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 끈기와 집념으로 나라와 백성을 구해낸 최무선
왜구를 제어하는 데는 화약만한 것이 없으나 우리나라에는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
최무선이 늘상 했다고 전해지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화약을 도입한 인물다운 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 말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화약을 통해 왜구를 물리치는 데 평생을 바친 인물이었습니다.
1300년대 후반, 고려는 안팎으로 큰 시련을 겪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고려의 실권을 잡았던 무신정권은 몽골과의 전쟁이 끝나면서 무너졌지만, 몽골의 입김 아래 왕이 여러 차례 교체당하는 등 고려의 정국은 여전히 불안정했습니다. 몽골, 그 중에서도 현재의 중국에 자리 잡았던 원나라가 각종 실정과 농민 반란 등으로 흔들리고 약해지자 공민왕이 그 틈을 노려 몽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였지만 암살당하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적들의 침입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고려를 견제하기 위해 원나라가 군대를 보내기도 했고, 원나라에 맞서 일어났던 홍건적들이 고려를 침공하면서 왕이 피난을 떠날 정도로 큰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남쪽에서는 일본 해적, 즉 왜구들이 빈번하게 쳐들어 와 사람을 해치고 식량과 재물을 약탈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있었죠. 고려가 군대를 보내 왜구를 막으려 시도했지만 오히려 대패할 정도로 당시 왜구들의 세력은 강성했습니다. 기세등등해진 왜구들은 남해는 물론 서해까지 출몰하였고, 심지어 고려의 수도 개경(현 북한 개성)이 위치한 강인 예성강까지 진출하여 약탈을 벌였다고 합니다. 고려 전역을 제 집 드나들듯 했던 것이죠.
물론 고려는 왜구를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해안가의 요충지마다 왜구를 막기 위한 방어 시설을 구축하고, 왜구들의 배에 맞서기 위한 군선을 건조하였습니다. 최영을 비롯한 유능한 인물들이 왜구를 막기 위한 준비를 진두지휘하였죠.
그리고 여기서 최무선이 등장합니다. 최무선은 중국에서 사용하던 화약을 들여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죠. 최무선이 태어나기 200여 년 전, 남송 수군이 금나라 수군을 상대로 화포를 사용한 바 있었습니다. 그 이후 중국인들은 화약을 활용한 다양한 무기를 개발하였고, 이는 중국인들이 여진족과 몽골 등에 맞서 싸우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중국인들과 싸우면서 화약의 위력을 누구보다 먼저 실감했던 북방의 정복자들 역시 중국을 정복한 뒤 화약을 유용하게 사용했죠. 하지만 고려는 최무선 이전까지 화약을 자체 생산하는 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최무선은 당시 무기를 제작하고 관리하는 관청인 군기감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기를 담당하는 관리였으니만큼 그는 화약에 대해 다른 고려인들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서두에 적은 최무선의 저 말 역시, '중국에서만 사용하는 저 무기를 우리도 쓸 수 있다면...'이라는 실무자의 한탄이 아니었을까요?
그는 고려를 드나드는 중국 상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그 신무기를 손에 넣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은 화약 제조법을 기밀에 부쳐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각종 첨단 무기들을 군사 기밀로 관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최무선 개인으로서는 역부족이었지만, 결국 그의 노력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중국 남부에서 온 이원이라는 상인으로부터 화약에 반드시 필요한 재료인 염초의 제조법을 입수할 수 있었던 것이죠. 염초는 질산칼륨 결정인 '초석'으로, 불이 붙으면 폭발을 일으키는 성질을 지닌 화약의 핵심 재료였습니다. 이것을 유황, 목탄과 배합하여 만드는 것이 바로 최초의 화약이었죠. 최무선은 중국 상인에게 들은 정보를 이용하여 염초 생산은 물론, 유황과 목탄의 배합 비율까지 알아내어 성공적으로 화약을 제조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최무선의 일대기에는 당시 최무선의 노력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최무선은 중국 강남(장강 아래 지역을 말합니다)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항상 바로 만나서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 어떤 상인이 대강 안다고 대답하자 집으로 데려가 옷과 음식을 주며 수십 일 동안 물어서 대강 요령을 들은 뒤 도당(당시 고려의 최고 행정기관)에 시험해 보자고 말하였지만, 다들 믿지 않고 최무선을 사기꾼이라고 헐뜯었다. 몇 해 동안 계속하여 의견을 올리자 결국 그의 성의에 감동하여 화약국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책임자로 삼아서 마침내 화약을 만들게 되었다. - 태조실록 1395년(태조 4) 4월 19일
고려 정부는 처음에는 최무선의 제안을 바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비록 벼슬을 하고 있었지만, 개인이 중국의 기밀을 입수하여 자체적으로 제조 및 시험하여 만들었다고 하니 그 신뢰성에 의문을 가진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았겠죠. 하지만 최무선이 계속해서 자신의 의견을 내자, 마치 중국 상인이 그랬듯 고려 정부 역시 그의 노력을 인정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후 최무선은 각종 화포와 그 화포에 장전하여 발사할 화살 등의 여러 가지 무기를 만들어냈습니다. "보는 사람들 중에 놀라고 감동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최무선의 성과는 고려 정부에서도 인정할 수준이었던 것 같네요.
고려 정부는 최무선의 성과를 발빠르게 도입하였습니다. 화약 도입 이전까지의 해전은 대부분 백병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불화살과 같은 무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배를 통째로 부수고 불태우기에는 역부족이었죠. 하지만 화약이 도입된 이상 얘기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1380년, 고려 수군은 100여 척의 배를 동원하고, 각종 화약 무기들을 탑재한 뒤 왜구들에게 시험해 보기 위해 출정했습니다. 최무선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직접 전장에 나섰죠.
왜구들은 금강 하구에 배를 정박한 뒤 대대적인 약탈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왜구들의 배는 300여 척, 많게는 500여 척에 달했다고 하죠. 왜구들은 이전에 하던 대로 배들을 한 곳에 모아 전력을 집중시키는 전술을 택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서 고려군이 쏜 화포에 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고려군의 몇 배에 달하는 배들이 순식간에 불타버렸다고 하며, 살아남은 왜구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났지만 이성계 등이 이끄는 고려 육군에게 패배하였죠.
최영과 이성계 등은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면서 고려의 실세로 급부상하였습니다. 고려를 아예 멸망으로 몰아넣을 뻔한 대규모 침략을 물리친 그들은 아마도 고려인들에게는 어벤저스 같은 영웅들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바로 그의 활약이었죠. 최무선은 비록 최영이나 이성계 정도만큼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들 못지 않은 영웅으로 대우받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졸기(卒記)'라는 기사를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인물이 사망했을 때 그의 간략한 생애와 평가를 담은 글이죠. 최무선은 조선이 세워진 지 3년 뒤인 1395년에 사망하였기에,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 역시 실려 있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하였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들이 전부 최무선의 졸기에 담긴 내용들이었죠. 그렇다면 조선은 최무선을 어떻게 평가하였을까요?
(전략)최무선이 화포를 쏴 (왜구의)배를 다 태워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는 육지에 올라와 전라도와 경상도를 노략질하고 다시 운봉(현 전라북도 남원)에 모였다. 이때 태조(이성계를 말함)가 병마도원수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왜구를 섬멸하였다. 이리하여 왜구가 점차 줄어들고 항복하는 자가 잇달아 나오면서 바닷가 백성들이 생업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것은 태조의 덕에 하늘이 응답한 것이었지만, 최무선의 공 역시 작지 않았다. - 태조실록 1395년(태조 4) 4월 19일
조선시대에 기록된 것이니만큼, 태조 이성계의 활약을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최무선의 활약 역시 이성계 못지 않게 컸고, 그 덕분에 바닷가의 백성들이 왜구의 근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높게 평가하는 것 역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최무선은 조선이 세워진 뒤에도 벼슬을 받는 등 예우를 받았으며 그 아들인 최산해도 아버지를 이어 세종대왕 때까지 계속해서 화약 무기를 제작하고 개발하는 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최무선을 통해 화약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화약은 고려를 풍전등화 같은 위기로 몰아넣었던 왜구를 격파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맡으면서 한국사에서도 화려하게 그 이름을 알리게 되죠. 태조 때 조선이 최무선의 공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아들을 등용하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 조선 역시 고려의 유산이었던 화약 무기를 더욱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잘 알려진 문종 화차나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수많은 총통 및 대장군전과 같은 수많은 무기들이 바로 그 결과물이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1. 약탈하는 왜구(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WakouAttack.jpg?uselang=ko#%EB%9D%BC%EC%9D%B4%EC%84%A0%EC%8A%A4)
3. 진포대첩지비(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297)
4. 최영 묘(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469)와 태조 어진(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410284&cid=47322&categoryId=47322)
5. 천자총통과 대장군전(경남 진주시 진주성 소재) - 작성자 직접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