, 나폴레옹의 핵심 참모로서 그를 도왔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군대는 너무 깊숙이 진군한 나머지 러시아에서 발이 묶여 교착상태에 빠졌고,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 속에서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불가능'이란 말이 뭔지 모른다는 듯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기점으로 몰락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에게 폴란드 부흥의 희망을 걸고 있었던 폴란드인들은 끝까지 그를 위해 싸웠죠. 결국 대다수의 폴란드 영웅들이 그와 운명을 함께했습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나폴레옹 휘하에서 싸우다 전사했고, 돔브로프스키 역시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은거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습니다. 1895년, 나폴레옹의 완전한 몰락 이후 전후 처리를 위해 개최된 1895년 빈 회의에서 바르샤바 공국이 러시아와 프러시아의 차지가 되며 폴란드인들의 노력은 좌절을 맞이하였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몰락은 딱 100여 년 후의 한반도에서 벌어진 일들과 비슷한 점이 참 많습니다. 유럽에서는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가,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청, 러시아, 일본 등이 군대를 이끌고 들이닥쳐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나라를 잠식했죠. 온갖 불합리한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등 삼국에게 여러 차례 분할당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처지와,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자신도 모르는 새 '나눠 갖기로' 합의당하는 처지가 된 대한제국의 처지 역시 꼭 닮아 있습니다. 두 나라는 당연히 이에 맞섰죠. 정부 차원에서는 개혁을 통해, 민간 차원에서는 대규모 봉기를 통해 외세에 저항하려고 발버둥쳤죠. 하지만 철저히 힘과 이익에 따라 작동하는 냉혹한 국제관계의 흐름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타르고비차 연맹이나 대한제국의 을사오적과 같은 소위 '매국'하는 이들의 움직임 역시 나라의 멸망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요인은 다름아닌 국제 정세의 파도였습니다. 글머리에서 보았듯, 국제관계는 어제의 친구도 오늘의 앙숙으로 뒤바꾸면서 한결같이 '피도 눈물도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이것은 약육강식이 최고의 미덕이던 제국주의의 시대가 끝나고 표면적으로나마 평화를 추구하는 시대가 온 후에도 여전히 수많은 나라들이 다른 나라들에게 밀리지 않고 힘을 키우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미지 출처
1. 폴란드 국장(https://en.wikipedia.org/wiki/Poland#/media/File:Herb_Polski.svg)
2.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 초상화(https://en.wikipedia.org/wiki/Stanis%C5%82aw_August_Poniatowski#/media/File:Stanis%C5%82aw_II_August_Poniatowski_in_coronation_clothes.PNG)
3. 러시아 제국, 프러시아, 오스트리아의 검은 독수리
4. 1차 폴란드 분할을 풍자한 그림(https://en.wikipedia.org/wiki/Partitions_of_Poland#/media/File:Allegory_of_the_1st_partition_of_Poland_crop.jpg)
5. 폴란드-리투아니아 5월 헌법을 묘사한 그림. 얀 마테이코 作(https://en.wikipedia.org/wiki/Constitution_of_3_May_1791#/media/File:Konstytucja_3_Maja.jpg)
6. 비르투티 밀리타리 훈장을 한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https://ko.wikipedia.org/wiki/%ED%83%80%EB%8D%B0%EC%9A%B0%EC%8B%9C_%EC%BD%94%EC%8B%9C%EC%B9%98%EC%9A%B0%EC%8A%88%EC%BD%94#/media/%ED%8C%8C%EC%9D%BC:Tadeusz_Ko%C5%9Bciuszko_1.PNG)
7. 얀 헨리크 돔브로프스키(좌)와 요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우)
(돔브로프스키 - https://en.wikipedia.org/wiki/Jan_Henryk_D%C4%85browski#/media/File:Jan_Henryk_D%C4%85browski_1.PNG)
8. 모스크바에서 후퇴하는 나폴레옹(좌)과 빈 회의(우)
(나폴레옹 - https://en.wikipedia.org/wiki/Napoleon#/media/File:Napoleons_retreat_from_moscow.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