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큰 250kg 금괴(일본 시즈오카현 이즈 시에 있는 토이 금박물관 소장). 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귀를 상징하는 귀금속이다.
1324년, 현재 이집트의 수도이기도 한 카이로의 외곽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의 등장은 카이로를 지배하던 술탄으로부터 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이슈가 되었죠. 웬만한 군대보다도 훨씬 많은 숫자를 자랑하는 이 행렬은 전쟁이 끊이지 않던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보일 만큼 평화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카이로를 정복하러 온 것도 아니었고, 무력으로 무언가를 빼앗거나 요구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그저 '성지 순례'였죠.
하지만 카이로 사람들의 이목이 이 순례자들에게 집중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의 외양과 그들이 지닌 물건이었죠. 한 나라의 국왕부터 노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의 순례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페르시아산 비단으로 지은 값비싼 옷을 입고, 너나할 것 없이 황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귀족들은 금으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있었고, 만 명이 넘는 노예들도 각자 2kg가량의 금괴를 지니고 있었으며 심지어 그들이 데리고 있는 낙타 80마리도 각각 수십kg이 넘는 금가루를 싣고 있었죠.
1375년 제작된 유럽의 세계지도에 나온 만사 무사. 그는 메카 순례 한 번으로 중동은 물론 유럽에까지 큰 충격을 주었다.
값이 너무 많이 올라서 구매하기 부담스러운 것을 두고 '금값이 되었다'는 표현을 쓰는 것처럼, 금은 예나 지금이나 비싼 것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금속입니다. 11월 26일 오늘 기준으로 순금 1돈(3.75g)의 구매가가 35만 원이라고 하니, 이 순례자들이 지닌 금의 가치가 얼마나 할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을 정도입니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 어마어마한 황금빛 행렬을 이끈 사람은 저 멀리 사하라 사막 너머에서 온 말리 제국의 '만사 무사'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왜 굳이 그 많은 황금을 들고 성지 순례에 나서게 되었을까요?
'만사'는 말리 제국의 군주를 일컫는 호칭으로, 동아시아권의 '왕'이나 '황제' 또는 영어의 'king' 같은 명칭입니다. 즉 '만사 무사'는 대략 '무사 황제' 정도의 이름인 셈입니다. 당시로부터 약 100여 년 전이었던 1200년대 초에 건국되었다고 알려진 말리 제국은 여러 적들을 물리치고 서아프리카 내륙을 정복한 뒤 번영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건조하고 황량했지만, 금과 은을 비롯한 수많은 귀금속과 소금 광산들을 손에 넣은 덕분에 부유해질 수 있었죠.
메카에 위치한 카바(Kaaba). 영어의 'cube'와 비슷한 뜻으로 이름처럼 정육면체로 되어 있다. 전 세계 무슬림들이 매일 이곳을 향해 예배를 드리고 순례를 온다.
제국은 이슬람교를 공식적인 국교로 삼았지만, 아프리카 토속 신앙의 전통 역시 깊게 남아 있어서 흔히 '이슬람 세계'라고 부르는 중동 지역과는 사뭇 다른 사회였습니다. 제국은 토속 신앙을 탄압하고 강제로 없애려고 하지는 않았지만(혹은 못했지만), 만사들은 이슬람을 신봉하였기에 무슬림으로서의 종교적 의무 역시 행하려고 했죠. '하지'라고 불리는 성지 순례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이슬람교의 최대 성지이자, 무언가가 모여드는 곳의 대명사로도 쓰이는 현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가 바로 그곳이었죠. 무사 즉위 이전에도 이미 말리의 무슬림들은 성지 순례를 하고 있었고, 만사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만사 무사처럼 한 적은 없었죠.
다른 사람도 아닌 군주가 직접 하는 성지 순례이니만큼 화려하게 해야 할 필요는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황금까지 싣고 올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사는 왜 그토록 많은 황금을 싣고 왔던 것일까요?
소금을 싣고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투아레그인 캐러밴. 말리 제국 이전부터 서아프리카 지역은 사막을 통해 외부와 교류하였다. 금과 소금 등이 주 수출품이었다고 한다.
답은 간단했습니다. 말리 제국과 자신의 부유함을 과시하기 위해서였죠. 속된 말로 하면 자신의 나라가 이렇게 부자라고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한 나라의 군주이고,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받기도 하는 만사 무사였기에 단순하게 자랑만 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동 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칫 '이슬람 세계의 변방' 정도로만 평가받을 수도 있었던 말리 제국의 위상을 세우려고 했죠. 다르게 말해서, 황금으로 말리 제국의 '국격'을 높이려는 것이었습니다.
만사 무사는 카이로의 그 유명한 기자 피라미드가 있는 곳에서 며칠간 야영을 한 뒤, 카이로 시내로 들어와서 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그는 길에서 자신이 마주친 모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금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일설에는 무사가 카이로에서 3달 동안 머물면서 매주 금요일마다 사원을 새로 지어줄 정도로 어마어마한 돈을 뿌리고 다녔다고도 하죠. 카이로 역시 역사가 깊고 부유하기로는 다른 도시들 못지않았지만, 그런 카이로 사람들조차도 만사 무사의 행보에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카이로의 술탄과 회동했을 때도, 처음에는 무사가 술탄에게 예를 갖추기를 거부하는 등의 트러블이 있었지만 얼마 안 가 사이좋게 교류하면서 선물도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무사는 술탄뿐만 아니라 카이로의 관리들과도 자주 만나면서 친목을 다지고 말리 제국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었다고 하죠.
만사 무사의 관대함은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그는 메디나와 메카에서도 다른 순례자들 및 시민들에게 선물을 그야말로 뿌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말리인들과 다른 순례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거나, 도적의 습격을 받아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등 문제가 여럿 발생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무사히 순례를 마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국가 정상들의 만남은 큰 이슈가 됩니다. 우리나라만 봐도 대통령이 다른 나라의 국가 정상과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했고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자세한 기사들이 쏟아지곤 하죠. 물론 성대한 만찬과 온갖 독특한 이벤트들은 여러 가지 목적과 계산에 따른 결과일 것입니다. 국가 간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한지, 그리고 세계적인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를 과시하려는 이유도 있겠죠. 또한 회담 당사국들이 노리는 바를 이루기 위한 일종의 '어필'이기도 할 것입니다. 만사 무사의 성지 순례 역시 그런 것이었죠. 그렇다면 그의 순례는 성공적이었을까요?
말리 제국의 주요 도시들이었던 팀북투(좌)와 젠네의 거대 모스크(우). 나무가 부족한 지역이라 진흙으로 건물을 짓고, 쉽게 보수하기 위해 나무 말뚝을 벽에 박아두었다.
만사 무사 본인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그리고 말리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말리 제국의 이름을 널리 알린다'는 목적으로만 보면 아마도 대성공일 것입니다. 가늠조차 되지 않는 엄청난 부를 접한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하나같이 충격에 빠졌고, 온갖 기록과 소문이 퍼져나갔기 때문이죠. 무슬림들은 물론, 멀리 떨어진 유럽에까지 말리 제국의 금에 대한 소문이 전해졌습니다. 제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이자, 사하라 교역로의 요충지였던 팀북투는 전설 속에나 나올 법한 황금의 도시로 유럽인들에게 회자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하면서 생겨난 '엘 도라도' 전설과도 비슷했죠. 실제로 팀북투를 찾은 유럽인들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유럽인들에게 팀북투는 반쯤은 전설 같은 곳으로 여겨졌던 모양입니다. 오늘날에도 영어에서 '팀북투'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의 비유로 사용하는 것이 그 흔적이죠.
만사 무사는 나라를 가꾸는 데도 열심이었습니다. 그가 중점을 둔 것은 바로 종교와 문화를 발전시키는 일이었죠. 무사는 중동 지역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나라의 내실을 다지려고 했습니다. 비록 몽골의 침입이나 십자군 전쟁 등으로 큰 타격을 입긴 했지만, 여전히 중동의 이슬람 문명들은 학문적으로 크게 진보하여 있었기 때문이죠. 만사 무사는 사원(모스크)과 신학교(마드라사)를 팀북투, 가오와 같은 주요 도시들에 건축하였습니다. 남의 나라에서도 매주마다 모스크를 세워줄 정도로 부유한 나라였으니 그의 대규모 건축 사업에 필요한 재정은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는 중동 지역으로부터 서적을 수입하여 자신이 지은 학교에 구비하였고, 지식인들 역시 초빙하여 말리 사람들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프랑스 우표에 나온 팀북투의 상코레 대학. 말리 제국의 멸망 후에도 팀북투는 유럽인들에게 머나먼 전설과 환상의 장소처럼 여겨졌다.
만사 무사가 세운 건물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바로 상코레 대학입니다. 그곳은 25,000명의 학생들을 수용할 정도로 거대했고, 수십 만 권이나 되는 책과 문서들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말리인들은 물론, 말리에 문물을 전해주었던 중동 지역에서까지 학자들이 찾아와서 지식과 배움을 구했다고 하죠. 무사의 적극적인 노력 덕분에, 팀북투는 바그다드나 카이로, 다마스쿠스 등 중동 무슬림들의 주요 도시들 부럽지 않은 문화와 지식의 보고로 성장하였습니다. 말리 제국을 멸망시킨 송가이 제국 등도 상코레 대학을 보존하고 발전시켰죠. 16세기 후반 모로코의 침략 이후 서서히 몰락하면서 상코레 대학을 비롯한 팀북투 등의 주요 도시들 역시 수난을 겪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지만 그럼에도 만사 무사와 그의 순례, 그리고 그가 남긴 유산들은 세계사에 그 이름을 남겼습니다. 전설적인 황금의 나라이자, 머나먼 이웃들 못지않은 문화와 지식을 갖춘 제국으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