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불곰은 코카서스 산맥 주변 지역에 주로 서식하는 불곰으로 현재 멸종위기종이다. 성경에도 몇 차례 언급될 정도로 유럽과 중동 등지에서 잘 알려진 곰이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4월 8일, 이란의 하마단이라는 곳에서 18살의 폴란드 피난민 '이레나 보키에비치'는 희한한 만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이란인 소년이 데리고 있던 어미 잃은 시리아불곰 한 마리였죠. 이레나의 부탁을 받은 한 폴란드 군인은 그 곰을 구입하였고, 이후 이 곰은 테헤란 근처에 있던 폴란드 난민 캠프에서 이레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폴란드의 영웅(熊), 보이테크(1942-1963)의 등장이었습니다.
1939년, 폴란드는 나치 독일과 소련의 침공을 받았다. 수도 바르샤바를 비롯한 폴란드 전역이 외세에게 넘어갔고, 이후 2차 세계대전의 단초가 되었다.
수 차례에 거친 분할을 겪으며, 폴란드는 그야말로 열강들의 동네북이나 같은 처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폴란드인들은 나폴레옹을 고국 부흥의 희망으로 여기며 그의 편을 들었지만 그마저도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좌절되었죠. 이후에도 폴란드의 운명은 기구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 등의 보호 약속을 받으며 새로운 나라를 세웠지만, 1939년 독일과 소련이 연이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약속을 저버렸죠.
이레나를 비롯한 폴란드 난민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 고국을 탈출하여 머나먼 이란 땅까지 와 있었습니다. 본래 그들은 소련군에게 붙잡혀 시베리아로 끌려간 신세였지만, 독일과 소련의 불가침 조약이 깨지고 독소전쟁이 일어나자 스탈린에 의해 새 군대로 편성되었습니다. 프랑스를 거쳐 영국까지 넘어가며 나치 독일에 항쟁하던 또 다른 동지들처럼, 그들 역시 나치를 물리치겠다는 일념으로 가득했습니다. 마치 만주와 연해주를 거쳐 중국 또는 소련으로까지 이동하며 일제에 맞섰던 조선인들처럼 말이죠. 조국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어미를 잃어버린 새끼곰의 만남은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란에서 촬영된 폴란드 군인과 보이테크
이 곰은 약 석 달 정도 폴란드인들의 보살핌을 받고, 그 해 8월경 폴란드군 제2수송중대(이후 제22 탄약 보급중대로 이름이 변경되었습니다)에 기증되었습니다. 비록 다른 불곰들보다는 작은 편인 시리아불곰이긴 했지만, 그래도 곰은 곰이기에 워낙 덩치가 커져 민간 차원에서 기르기는 아무래도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이 새로운 군견, 아니 군웅에게 '보이테크'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바로 군인들이었습니다. 폴란드 남성 이름으로 흔히 쓰이는 '보이치에흐'의 약칭이기도 한 이 이름은 '전쟁을 즐기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린 보이테크는 음식을 잘 삼키지 못했기 때문에, 군인들은 보드카 병에 연유를 담아 먹이면서 그를 키웠습니다. 군인들이 보살핀 덕에 건강하게 자란 보이테크는 이후 과일이나 꿀, 시럽 등의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하죠. 하지만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고기도 꿀도 아닌 맥주였다고 합니다. 군인들은 보이테크에게 가끔씩 '상'으로 맥주를 주었다고 하네요. 그밖에도 커피와 담배를 음미(?)하는 등 그야말로 사람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식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보이테크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뛰어넘어 자유 폴란드군 군인들과 함께 동고동락한 '전우'였다고 한다.
술이나 담배를 같이 한 것에서 알 수 있듯, 폴란드 군인들에게 보이테크는 단순한 '반려동물'이 아닌 동고동락하는 '전우'였습니다. 군인들이 밤에 추위에 떨며 잠을 이루지 못할 때는 함께 껴안고 잠을 자기도 했고, 군인들과 함께 레슬링을 하며 여가를 보내기도 했죠. 보이테크는 민간인들에게도 친절했고, 심지어 군인들과 발을 맞춰 걷기도 하면서 어엿한 군웅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들 역시 보이테크를 친구로서 대했습니다. 그들은 이란을 떠나 시리아와 이라크, 팔레스타인 등지로 옮겨다닐 때마다 보이테크를 항상 데리고 다녔습니다. 보이테크가 전갈에게 코를 쏘여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을 때도 극진히 보살폈죠.
당시 '자유 폴란드군'이라고 불렸던, 이 폴란드판 '독립군'들은 유럽 전장에서 큰 활약을 펼쳤습니다. 영국 공군과 함께 기나긴 항공전에 참여하였던 폴란드 공군 조종사들이 그랬고, 보이테크가 속했던 부대 역시 마찬가지였죠. 그들은 이집트에 있던 영국군에 합류하여 이탈리아 전역으로 이동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영국군 규정상 수송선에 동물을 태우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영국군들은 보이테크의 승선을 거부했죠. 그러자 폴란드군은 보이테크에게 정식으로 이병 계급을 주고는 '폴란드군의 일원'으로서 보이테크를 함께 수송해줄 것을 주장하여 관철시켰습니다.
보이테크의 사진과 계급장 및 그의 소속 부대 마크. 포탄을 진 보이테크의 모습은 그가 속한 부대의 상징이 되었다. 런던 시코르스키 박물관 소장.
보이테크 이병은 그렇게 이탈리아까지 가게 되었고,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을 마주했습니다. 하지만 보이테크와 폴란드인들의 전우애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죠. 이탈리아 반도에서 벌어진 가장 큰 전투 중 하나인 로마 전투('몬테카시노 전투'로고 잘 알려져 있습니다)에서, 보이테크 이병은 자신의 임무를 금방 '파악'하고 수행했습니다. 무거운 포탄을 운반하는 일이었죠. 늘 그렇듯 전우들이 하는 행동을 금방 보고 배웠던 그는 4명분의 일을 혼자서 수행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양측 모두 수만 명의 전사자를 낸 끝에, 결국 추축국이 후퇴함으로써 전투는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이테크는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공을 인정받아 하사로 진급했죠.
목숨을 바쳐가며 나치에 맞섰던 수많은 폴란드인들과 열심히 탄약을 운반했던 보이테크의 노력은 추축국의 패망이라는 결실로 돌아왔습니다. 영국군, 그리고 22중대 전우들과 함께 영국까지 이동했던 보이테크 역시 '태어나기는커녕 밟아본 적도 없는' 조국(?)의 해방을 맞이하면서 그간 흘렸던 피와 땀에 대한 보상을 받을 날이 머지않아 보였죠.
소련 내무인민위원회는 1940년 4~5월 동안 2만여 명의 폴란드인을 학살했다. 대다수의 유해가 발견된 숲의 이름을 따 '카틴 학살'이라 부른다. 사진은 카토비체에 세워진 위령비.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 폴란드는 소련의 손아귀에 떨어졌죠. 소련은 비록 독소전쟁으로 인해 폴란드와 한 배를 타긴 했지만, 1939년 독일과 함께 폴란드를 침공한 엄연한 적대 세력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소련에 의해 폴란드인 22,000여 명이 학살당했고, 세계대전 중에 이 사실을 발견한 나치 독일이 연합국을 분열시키기 위해 전 세계에 폭로하기도 했죠. 이런 상황이었기에, 소련과 폴란드의 갈등은 필연적이었습니다.
소련은 전쟁이 끝나자 친 소련파 폴란드인들을 내세워 폴란드를 공산권으로 편입시켰습니다. 자유주의 진영에서 싸웠던 폴란드 망명정부는 당연히 크게 반발했죠. 모두 함께 기다려 왔던 조국의 해방을 이념보다 우선시할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테지만, 유라시아 대륙 정반대의 한반도와 한민족에게 그랬듯 폴란드인들에게도 이념의 벽은 너무나 높고 차가웠습니다. 폴란드인들 역시 둘로 나뉘어 다투게 되었죠.
폴란드 망명정부의 핵심인물이었던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그는 1943년 지브롤터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런던에 그의 이름을 딴 박물관이 있다.
미국과 영국 등 서방 진영은 소련을 견제하긴 했지만, 그들의 목적은 더 이상 폴란드인들의 목적과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폴란드 망명정부는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소련과 갈등을 빚다가 결국 국교를 단절하는 초강수까지 두게 되죠. 하지만 서방 진영은 자신들에게 불필요한 충돌은 막는 선에서 소련과 타협을 하고자 했기에 폴란드 망명정부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폴란드 망명정부에 대한 승인을 취소하고 소련이 세운 폴란드 공화국을 승인하기까지 했습니다. 오래 전 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쪼개졌던 때처럼, 이번에도 폴란드는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이해관계에 따라 뒤통수를 맞고 피해를 보게 된 셈이었죠.
보이테크와 자유 폴란드군이 자신들의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그토록 염원하던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보이테크가 속해 있던 폴란드 제2군의 총지휘관이었던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을 비롯한 적지 않은 폴란드인들이 조국 땅을 밟았죠. 하지만 그들 역시 이념대립의 풍파 속에서 고초를 겪고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어느 마을에 머물렀던 보이테크는 현지 사람들에게도 유명웅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시민들은 물론 기자들까지 몰려와 보이테크를 찾았죠. 하지만 현실이 이러했기에, 보이테크를 바라보는 전우들의 마음은 편치는 못했을 것입니다.
보이테크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조국(?) 폴란드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국에서 여생을 보냈다. 스코틀랜드 베릭셔의 한 비행장에서 찍은 보이테크 사진.
1947년, 보이테크 하사가 몸담고 있던 자유 폴란드군이 해체되면서 그 역시 퇴역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에든버러의 동물원에서 남은 삶을 보내게 되죠. 보이테크는 이미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러 와주었습니다. BBC에서도 아동 프로그램 게스트로 자주 초청했다고도 하죠. 하지만 보이테크가 가장 그리워하고 또 반가워했던 사람들은 다름아닌 전우들이었습니다. 보이테크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전우들을 잊지 않았고, 그들이 찾아와 폴란드어로 이름을 부르면 아주 반가워하면서 담배를 달라고 요구했다고 전해집니다.
보이테크는 1963년 12월 2일, 21세의 나이로 에든버러 동물원에서 삶을 마쳤습니다. 시리아불곰은 평균 250kg 정도라고 하는데, 사망 당시 보이테크의 몸무게는 그 두 배인 500kg에 달했다고 전해지네요. 폴란드인들은 물론 스코틀랜드 사람들도 참전용사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합니다. 보이테크의 동상이 폴란드는 물론 그가 여생을 마친 스코틀랜드, 그리고 '현역'으로서 참전했던 이탈리아 등에까지 세워진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당시 영국 방송에서는 "유명한 폴란드 군인이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했다고 합니다.
런던 제국 전쟁 박물관에 소장된 보이테크 명패(좌)와 바르샤바 신 시가지의 보이테크 동상(우). '참전용사' 보이테크는 폴란드뿐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기억되고 있다.
아마도 인류와 곰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할 보이테크의 삶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깃거리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된 보이테크가 만난 사람들이 다름아닌 나라를 잃고 머나먼 이국까지 흘러들어온 폴란드인들이었다는 것은 참으로 묘한 우연이었습니다. 이후 같은 폴란드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가하여 자신의 소임을 행했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타향에서 여생을 마쳐야만 했던 보이테크의 삶 역시 그의 전우 대다수와 닮은꼴이었죠. 수많은 폴란드 용사들이 이런 처지가 된 이유가 다름 아닌 이념 갈등이었다는 점은 '한국과 폴란드는 비슷한 역사를 가졌다'는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