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마일과 바부르

같은 시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간 두 명의 창업군주

by 서창현

15세기, 사마르칸트 등을 중심으로 제국을 건설한 티무르는 몽골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야망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비록 진짜 몽골 제국만큼 드넓은 대제국을 세운 것은 아니었지만, 킵차크 칸국과 델리 술탄국, 그리고 오스만까지 주변의 강적들을 모조리 격파하면서 위용을 떨쳤습니다. 하지만 티무르가 죽은 후, 그의 제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붕괴되었죠. 티무르 제국이 차지하였던 이슬람 세계의 동쪽은 내분과 외침으로 고초를 치렀습니다. 서쪽에서는 오스만이 기사회생에 성공한 것은 물론,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까지 점령하여 로마의 200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으며 승승장구하던 것과 정반대였죠.


하지만 이러한 혼란을 잠재우고,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여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왕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닮은 구석이 많았지만 다른 점은 더욱 많았고, 인생은 정반대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둘 모두 강대한 제국의 건설자가 되었고, 그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유산을 만들어낸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들은 사파비 제국의 이스마일 1세(1487-1524), 그리고 무굴 제국의 바부르(1483-1530)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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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일(좌)과 바부르(우)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두 개의 이슬람 제국을 세운 불세출의 인물들이었지만 인생은 정반대에 가까웠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불운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스마일의 아버지는 이슬람 신비주의 교단인 사파비의 지도자였지만, 현재의 이란 및 코카서스 지역을 지배하던 백양 왕조와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스마일의 형도 뒤이어 사망하는 바람에, 이스마일은 겨우 7세의 나이로 적을 피해 숨어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죠. 바부르 역시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동부에 속하는 페르가나 지역을 통치하는 티무르 왕족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사고를 당해 급사하는 바람에 11세의 나이로 지도자라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게 됐습니다. 그나마도 귀족들의 반대로 자리조차 물려받지 못할 뻔했지만 외가의 도움을 받은 결과였죠.


제국을 세운 인물들답게, 두 사람은 떡잎부터 남달랐습니다. 이스마일은 5년 동안 힘을 기른 뒤, 12세 때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아버지와 형을 죽인 적들을 격파하며 역사에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한편 바부르 역시 조상인 티무르 못지않은 대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야망으로 불탔습니다. 그는 겨우 15세의 나이로 티무르 제국의 옛 수도 사마르칸트를 탈환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죠.


The_Battle_between_Shah_Ismail_and_Shaybani_Khan.jpg 우즈베크인의 칸 샤이바니는 바부르의 고국 탈환 계획을 좌절시키고 모욕을 주었지만, 이스마일과의 전투 한 번에 목숨을 잃고 만다. 이스마일과 샤이바니의 전투 기록화


하지만 두 사람의 인생은 극과 극으로 갈렸습니다. 바부르는 사마르칸트를 점령한 지 겨우 100여 일 만에 빼앗겼죠.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고향 페르가나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페르가나를 동생에게 넘겼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까지 듣게 되었죠. 페르가나와 사마르칸트는 무려 350km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당장 달려가서 고향을 되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바부르는 사마르칸트를 되찾으려고 3년 동안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우즈베크인들의 칸 무함마드 샤이바니에게 참패했습니다. 결국 바부르는 여동생을 샤이바니 칸에게 시집보내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목숨만 건져 빠져나왔고, 고향을 되찾기는커녕 친척들에게 모욕만 당한 채 빈털터리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때가 자기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시기였다고 회고했습니다. 텐트가 두 개밖에 없어서 어머니에게 한 개를 드리고, 자신은 몇 명 안 되는 부하들과 남은 텐트에서 옹기종기 모여 밤을 보내야 했죠.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인 카불을 점령하고 터전으로 삼기까지는 몇 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Chardin_Ghezelbash.jpg '키질바시'는 튀르크어로 '붉은 머리'라는 뜻으로, 시아파의 12이맘을 상징하는 붉은 천을 12번 감은 모자에서 딴 이름이다.


반면 이스마일은 달랐습니다. 그는 사파비 교단의 충성스러운 전사 '키질바시'들을 이끌고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과 이란 지역을 순식간에 집어삼켰죠. 바부르가 티무르 제국을 다시 부흥시키려고 했던 것처럼, 이스마일 역시 옛 페르시아 제국과 같은 영광을 이루려고 했죠. 단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이스마일은 성공가도를 달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몇 배나 많은 적들과 전투를 벌이면서도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승리를 거두었죠. 대도시 타브리즈를 점령한 후, 이스마일은 스스로를 '이란의 샤'로 칭했습니다. 젊다 못해 어린 이 정복자는 현재의 이란, 조지아, 아르메니아 지역은 물론 동쪽의 호라산, 서쪽의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자신의 땅으로 만들며 힘을 과시했습니다. 바부르를 궁지로 몰아넣었던 샤이바니 칸조차 이스마일과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스마일은 그의 두개골에 금을 입히고 보석으로 장식한 뒤 술잔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본의 아니게 바부르의 원수를 몇 배로 갚아준 것이죠.


샤이바니 칸이 죽자, 바부르는 이스마일과 동맹을 맺고 다시 사마르칸트와 동생을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우즈베크족은 여전히 강한 적이었고, 결국 바부르는 사마르칸트를 또 빼앗겼습니다. 자신의 새 터전인 카불은 다행히도 유지할 수 있었지만, 티무르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꿈은 점점 멀어져만 갔죠. 바부르는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의 급료를 충당하기 위해 이전부터 남쪽의 이웃인 북인도 지역을 약탈하곤 했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아예 인도를 정복할 생각을 품었습니다. 그의 조상 티무르 역시 델리 술탄국을 격파하고 한때 북인도를 정복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바부르는 '북인도도 조상님의 땅이었으니 이제는 내 차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죠. 물론 말로만 인도를 차지할 수는 없었으므로, 바부르는 마침내 인도로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Yavuz_Sultan_I._Selim_Han.jpg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는 '냉혈한'이란 별명으로 유명했다. 그는 수니파의 대표로서 시아파였던 이스마일과 대립했다.


한편, 이스마일은 서쪽의 오스만 제국과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사파비 제국은 영토를 확장하면서 이미 아나톨리아 반도의 오스만 세력과도 몇 번씩 충돌한 적이 있었죠. 하지만 더 큰 요인은 역시 종교적인 문제였습니다. 이슬람은 크게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뉩니다. 다수파이자 소위 '정통파'로 불리는 수니파는 무함마드 이후의 이슬람 최고 지도자인 '칼리프'들의 계통을 잇는 세력이죠. 하지만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와 그 후계자들만이 진정한 이슬람의 계승자이라고 믿는 집단이었죠. 이스마일의 사파비 제국은 바로 시아파였습니다. 반면 오스만 제국은 수니파였죠. 특히 당시 막 즉위했던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는 이집트를 완전히 정복한 뒤, 아예 칼리프 자리까지 이어받으면서 수니파 전체의 종교적 지도자라는 자리까지 굳힌 상황이었습니다.


유럽에서 신교와 구교의 갈등으로 여러 차례 전쟁이 일어났던 것처럼, 중동에서도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매우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이스마일은 페르시아를 넘어 모든 이슬람 세계를 시아파로 만들겠다는 야망으로 불타고 있었죠. 한때 동맹이었던 동쪽의 바부르도 수니파이긴 했지만, 그보다는 수니파의 지도자 칭호를 지닌 오스만 제국이 더 눈엣가시였을 것입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동쪽에 있는 여러 튀르크멘 부족들을 충동질하여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키게 했죠. 한편 셀림은 황자 시절부터 이스마일이 획책한 반란을 진압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시아파를 매우 증오했죠. 결국 셀림은 즉위한 지 2년 만인 1514년, 이스마일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사파비 제국을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시아파와 수니파, 이슬람교 양대산맥의 결전이었습니다.


Battle_of_Chaldiran_(1514).jpg 이스파한의 체헬 소툰 궁에 소장된 찰디란 전투(1514) 기록화. 무적을 자랑하던 사파비 군대와 이스마일은 오스만군의 포화 앞에 패배를 맛보았다.


패배를 몰랐던 이스마일은 늘 그랬듯 이번에도 적을 짓밟아주리라 생각하며 전장으로 나갔습니다. 사파비 군대는 중세 전쟁에서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했던 기병을 주력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사파비 군대는 오랜 전쟁으로 단련된 베테랑들이었죠. 기병 하면 사파비 못지않게 강력했던 오스만조차 얕볼 수 없는 강군이었습니다. 하지만 셀림 1세에게는 또 다른 무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화약이었죠.


둘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속하는 찰디란 평원이란 곳에서 맞붙었습니다. 오스만은 정예 근위병인 예니체리,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에서도 활약했던 대형 포들을 배치해 사파비 군대에 공격을 퍼부었죠. 사파비 군대는 그들의 사격을 피해 오스만군의 좌우 날개를 향해 돌진했습니다. 하지만 오스만군은 노련하게 그들의 돌진을 받아쳤습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사파비군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죠. 그 전까지는 무적이라고 불리던 사파비 군대였지만, 그들 역시 당대 최신 무기였던 오스만의 머스킷 총과 화포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스마일은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쳤을 뿐만 아니라 오스만의 반격을 받아 수도 타브리즈까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스마일의 아내들도 오스만 군대에 잡혀가고 말았죠. 사파비 제국은 겨우 멸망을 피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지만, 패배를 모르던 이스마일에게 찰디란 평원의 패배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그는 그 후 다시는 전장에 나서지 않았고, 정치에서도 거의 손을 떼다시피했죠.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에 의존하던 이스마일은 이후 급격히 건강이 나빠졌고, 1524년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36세의 젊은 나이였죠.


1526-First_Battle_of_Panipat-Ibrahim_Lodhi_and_Babur.jpg 파니파트 전투(1526) 기록화. 오스만의 화약 무기에 대패한 이스마일과 달리, 바부르는 오스만 화약 무기로 델리의 대군을 물리치고 인도 진출에 성공하였다.


이스마일이 단 한 번의 패배로 알콜 중독에 빠져버리고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10여 년 동안, 카불의 바부르는 착실히 인도 정복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델리의 술탄 이브라힘이 귀족들과 내분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기회로 활용했죠. 몇몇 귀족들은 아예 이브라힘을 물리치기 위해 바부르에게 개입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마일과 셀림이 서로 소규모 충돌을 겪다가 한 차례 대전을 치른 것처럼, 바부르 역시 몇 차례 델리 술탄국과 충돌한 끝에 마침내 결판을 짓기로 하고 인도로 진군했습니다. 1526년 4월, 이스마일이 죽은 지 2년 뒤의 일이었죠.


델리 술탄국은 티무르에게 패배해 델리가 초토화되는 등의 수난을 겪으면서 많이 약화되어 있었지만,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술탄 이브라힘은 바부르와 비슷한 나이로, 바부르 못지않게 전쟁에 능숙한 사람이었고 그의 군대는 바부르보다 몇 배는 많았습니다. 하지만 바부르에게는 이브라힘에게 없는 무기가 있었습니다. 다름아닌 오스만의 총포였죠. 그는 이전부터 화약 무기의 위력을 알아보고, 오스만으로부터 무기와 기술자를 사들여 자신의 군대를 무장시켰습니다. 바부르는 화약 무기와 자신의 군대가 가진 장점을 십분 활용하여, 델리 인근의 마을 파니파트에서 이브라힘의 대군을 격파했습니다. 이 한 번의 전투로 델리 술탄국은 멸망하고, 바부르가 델리에 입성하게 되었죠.


Animals_of_Hindustan_small_deer_and_cows_called_gīnī,_from_Illuminated_manuscript_Baburnama_(Memoirs_of_Babur).jpg 바부르는 자신의 일대기를 『바부르나마』라는 책으로 남겼다. 고향을 잃고 방황했을 때의 감정 등이 잘 녹아 있고, 인도의 동물을 묘사한 그림 등도 찾아볼 수 있다.


인도 북서부의 구자라트 지역을 지배하는 토착 힌두 세력인 '라지푸트' 역시 바부르에게 저항했습니다. 라나 상가라는 인물이 이끄는 그들은 델리 술탄국에게도 그랬듯, 무슬림인 바부르의 지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죠. 사실 그들은 델리 술탄국을 물리친다는 공통 목표를 가지고 협력하기도 했습니다. 라지푸트는 바부르가 조상 티무르처럼 델리 지역을 약탈만 하고 돌아갈 것이라고 여겼고, 그가 돌아가면 자신들이 텅 빈 델리를 점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고향을 수복하겠다는 목표를 거의 포기했던 바부르는 인도를 자신의 영토로 삼을 생각이었으므로 라지푸트의 예상과는 다르게 움직였습니다. 그렇기에 둘의 연합은 금방 깨지고, 파니파트 전투 이듬해인 1527년, 현재 인도 공화국의 라자스탄 주에 속하는 칸와라는 곳에서 맞붙었습니다.


바부르는 황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부하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언변을 익혔습니다. 그는 그 언변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칸와 전투를 앞두고도 마찬가지였죠. 머나먼 아프간 지역 등에서부터 온 바부르의 병사들은 오랜 전쟁, 인도의 더운 날씨 등으로 지쳐 사기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약탈로 전쟁을 마무리하지 않고 정복을 계속한다는 것에 불만도 있었죠. 바부르는 힌두 '이교도'에 맞서 무슬림으로서 '성전(지하드)'를 벌여 그들을 물리쳐야 한다며 병사들의 신앙에 호소했습니다. 애주가였던 바부르는 무슬림으로서 모범을 보이기 위해 자신이 아끼던 술을 전부 바닥에 부어버리는 퍼포먼스까지 선보였습니다. 병사들은 그런 바부르의 모습에 감동했고, 자신들도 왕을 따라 성전에 임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무장했죠. 반면 라지푸트 군대는 서로 다른 부족들이 뭉쳐 있어서 내분에 시달렸고, 결국 바부르에게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라나 상가는 용감히 싸웠지만 내우외환을 극복하지 못한 채 달아났다가 부하에게 암살당하고 말았죠. 바부르는 두 차례의 결정적인 승리 이후 마침내 인도에 자신의 제국, 무굴을 건국하였습니다. 그는 3년 뒤인 1530년에 47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장남인 후마윤이 뒤를 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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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좌)과 사파비 제국(우)는 오스만 제국과 함께 근세 이슬람 세계의 축이었다. 또한 현재의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등 많은 나라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스마일과 바부르는 모두 뛰어난 지휘관이자 창업 군주였고,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문학적 소양을 지닌 시인들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공통점이 많았던 둘이었지만, 둘의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조적인 구석이 많았죠. 소싯적부터 승승장구했지만 오스만의 화약 무기에 대패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사망했던 이스마일, 그리고 실패와 굴욕으로 얼룩진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견뎌내고, 오스만의 화약 무기를 적극 활용하여 끝내 대승을 거두고 자기 제국을 세운 바부르. 같은 시대, 이웃한 제국을 세웠음에도 이처럼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 그들의 삶이었습니다.


사파비 제국과 무굴 제국은 창업 군주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후에도 이웃 제국으로서 협력과 갈등을 반복했습니다. 바부르의 아들 후마윤이 외적의 침략과 형제들의 배신으로 빈털터리가 되어 사파비로 망명했을 때, 이스마일의 아들 타흐마스프는 그를 극진히 대접한 것은 물론 대규모의 군대까지 지원해 후마윤이 무굴을 되찾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후마윤은 그 보답으로 사파비에게 영토를 떼어주며 우호 관계를 맺었지만, 다음 황제인 아크바르 때 사파비가 오스만과의 전쟁에 한눈 판 틈을 타서 도로 빼앗아가는 바람에 사이가 나빠지기도 했죠. 두 나라의 관계는 이스마일과 바부르의 인생처럼, 그리고 외교 관계가 다 그렇듯 굴곡진 편이었지만,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서쪽의 오스만 제국과 함께 근세 이슬람 세계의 3대 강대국으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무굴 제국은 현재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의 전신으로 한때는 인도 아대륙을 석권하다시피 했고, 사파비 제국 역시 현재의 이란이 시아파 무슬림 국가로 남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며 현재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1. 이스마일과 바부르

(이스마일: https://en.wikipedia.org/wiki/Ismail_I#/media/File:Portrait_of_Shah_Ismail_I._Inscribed_%22Ismael_Sophy_Rex_Pers%22._Painted_by_Cristofano_dell'Altissimo,_dated_1552-1568.jpg)

(바부르: https://en.wikipedia.org/wiki/Babur#/media/File:Emperor_babur.jpg)

2. 사파비 제국과 우즈베크인들의 전투 기록화

(https://en.wikipedia.org/wiki/Muhammad_Shaybani#/media/File:The_Battle_between_Shah_Ismail_and_Shaybani_Khan.jpg)

3. 키질바시

(https://en.wikipedia.org/wiki/Qizilbash#/media/File:Chardin_Ghezelbash.jpg)

4. 셀림 1세

(https://en.wikipedia.org/wiki/Selim_I#/media/File:Yavuz_Sultan_I._Selim_Han.jpg)

5. 찰디란 전투 기록화

(https://en.wikipedia.org/wiki/Ismail_I#/media/File:Battle_of_Chaldiran_(1514).jpg)

6. 파니파트 전투 기록화

(https://en.wikipedia.org/wiki/Babur#/media/File:1526-First_Battle_of_Panipat-Ibrahim_Lodhi_and_Babur.jpg)

7. 바부르나마

(https://en.wikipedia.org/wiki/Baburnama#/media/File:Animals_of_Hindustan_small_deer_and_cows_called_g%C4%ABn%C4%AB,_from_Illuminated_manuscript_Baburnama_(Memoirs_of_Babur).jpg)

8. 무굴과 사파비의 깃발

(무굴: https://en.wikipedia.org/wiki/Mughal_emperors#/media/File:Captured_flag_of_the_Mughal_Empire_(1857).png)

(사파비: https://en.wikipedia.org/wiki/Safavid_Iran#/media/File:Safavid_Flag.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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