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창현 Apr 15. 2024

벙어리 저금통 이야기

말해야 할 때와 말하지 말아야 할 때

"이 그릇은 무엇이냐?"

"벙어리입니다."


1737년, 한 선비가 과거시험을 보러 서울까지 왔다가, 희한하게 생긴 그릇을 보고 하인에게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었습니다. 선비가 다시 물어도 하인은 계속 '벙어리입니다.'라고만 합니다.


"내가 이 그릇 이름을 물었는데 너는 어찌 자꾸 '벙어리'라고만 하는 것이냐?"


하인이 자기에게 농담을 하는 것이라 여겼는지 화가 난 선비가 다시 캐물었습니다.


"아이고, 소인이 어찌 농담을 하겠습니까요?" 


선비가 화를 내자 하인이 놀라며 대답했습니다. 


"이 그릇 이름이 '벙어리'라서 그렇다고 말씀드린 것 뿐입니다요."


선비는 조금 관심이 생겼는지, 화를 풀고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 그릇은 입은 있지만 말은 못하여서 사람들이 벙어리라는 이름을 붙였지요. 조그만 여자아이들이 이 그릇에 돈을 넣어두었다가 그릇이 다 차면 부숴서 꺼냅니다. 돈을 함부로 쓰지 않으려는 것입니다요."


저금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선비가 웃음을 터뜨립니다.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것이 이 그릇밖에 없더냐? 병과 옹기와 항아리에는 입이 없단 말이냐? 그것들이 말을 못한다고 벙어리라고 부르는 것은 내 들어본 적이 없다. 이것만 구태여 벙어리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을 것인데."


시골에서 올라온 선비와 하인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여관 주인이 재미있었는지 갑자기 끼어듭니다.


"손님께서는 모르시는군요. 그것은 사람이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조물주의 장난입니다. 조물주는 사람들에게 웃는 표정으로 부드럽게 말하지 않지만, 그의 뜻은 아이들의 노래가 되기도 하고 물건의 형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요. 조물주의 뜻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전해주는 것이랍니다."


과거시험 보러 오는 양반들을 상대해서 그런지 유학자들 못지않은 학식을 지니게 된 듯한 여관 주인이 말을 이이었습니다.


"이 그릇이 세상에 나온 지 10년이 되지 않았습니다만, '벙어리'라고 한 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지요. 하나는 '사람이 벙어리 같다'고 풍자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람이 벙어리 같아야 한다'고 경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말을 해야 할 때도 벙어리처럼 말을 하지 않는 것을 풍자하고,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말을 해서 재앙을 불러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벙어리 같아야 한다고 경계하는 것이지요."


선비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여관 주인의 말을 듣고만 있습니다.


"순 임금(중국의 전설에 전해지는 성군)이 무슨 잘못이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 신하인 고요와 익은 순 임금에게 계속해서 간언을 올렸습니다. 무왕(은나라의 폭군 주왕을 물리치고 주나라를 건국한 왕)이 무슨 잘못을 하였겠습니까? 하지만 그 신하인 주공과 소공은 무왕에게 간언을 그치지 않았지요. 한문제와 당태종은 전부 몸소 태평성세를 이룬 군주였지만, (한문제의 신하인)가의는 한숨을 쉬다 못해 통곡을 했고 (당태종의 신하인)위징은 십사(十思)의 상소로도 모자라 십점(十漸)의 상소를 올렸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다 그랬던 것처럼, 여관 주인은 고전을 근거로 자기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네요.


"그 신하들은 전부 '우리 임금께선 이미 성군이시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혹시라도 잘못이 있을까 염려하면서 눈을 밝히며 숨김 없이 대담하게 바른말을 한 것입니다. 임금이 잘못하면 그 잘못을 지적하였고 정치에 잘못이 있으면 정치를 논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성군이 되고 신하는 자신의 책임을 다했죠."


"지금 우리 임금님께서는 요순과 문왕과 무왕 같으신 분이라서 잘못을 말씀드릴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신하가 되어서 '이만하면 충분해'라고 하면서 거기에 안주할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도 영원히 어질고 공손하고 경건하고 의로우신 임금으로 계실 수 있도록 해야지요. 근데 지금의 신하들은 '우리 임금께서는 이미 성군이시고 세상은 이미 잘 다스려지고 있다'며 한 달이 지나도록 임금의 덕을 논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고 한 해가 지나도록 국정을 논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게 벙어리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걸 두고 '풍자한다'고 한 것이지요."


그럼 경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관 주인은 바로 대답하였습니다.


"말 한 마디로 화평과 우호를 맺을 수도 있고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자식에게 말할 때는 효도에 따라 해야 하고 신하에게 말할 때는 충성에 따라 해야 하죠. 지위도 없으면서 국정의 장단점을 논하고 책임도 없으면서 정부의 득실을 말하고, 심하면 공론을 어기고 자기 무리를 위해 죽으면서 눈을 부릅뜨고 논란을 벌이다가 끝내 임금을 배반하는 죄를 짓고도 자기가 재앙에 휘말려 죽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걸 경계한다는 것이죠."


웅변은 은이나 침묵은 금이라고 했던가요. 책임지지 못할 말, 자신의 입장에서 해선 안 될 말도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내뱉다가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빠져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 '벙어리'가 풍자하는 것을 잘 돌이켜 보시면 뛰어난 신하가 될 것이고, 경계하는 것을 잘 본받으시면 처세의 달인이 될 것입니다."


선비는 그릇 하나로 두 가지 지혜를 알려 준 여관 주인의 말에 감탄하였습니다.


"이름이 무엇이오? 그대의 이름을 나의 글로 남기어 후세에까지 전하고 싶소."


여관 주인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말 없이 자신의 입을 가리켰죠. 


선비는 그의 뜻을 바로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여관 주인의 말처럼, 당시 신하들이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세태를 비판하였죠. 그는 서울에서 발견한 '벙어리 저금통'이 벙어리가 된 당시의 세상을 상징하는 '요사스러운' 물건이라고 생각하며 통을 깨부숴 버렸습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과거시험을 포기한 것이죠. 대신 그는 지역의 유명한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학업에 열중하였고, 수많은 저작을 남기며 당시의 대표적인 학자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러자 정부에서 그에게 벼슬을 주면서 나랏일을 해달라고 불렀고, 이후 이 선비는 중앙과 지방을 오가며 여러 가지 업적을 남기고 이후 정조가 되는 세손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위의 '벙어리' 일화가 준 영향이었는지, 이후에도 그는 옳고 그른 것을 확실하게 나누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그의 가치관은 그가 가장 공들여 집필한 그의 역사서에 고스란히 담겼죠. 바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역사 기록물로 꼽히는 《동사강목》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순암 안정복(1712~1791)이 지은《동사강목》은 개인이 집필하였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세세한 고증과 꼼꼼한 자료 조사를 통해 나온 저서였습니다. 오늘날처럼 인터넷도 없는 시절에 자료를 수집하고 합리적이지 못한 것을 걸러내어 역사를 집필하는 것은, 한 가지 일화도 빼놓지 않고 꼼꼼하게 기록하며 스스로를 늘 돌이켜보고 반성했던 당시 학자들이었기에 해낼 수 있는 업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의 이전글 타마르와 바르지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