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마르와 바르지아

저항의식의 상징이자 황금기의 유산이 된 동굴 도시

by 서창현
Panorama_Wardzia.jpg 조지아 남부의 동굴 도시 바르지아는 판타지를 방불케 하는 외관을 자랑한다


본래 러시아어 발음인 '그루지야'로 많이 불리던 나라 '조지아'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관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2/3 정도 되는 이 작은 나라는 그로 인해 외세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곤 했죠. 하지만 조지아인들은 늘 맞서 싸웠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자신들의 문화와 조지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조지아의 이런 역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가 있습니다. 조지아 남부 에루셸리 산의 암벽에 있는 이른바 '동굴 도시' 바르지아입니다. 13층 건물 높이에 6천여 개의 방을 가지고 있는 바르지아는 성당과 학교, 도서관, 심지어 마굿간까지 갖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안에는 사람이 마실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샘물까지 있어서, 식량만 충분하면 자급자족까지 가능할 정도였죠.


Vardzia_-_ვარძია_-_2014_6.jpg 바르지아 성모안식 성당의 프레스코화. 바르지아를 만든 기오르기 3세와 타마르가 그려져 있다.


바르지아의 한 성당 안에는 두 명의 왕이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있습니다. 바로 기오르기 3세(?-1184)와 타마르(1160?-1213)죠. 기오르기 3세 때 바르지아에 처음 수도원이 생겨났고, 그의 딸 타마르 시기에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타마르는 바르지아 뿐만 아니라 조지아 왕국 전체를 환골탈태시켰습니다. 조지아 최초의 여왕 타마르의 치세 하에서 작은 왕국 조지아는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를 자처할 정도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습니다.


조지아 왕국은 타마르의 증조부 다비트 4세 때 기틀을 잡고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국내의 반란과 이슬람 세력의 침입 등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죠. 기오르기 3세 역시 재위 말년에 귀족들의 대규모 반란을 진압한 후, 1178년 장녀인 타마르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하고 죽을 때까지 나라를 함께 다스렸습니다. 타마르에게 왕국을 통치하는 경험을 시켜주기 위함이기도 했고, 여성인 타마르에게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보태주어 자신의 사후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예방하려는 목적도 있었죠. 타마르는 그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찌감치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길러 나갔고, 6년 후인 1184년 아버지가 죽자 왕관을 물려받았습니다.


Юрий_Андреевич_Боголюбский.png 러시아 공작의 아들 유리 보골류브스키는 타마르의 첫 남편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 및 추방당했다.


20대의 젊은 군주 타마르는 귀족들이 보기에 호락호락한 애송이였습니다. 조지아의 봉건 귀족들은 다시 한 번 왕을 손에 넣고 나라를 쥐락펴락하기 위해 타마르를 '길들이려' 시도했죠. 그들은 정치의 일거수일투족에 간섭하여 타마르의 권위에 온갖 제약을 가했을 뿐 아니라, 타마르의 남편 역시 마음대로 결정해버렸습니다. 여러 명의 후보 중에 선택된 타마르의 남편은 유리(1160-?)라는 러시아인이었죠. 그는 본래 러시아 공국 중 하나였던 블라디미르-수즈달 공작의 아들이었지만, 아버지가 목숨을 잃은 뒤 유목민족인 킵차크인들에게 달아나 그들과 함께 성장했던 특이한 인물이었습니다.


러시아 출신이지만 정체성은 유목민에 더 가까웠을 이 남자는 용맹하고 재능있는 전사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타마르와의 관계는 전혀 좋지 않았죠. 타마르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결혼이었던 데다가, 유리와의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갈등을 많이 빚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타마르는 몇 년 동안 자신에게 충성하는 귀족들의 힘을 키우는 등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조지아에서 가장 권위가 강했던 총대주교의 죽음이 바로 그 기회였죠. 타마르는 다음 총대주교로 자신의 지지자를 임명하는 데 성공했고, 곧이어 유리와의 이혼을 선언한 뒤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쫓아냈습니다. 유리는 지지자를 모아 두 번이나 반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패배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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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르와 두 번째 남편 다비트의 자식들인 기오르기 4세와 루수단. 두 사람은 타마르의 뒤를 이어 차례대로 조지아의 왕이 된다.


타마르는 자신의 의지로 다음 남편을 선택했습니다. 유능한 장군이자 타마르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다비트 소슬란(?-1207)이라는 사람이었죠. 그는 국왕의 남편으로 왕과 대등한, 혹은 왕조차 능가하는 권한을 행사할 수도 있었지만 끝까지 신하의 자세를 유지하며 타마르에게 힘을 보태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타마르는 권력을 온전히 손에 넣었고, 스스로를 '왕중왕'이라 칭하며 위엄을 떨쳤습니다. 다비트와의 관계 역시 전 남편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타마르는 아들 기오르기(1191?-1223)와 딸 루수단(1194-1245)을 낳았고, 남매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차례대로 조지아의 왕이 되었죠.


내부 정리에 성공한 타마르는 국외로 눈을 돌렸습니다. 북쪽의 험준한 코카서스는 물론 남쪽의 아르메니아에 이르기까지 조지아를 호시탐탐 노리는 적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죠. 타마르와 그의 충신들이 이끄는 조지아는 적들을 차례차례 무찌르며 강해져 갔습니다. 오늘날의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물론, 조지아로부터 수천km 떨어져 있는 오늘날의 이란 북부까지도 원정을 떠날 정도였죠. 지역의 군소 영주나 군벌들은 물론, 페르시아와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 같은 강적들과도 전쟁을 벌여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그 결과 타마르는 흑해와 카스피해, 그리고 코카서스 일대를 아우르는 넓은 영토를 얻을 수 있었죠.


The_XIIc._cross_of_Queen_Tamara_of_Georgia_-_Gold,_rubies,_emerald_and_pearls.jpg 타마르가 사용했다고 하는 황금 십자가. 타마르와 조지아 왕국은 루비와 에메랄드, 진주로 화려하게 장식된 이 십자가처럼 세계적으로 돋보였다.


하지만 전쟁만으로 조지아의 황금기를 불러올 순 없었습니다. 타마르는 외교와 문화적인 방법을 전쟁 이상으로 잘 활용했죠. 당시는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었습니다. 아이유브 왕조의 건립자 살라딘은 기독교인들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으며 위세를 떨치고 있었죠.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 등이 이끄는 제3차 십자군은 살라딘조차 애먹을 정도로 강적이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성지를 되찾지 못한 채 유럽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서유럽과 무슬림 사이에 끼어 주도권을 되찾지 못한 채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타마르는 이처럼 중동에서 기독교 세력이 밀려나자, '중동 기독교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조지아 정교회의 위상을 드높이려고 시도했습니다. 조지아 왕국의 사절단과 선교사들이 이웃나라들을 적극적으로 왕래하기 시작했죠. 그들은 동방 정교회를 믿던 불가리아나 가톨릭 왕국이 있던 키프로스, 심지어 아이유브의 본거지인 이집트까지 퍼져나가 성당과 수도원을 건설했죠. 타마르는 예루살렘의 정교회 사원인 십자가 수도원에 머무는 조지아인 수도사들을 직접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ConquestOfConstantinopleByTheCrusadersIn1204.jpg 타마르의 조카이자 비잔티움의 황족인 알렉시오스 콤네노스가 탈출해 트라페준타 제국을 세운 직후, 콘스탄티노플은 같은 기독교도인 십자군에게 함락, 파괴당한다.


타마르가 다스리는 조지아는 외교적으로도 굳건하게 입지를 다졌습니다. 비잔티움의 황태자 마누엘 콤네노스는 타마르의 여동생과 혼인하여 두 아들 알렉시오스와 다비드를 두었는데, 정권 다툼에서 패하여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알렉시오스 형제는 목숨을 건져 콘스탄티노플을 빠져나왔고, 당시 비잔티움 황가의 둘뿐인 남성 생존자라는 명분을 들어 자신들이 비잔티움의 정당한 황제임을 주장했습니다. 타마르는 조카들이 흑해 연안의 트레비즌드에 나라를 세우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죠. 그들이 세운 트라페준타 제국은 이후 200년 가량 유지되었고, 비록 강대국이 되진 못했지만 흑해 무역을 통해 부유한 나라로 성장하였다고 합니다. 트라페준타 제국이 세워진 직후, 콘스탄티노플이 제4차 십자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어 비잔티움 제국이 일시적으로 소멸되었기에 제국의 정통을 이었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국제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죠. 그들을 지원했던 조지아의 국제적인 위상 역시 덩달아 올라갔고 말입니다.


800px-Vepkhistkaosani_zichy.jpg 타마르에게 시를 올리는 쇼타 루스타벨리. 두 사람은 조지아 황금기의 상징적인 인물들로 지금까지도 조지아인들에게 위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이처럼 조지아가 군사, 외교, 종교적으로 인정받는 강국이 되면서 국내 문화 역시 융성해졌습니다. 조지아 문화는 기본적으로 같은 정교회 문화권인 비잔티움과 비슷했지만, 페르시아와 아랍 문화의 영향도 받아서 색다르게 발전했다고 합니다. 또한 십자군의 영향이었는지 기사도 문학 역시 유행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서사시 『표범 가죽을 입은 기사(베프키스트시오사니)』를 지은 쇼타 루스타벨리가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었죠. 그는 조지아에서는 마치 셰익스피어와 같은 인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Gelati_galleryfull1.jpg 쿠타이시에 위치한 겔라티 수도원. 타마르의 증조부인 '건설자' 다비트 4세가 건설했다. 타마르의 시신이 안장된 것으로 추정되며, 딸 루수단도 이곳에 묻혔다.


타마르는 결코 쉬운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라는 상황은 물론, 조지아 최초의 여성 군주라는 부담감, 결혼까지 간섭할 정도로 적대적이었던 귀족들, 무엇 하나 만만치 않은 것이 없었죠. 하지만 그는 오늘날로 치면 사회 초년생에 불과할 때 왕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악조건들을 극복하여 조지아를 강국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는 50대 초반에 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왕국을 훌륭히 가꾸었습니다. 조지아인들이 바르지아의 샘물에 '타마르의 눈물'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위대한 왕을 기리는 하나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황금기를 맞이한 조지아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앞으로는 이전처럼 외세의 침략에 떨지 않아도 된다고 자부하였을 수도, 그럴 필요가 없다고 자신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도중에도 바르지아의 동굴 도시 같은 '대비책'을 만들어내는 것은 역시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위협에 대한 조지아인들의 우려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Georgians_vs._Mongols,_by_Hayton_of_Corycus.jpg 몽골군과 싸우는 기오르기 4세(오른쪽 푸른 옷). 호라즘을 멸망시킨 몽골 장군 제베와 수부타이는 코카서스 산맥을 돌아 귀국하며 조지아, 러시아 등을 파괴해버렸다.


실제로 타마르가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지아인들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죠. 몽골 제국이 나타난 것입니다. 몽골군은 실크로드를 호령하던 제국 호라즘을 멸망시킨 뒤, 그 군주를 뒤쫓다가 조지아까지 발을 들였습니다. 타마르의 아들 기오르기 4세가 몽골에 맞서 싸웠지만 크게 패했고, 치명상을 입은 뒤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죠. 몽골군은 조지아를 통과해 그대로 북쪽으로 빠져나갔고, 그의 여동생 루수단이 조지아의 두 번째 여왕으로 즉위했지만 조지아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잃고 쫓겨난 호라즘의 잔존 세력과 오랜 전쟁을 벌이며 나라는 더욱 쇠약해졌고, 뒤이어 몽골의 두 번째 침략을 받고 만 것이죠. 조지아는 다른 나라들이 그랬듯 몽골군의 말발굽에 처참히 짓밟혔습니다. 루수단은 매년 조공을 바치고 수만 명의 조지아인을 몽골군에 보내는 조건으로 겨우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타마르가 사망한 지 고작 26년 만인 1239년의 일이었습니다.


황금기에 세워졌던 바르지아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몰락했습니다. 몽골군으로부터 도망친 사람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던 동굴 도시는 지진으로 인해 동굴 내부가 드러날 정도로 큰 손상을 입었죠. 수백 년 뒤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받으면서 바르지아는 결국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조지아 역시 몽골과 페르시아, 오스만, 러시아 등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당하고 지배를 받으면서도 꿋꿋이 견뎌내었습니다. 그렇게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조지아인들은 타마르가 만든 바르지아를 복원하였습니다. 지금도 이 독특한 동굴 도시는 조지아의 끈질긴 저항의식의 상징이자, 위대한 대왕과 찬란했던 황금기를 기리는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1. 바르지아 동굴 도시

(https://en.wikipedia.org/wiki/Vardzia#/media/File:Panorama_Wardzia.jpg)

2. 바르지아 성당에 그려진 기오르기 3세와 타마르 부녀의 프레스코

(https://en.wikipedia.org/wiki/Tamar_of_Georgia#/media/File:Vardzia_-_%E1%83%95%E1%83%90%E1%83%A0%E1%83%AB%E1%83%98%E1%83%90_-_2014_6.JPG)

3. 타마르의 첫 번째 남편 유리 보골류브스키

(https://en.wikipedia.org/wiki/Yury_Bogolyubsky#/media/File:%D0%AE%D1%80%D0%B8%D0%B9_%D0%90%D0%BD%D0%B4%D1%80%D0%B5%D0%B5%D0%B2%D0%B8%D1%87_%D0%91%D0%BE%D0%B3%D0%BE%D0%BB%D1%8E%D0%B1%D1%81%D0%BA%D0%B8%D0%B9.png)

4. 기오르기 4세와 루수단

(기오르기 4세: Giorgi IV Lasha - George IV of Georgia - Wikipedia

루수단: Fresco of Rusudan of Georgia - Rusudan of Georgia - Wikipedia )

5. 조지아 국립박물관 소장 타마르의 십자가

(https://en.wikipedia.org/wiki/Georgian_Golden_Age#/media/File:The_XIIc._cross_of_Queen_Tamara_of_Georgia_-_Gold,_rubies,_emerald_and_pearls.jpg)

6. 콘스탄티노플과 제4차 십자군

(ConquestOfConstantinopleByTheCrusadersIn1204 - Fourth Crusade - Wikipedia)

7. 타마르에게 시를 바치는 쇼타 루스타벨리

(Vepkhistkaosani zichy - Tamar of Georgia - Wikipedia)

8. 타마르가 안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겔라티 수도원

(Gelati galleryfull1 - Tamar of Georgia - Wikipedia)

9. 몽골군과 조지아군의 전투

(Georgians vs. Mongols, by Hayton of Corycus - Mongol invasions of Georgia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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