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 기사들을 떨게 만든 '보헤미안 랩소디'
인류는 소위 '문명'이 발생하기 한참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하여 무기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선사시대 하면 흔히 떠오르는 돌이나 뼈, 나무 등으로 만든 창으로부터 오늘날의 핵무기에 이르기까지, 무기의 역사를 정리하자면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수많은 무기들 중에서도 특히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고 평가받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화약이죠.
'냉병기'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주로 칼이나 창, 화살 등의 무기를 뜻하는 이 단어에는 '차가울 냉/랭(冷)'이라는 글자가 붙죠. 정말로 무기가 '차가워서' 붙은 이름은 아닙니다. '열병기'라는 단어를 보면 알 수 있죠. 말 그대로 '뜨거운(熱)' 병기, 즉 화약을 사용한 병기와의 대비로 붙은 이름이 바로 냉병기입니다. 즉 화약의 사용 유무가 무기 분류의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실제로 화약 사용 전과 후의 전쟁 양상은 얼마나 바뀌게 되었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화약이 전장에 등장하여 크게 활약했던 몇 가지 사건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419년 7월 30일, 현재 체코 공화국의 수도이기도 한 프라하의 시청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감옥에 갇혀 있던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던 중, 군중을 이끌던 성직자가 시청에서 날아온 돌에 맞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성난 군중들을 폭발하게 만들었고, 사람들은 시청으로 들이닥쳐 시청에 있던 법관이나 행정관 등을 모두 창밖으로 집어던져 버렸습니다. 몇 층 높이의 건물에서 떨어진 관리들은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죠.
당시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이었던 바츨라프 4세가 충격을 받고 1달 만에 사망할 정도로 이 사건의 여파는 컸습니다. 보헤미아 뿐만 아니라 전 유럽을 뒤흔들 정도였죠. 그렇다면 프라하 시청에서 관리들을 살해한 이 사람들은 누구였고, 왜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일까요?
그들은 '후스파'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후스파는 보헤미아의 신학자이자 프라하 카렐 대학교의 교수였던 얀 후스(1370?-1415)의 이념을 따르는 사람들을 말하죠. 얀 후스는 크리스트교의 개혁을 강하게 주장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후대에 등장하는 마르틴 루터 등의 선배격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후스는 가톨릭의 타락을 비판하고 개혁을 통해 원래의 크리스트교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부르짖었죠. 라틴어 뿐만 아니라 체코어로 찬송가를 보급하거나 체코 문자를 개량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던 후스는 로마 가톨릭과 독일, 즉 신성 로마 제국의 미움을 샀습니다.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고, 교회의 부패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보헤미아인들에게 독일의 지배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였던 후스의 주장에 당연히 동조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결국 후스는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한 뒤,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되어 재판을 받고 화형당하고 말았습니다.
후스를 따르는 사람들 역시 로마 교회와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았습니다. 프라하에서 벌어진 창문 투척 사건은 여기에 저항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나 다름 없었죠. 보헤미아 대중들과 지식인들은 물론, 보헤미아에 뿌리 내리고 살아온 귀족들 또한 압제에 저항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과 로마 교회는 당연히 이러한 저항을 앉아서만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바츨라프 4세의 동생인 지기스문트(1368-1437)는 곧장 보헤미아를 공격했죠. 교황 역시 후스파 '이단'을 향해 십자군을 선포하였습니다. 보헤미아인들은 유럽 전장에서 맹위를 떨쳤던 기사들과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사들처럼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군인도 아니었고, 무기나 군마 등의 물자 역시 턱없이 부족했죠.
그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얀 지슈카(1360?-1424)였습니다. 어릴 때 한쪽 눈을 잃었던 그는 오래 전부터 군 지휘관으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1410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연합이 튜턴 기사단을 대파했던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측 용병으로 참전하여 활약한 것이 가장 잘 알려져 있죠(리투아니아어로 '잘기리스 전투'라고 부르는 이 전투는 이전 글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 그는 후스파 중에서도 강경파에 속했고, 보헤미아에 위기가 닥쳐오자 사람들을 지휘하여 프라하를 떠나 타보르 요새로 향하던 중 수도메르라는 곳에서 적의 기병 700여 명을 맞닥뜨렸습니다. 고작 400여 명에 불과했던 후스파는 훈련조차 되어 있지 않았으며 물자 역시 부족했기에 처음에는 항복 의사를 밝혔지만, 왕당파 기사들은 무시하고 공격을 가했죠.
후스파는 결국 맞서 싸우기로 했습니다. 얀 지슈카와 후스파 리더들은 연못과 습지로 둘러싸인 평지에 진형을 잡고, 농민들의 마차 12대를 개조하여 방벽을 구축하였습니다. 그리고 핸드캐논 등의 무기를 총동원하여 기사들의 돌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죠. 이 전투에서 후스파 역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안개가 자욱한 날을 틈타 기사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무사히 타보르로 대피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얀 지슈카는 타보르에서 후스파의 총사령관 중 한 명이 되었고, 특히 '타보르파'라고도 불린 강경 후스파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수도몌르에서 활용하였던 이른바 '바겐부르크'를 후스파의 주된 전술로 채택하였습니다. '마차'를 뜻하는 '바겐(wagen, '폭스바겐' 등에 쓰이는 그 바겐입니다)'과 '성'을 뜻하는 '부르크(bourg, '함부르크' 등 독일의 여러 지명으로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의 합성어에서 알 수 있듯, 전투용으로 개조한 마차를 사슬로 엮어 임시 방벽을 구축하는 것이죠. 이것은 중세 유럽 전투의 핵심이자 중추였던 기사에 대한 효과적인 대처법이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고 해도 창으로 마차까지 꿰뚫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죠. 후스파는 마차를 끌고 전장에서 미리 유리한 지점을 선점한 뒤, 마차벽을 치고 기사들의 돌격을 막아내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적 공격을 막아내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후스파는 기사들을 제압할 무기도 갖추고 있었죠. 바로 화약 무기였습니다. 후스파는 창이나 도리깨, 쇠뇌 등의 무기를 사용했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화력은 바로 총과 화포였습니다. 당시 기사들이 입었던 갑옷은 웬만한 무기로는 뚫는 것조차 어려웠다고 합니다. 후스 전쟁보다 한참 전이었던 중동에서의 십자군 전쟁 때에도 서유럽 군대의 갑옷은 이슬람 궁병들의 화살 세례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갑옷을 입고, 군마에까지 갑옷을 걸친 기사들은 살아있는 전차 같은 위용을 뽐냈습니다.
하지만 화약 무기는 달랐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다루는 냉병기에 비해 훨씬 강한 위력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죠. 얀 지슈카는 최신 무기였던 총포가 가진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활용하였습니다. 당시의 총포는 지금과는 달리 장전에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사거리도 매우 짧았습니다. 얀 지슈카가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던 마차벽은 총을 장전하는 병사들을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며 시너지를 이루었죠. 또한 훈련받지 않은 병사들이 눈앞에서 돌진해오는 수십, 수백의 기사들을 보고 겁에 질려 사거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총포를 쏘아 탄약을 낭비하고 빈틈을 노출하는 일도 줄여주었습니다. 후스의 신념을 지켜 압제자들과 맞서 싸우자는 종교적인 열의, 그리고 독일인들에 맞서 보헤미아의 자유를 쟁취하자는 일종의 민족적 의식이 후스파의 정신적 방패가 되었다면 마차벽은 물리적인 방패가 되어준 셈이죠.
타보르를 거점으로 하여, 얀 지슈카와 후스파는 지기스문트 황제의 군대와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전투로는 프라하 근처 비트코프 언덕에서 벌어진 비트코프 전투가 있습니다. 지슈카는 프라하에 있던 온건 후스파의 지원 요청을 받고 타보르를 나섰습니다. 지기스문트는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프라하를 공격하기 시작했죠. 프라하에 도착한 지슈카는 주요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비트코프 언덕으로 향했고, 그곳에 진영을 구축했습니다. 그러자 수백 명의 기사들이 언덕을 공격했죠.
당시 비트코프 언덕에 있던 후스파는 수십 명에 불과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남성 26명과 여성 3명밖에 없었다고도 하고, 60명 정도는 되었다고도 하지만 열세인 것은 변함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스파가 미리 나무와 돌로 벽을 쌓아두었고, 언덕 북쪽은 낭떠러지였기에 열 배가 넘는 기사들의 돌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습니다. 전투가 개시된 다음 날, 일부 후스파 병사들이 언덕 남쪽의 포도밭을 돌아 십자군을 기습 공격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기습을 당한 기사들은 혼비백산했고, 많은 기사들이 절벽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습니다. 십자군은 400명에서 500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를 입었고, 지기스문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공격을 중단하였습니다. 반면 후스파의 전사자는 2~3명에 불과했죠. 이후 비트코프 언덕은 얀 지슈카의 이름을 따서 '지슈코프'라는 새 이름을 얻었고, 현재까지도 그 승리를 기념하는 장소로 보전되어 있습니다.
이후에도 얀 지슈카는 지기스문트의 수차례에 걸친 침공을 모두 격퇴하였습니다. 후스 전쟁 도중 남은 한쪽 눈까지 잃었지만, 그조차도 지슈카의 연승 행진을 가로막지는 못했죠. 얀 지슈카는 1424년 전염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충무공 이순신을 떠오르게 합니다. 얀 지슈카의 전술과 전략은 충무공이 조선의 전함과 화포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언제나 이길 수 있는 곳에서 싸워 이겼으며 엄격한 군율과 뛰어난 리더십으로 아군을 이끌었던 것과 똑같으리만치 닮아 있습니다.
후스파가 사용했던 화약 무기는 누가 봐도 열세였던 후스파를 승승장구하게 만들며 후스 전쟁은 물론 이후 중세 유럽의 전쟁까지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또한 그들의 화약 무기는 언어에까지 큰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당시 보헤미아인들은 핸드캐논을 '호루라기, 피리'를 뜻하는 '피스탈라(píšťala)'라고 불렀죠. 또한 적의 보병들에게 발사하여 큰 피해를 입히거나, 커다란 폭발음으로 적의 말을 놀라게 하는 데 사용하였던 소형 포는 '군중, 무리'를 뜻하는 '후프'에 체코어 접미사 '니체'를 붙여 '후프니체(houfnice)'라고 불렀습니다. 이 두 단어는 각각 권총을 뜻하는 영단어 'pistol'과 곡사포를 뜻하는 영단어 'howitzer'의 어원이 되어 오늘날까지 또 다른 의미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1. 화약(https://en.wikipedia.org/wiki/Gunpowder#/media/File:Black_Powder-1.JPG)
3.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된 얀 후스. 카를 프리드리히 레싱 作(https://en.wikipedia.org/wiki/Jan_Hus#/media/File:Hus_(Lessing_1842).jpg)
4. 타보르 소재 얀 지슈카 석상. J. 스트라코프스키 作(https://en.wikipedia.org/wiki/Jan_%C5%BDi%C5%BEka#/media/File:Zizka_tabor_statue.jpg)
5. 마차벽에서 쇠뇌와 총 등으로 싸우는 후스파를 묘사한 15세기 그림(https://en.wikipedia.org/wiki/Wagon_fort#/media/File:Wagenburg.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