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 나오는 몽골군. 적을 추격하며 활로 공격하고 있다. 그들은 후세의 나폴레옹, 히틀러와 달리 겨울에 러시아를 공격해 정복하였다.
1237년 12월, 살을 에는 칼바람과 새하얀 눈으로 가득한 러시아 땅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퍼졌습니다. 몽골군이 침입한 것입니다. 유럽인들에게는 그들이 타르타로스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처럼 보였습니다. 몽골군은 자신들에게 저항한 도시를 모조리 불태웠고,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몽골군에게 붙잡혀 노예가 되거나, 가혹한 추위 속에서 피난길에 올라야만 했죠.
수백 년 뒤 러시아 땅을 침공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그리고 독일의 히틀러는 똑같은 실수를 범했습니다. 바로 러시아의 겨울을 잊은(혹은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지 못한) 것이죠. 반면 몽골인들은 달랐습니다. 유럽 원정군의 사령관이었던 수부타이는 러시아를 침공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 바로 겨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몽골 고원은 러시아 못지않게 추운 극한의 환경이었기에 몽골인들에게는 익숙했기 때문이죠. 그들의 말 역시, 눈 덮인 초원에서도 알아서 발굽으로 눈을 파고 그 밑의 풀을 뜯어먹을 정도로 강인하고 적응력이 강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러시아의 수많은 강과 호수들이 꽁꽁 얼어붙어 몽골 기마병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고속도로'가 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죠.
현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위치한 키예프 공국의 '황금 성문'. 키예프 등 루스 공국들은 몽골에 멸망하기 전까지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서 번영했다.
루스인들은 몽골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루스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대공작 유리 2세는 수도 블라디미르에 가족들을 남겨 지키게 한 뒤 북쪽으로 물러나 지원군을 모으려 했죠. 그는 블라디미르의 요새가 몽골군에 맞서 버텨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수도는 고작 6일 만에 함락당하고 그의 가족은 물론 시민들도 몽골군의 칼날에 희생되었습니다. 대공 본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군의 기습으로 살해당했죠.
몽골군은 잠시 한숨을 돌린 뒤 키예프(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포위했습니다. 몽골군은 오랫동안 번영했던 도시 키예프를 파괴하는 것이 아까워서 사절단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죠. 하지만 키예프 사람들은 사절단의 머리를 돌려보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습니다. 키예프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항전의지를 북돋웠겠지만 결과는 참혹하였습니다. 키예프 역시 며칠 만에 불타버렸죠.
몽골군에게 파괴된 블라디미르. 키예프를 비롯한 다른 도시들도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중간지점에서 번영하던 루스인들은 몽골의 족쇄 하에 놓였습니다. 아시아 반대편에 있던 고려의 왕들이 그랬듯, 루스의 왕족과 귀족들도 주기적으로 몽골 칸의 천막으로 가 충성을 다짐하고 공물을 바치며 칸의 신임장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어떤 이는 칸의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머나먼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 갔다가 그만 병에 걸려 다시는 조국을 밟지 못했고, 또 어떤 이는 칭기즈 칸의 숭배물에 고개를 조아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당하기도 했죠. 반면 몽골의 눈에 든 지배자들은 몽골의 위세를 등에 업고, 서쪽의 오스트리아나 헝가리 등 이웃 나라들의 왕과 혼인관계를 맺으며 권위를 세웠습니다. 루스 공작들은 몽골의 신임을 얻고 현재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러시아의 현재 수도인 모스크바와 모스크바 강. 모스크바는 원래 조그만 마을이었지만, 몽골 지배기에 점차 성장하여 루스의 주도권을 차지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주류'로 부상한 도시가 있었습니다. 바로 모스크바였죠. 모스크바가 러시아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147년이라고 합니다. 본래는 루스인들의 국가 중 하나였던 '수즈달 공국'에 속한 조그만 동네에 불과했던 곳이죠. 모스크바는 키예프를 비롯한 다른 도시들에 비하면 '별 것 아닌' 곳이었기에, 몽골의 침입에 비교적 피해를 덜 입었습니다. 전쟁을 피해 달아난 사람들이 모스크바로 모여들면서 마을은 점차 성장했습니다. 모스크바와 이웃 도시 트베리는 볼가강과 오카강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였기에 경제적으로도 점차 번영하게 되었습니다. 모스크바의 지도자들은 그 기회를 잘 활용하였고, 적극적으로 돈을 벌고 땅을 구매하면서 역량을 키웠습니다.
몽골의 내분 역시 모스크바의 성장에 한몫하였습니다. 칭기즈 칸의 장남 주치와 그 자손들이 물려받은 '주치 울루스'는 러시아를 비롯한 광활한 영토를 다스렸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분열을 거듭하며 크게 약해졌죠. 오랜 경쟁 끝에, 마마이라는 인물이 꼭두각시 칸을 세우고 실권자로 섰습니다. 루스 공작들은 칸이 바뀔 때마다 일일이 찾아가서 충성과 공물을 바치느라 곤욕을 치렀지만, 시간이 지나며 칸의 권위가 생각보다 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몽골의 내전을 이용해 자기들의 이득을 챙기려고 했죠.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이반의 아들 드미트리'라는 뜻이다. 아버지인 '공정한' 이반 2세의 뒤를 이어 대공이 된 그는 모스크바를 크게 발전시켰다.
그 와중에 등장한 사람이 바로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이바노비치였습니다. 드미트리는 라이벌인 트베리 공작 미하일은 물론 리투아니아 대공국과도 대립하는 상황이었죠. 그는 적의 침략을 대비해 자신의 도시 모스크바를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하였습니다. 모스크바의 목조 요새였던 '크렘린'을 더 튼튼한 돌로 다시 축조한 것이죠. 크렘린은 리투아니아와 트베리의 연합군에게 몇 번이나 공격을 받았지만 굳건히 버텨내면서 드미트리의 기대에 보답하였습니다.
리투아니아가 독일의 침입 등으로 바쁜 틈을 타서, 드미트리는 미하일을 압박하였습니다. 미하일은 몽골의 마마이에게 달려가 충성을 다짐했고, 드미트리를 벌해줄 것을 요구하였죠. 마마이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뜻을 바꾸었습니다. 드미트리 역시 마마이를 찾아가서, 더 많은 재물을 바치며 '로비'를 벌였기 때문입니다. 이후 몇 차례의 전투 끝에, 결국 미하일은 드미트리를 '형'으로 부르며 그의 우위를 인정했죠. 드미트리는 명목상으로나마 러시아 지역의 주인으로 인정받으며 우뚝 서는 듯 보였습니다.
벨리키 노브고로드 시의 기념물에 묘사된 드미트리. 그는 돈 강에서 마마이를 꺾으며 '돈 강의 드미트리'라는 '드미트리 돈스코이'로 불리게 된다.
앞서 적었듯 모스크바의 급격한 성장은 몽골의 내분을 충분히 활용한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스크바가 너무 강성해지면서 오히려 몽골에게 위기감을 안겨 주었죠. 당시 주치 울루스는 크게 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서쪽에서는 앞서 소개했던 마마이가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로 있었죠. 반면 동쪽에서는 토크타미시라는 몽골 황족이 여러 경쟁자들을 꺾으며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마마이는 토크타미시와의 결전을 벌이기에 앞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로 하고 모스크바를 먼저 꺾기로 마음 먹었죠.
드미트리는 더 이상 몽골에 굴복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에게는 엄청난 재물이 있었고, 수많은 적들을 물리친 크렘린도 있었죠. 더구나 모스크바의 귀족들과 교회 역시 드미트리의 활약에 찬사와 칭송을 보내며 그의 편을 들어 주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몽골에 맞서 '성전'을 하기로 마음 먹었죠.
쿨리코보 전투에 앞서, 모스크바의 수도사 페리스베트가 몽골 군인과 결투를 벌여 장렬히 전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실 상황이 드미트리에게 그다지 유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군대가 많은 것도 아니었고, 리투아니아나 트베리처럼 그의 몰락을 호시탐탐 노리는 적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마이는 이미 리투아니아의 군대를 끌어들인 상태였죠. 하지만 드미트리는 '다시 몽골의 신하가 되어 이전보다 더 많은 공물을 바쳐라'는 마마이의 최후통첩을 간단히 무시하고 전장으로 나섰습니다. 몽골군은 모스크바 군대보다 숫자가 많았지만, 모스크바 군대는 사기가 넘쳤죠. 몽골을 돕기로 한 리투아니아 군대가 약속한 시각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도 그들에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1380년, 드미트리는 돈 강 서편의 숲에 정예군을 미리 숨겨놓은 뒤,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강 건너 쿨리코보 평원에서 몽골군과 일전을 치렀습니다. 러시아의 문헌에 따르면, 당시 몽골의 한 장군이 '기사도적인 전통'에 따라 일대일 결투를 요구하였고, 페리스베트라는 수도사가 그에 응했습니다. 그는 용맹하게 말을 몰아 적을 창으로 찔렀지만, 그 역시 적의 창에 찔려 장렬히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드미트리는 두 번이나 자신의 군마를 잃고 죽을 뻔했습니다. 몽골군은 모스크바에게 우세를 점했죠. 결국 드미트리는 강을 건너 퇴각하라고 명령했고, 몽골군은 그 뒤를 바짝 추격했습니다.
이반 뇌제의 연대기에 묘사된 쿨리코보 전투
바로 그때 드미트리가 숨겨놓았던 모스크바 정예군이 몽골군에게 기습을 가했고, 마마이는 깜짝 놀라 달아났습니다. 지휘관이 도망치는 것을 본 몽골 군인 대다수도 혼비백산하여 달아났고, 모스크바 군대는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죠. '이반의 아들 드미트리'라는 뜻이었던 드미트리 이바노비치는 이 전투 이후 '돈 강의 드미트리'라는 뜻의 '드미트리 돈스코이'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한 번의 전투로 별칭까지 붙을 정도로, 그 승리는 루스인들에게 뜻 깊은 승리였죠.
사실 쿨리코보 전투에서 모스크바의 사상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드미트리는 당시 사망자 80명의 장례 비용으로 1루블을 지불했는데, 총 300루블을 지출했다고 하니 무려 24,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뜻이 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미트리의 자신감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그것이 앞으로 다가올 재앙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이반 뇌제의 연대기에 나오는 토크타미시 칸. 실제로는 전혀 다른 생김새였을 것이다. 그는 분열 중이던 몽골 제국을 부흥시킬 만한 지도자였다.
전투 이듬해인 1381년, 토크타미시가 칼카 강에서 마마이를 물리치며 주치 울루스를 차지하였습니다. 칼카 강은 루스인과 몽골군이 처음 만나 싸웠던, 어찌 보면 루스의 운명을 결정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토크타미시의 승리는 루스에게는 또 다른 시련의 전조가 되었죠. 칸에 등극한 토크타미시는 모스크바를 비롯한 루스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토크타미시는 칭기즈 칸이 그랬듯 치밀하게 계획을 꾸몄습니다. 그는 루스 상인들이 모이는 곳을 기병으로 급습해 모조리 사로잡은 뒤, 자신이 러시아 지역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새어나가는 것을 원천봉쇄하였죠. 토크타미시의 군대가 쥐도 새도 모르게 강을 건너 러시아 땅에 나타나자 루스인들은 경악했습니다. 많은 귀족들이 몽골에 엎드려 자비를 구걸했죠.
모스크바를 공격하는 몽골군과 저항하는 모스크바 시민들. 지도자의 부재와 도시의 내분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용감히 저항하였다.
모스크바의 귀족과 교회 역시 드미트리에게 일단 항복한 뒤 기회를 엿보자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일전의 승리에 도취하여서였을까요,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결사항전을 결심하였습니다. 드미트리의 자신감에 근거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크렘린은 여전히 건재했을 뿐만 아니라, 타타르인들로부터 들여온 대포로 수비를 더 보강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는 마마이를 물리쳤던 것처럼, 토크타미시 역시 물리쳐서 러시아의 완전 독립을 이루어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옛날 블라디미르 공작 유리가 그랬듯, 드미트리는 토크타미시에 맞설 지원군을 불러오기 위해 도시를 비우고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몽골군이 그가 자리를 비운 모스크바를 포위했고, 모스크바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죠. 드미트리에게는 불행하게도, 그 공포는 모스크바 사람들의 분열을 야기하고 말았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대공을 따라 북쪽으로 몸을 피하려 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분개하며 부자들을 살해하고 도시를 완전봉쇄해버렸습니다.
모스크바 시민들의 의지는 굳건했습니다. 그들은 몽골군에 맞서 3일 밤낮으로 도시를 지켜냈죠. 드미트리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토크타미시는 모스크바 시민들에게 화친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너희 도시에 대한 포위를 풀 테니, 대신 성문을 열고 나와 내 호위병들이 도시를 구경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다른 루스 도시의 지도자들이 칸의 약속을 보증해주었기에, 모스크바 시민들은 그의 말대로 성문을 열어주었습니다.
토크타미시에게 불타는 모스크바. 모스크바의 함락은 기세 좋게 치솟던 러시아인들의 독립 의지를 단숨에 꺾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토크타미시의 '약속'은 거짓이었습니다. 그는 모스크바인들이 성문을 열어주자마자 근위병들을 데리고 공격을 가했죠. 물러난 줄 알았던 나머지 몽골군이 뒤따라 들어오면서, 모스크바는 허무하게 함락당했습니다. 토크타미시는 처음 생각한대로 모스크바에게 '본때'를 보여 주었습니다. 몽골군은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교회와 집 등을 모조리 불태웠습니다. 책이나 종교적인 성물과 같은 귀중한 물품들도 그 재앙을 비껴가진 못했습니다.
북쪽에서 그 소식을 들은 드미트리는 절망하였습니다. 하지만 토크타미시에게 맞설 힘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그는 결국 아들을 볼모로 보낸 뒤, 다시 '칸의 충실한 신하'가 되기로 맹세할 수밖에 없었죠. 이후 모스크바를 비롯한 루스인들은 몽골인들에게 다시 군대를 파견하고 수많은 공물을 바치는 신세로 돌아갔습니다. 토크타미시가 모스크바의 저항을 분쇄하면서 이른바 '몽골·타타르의 멍에'는 기약 없이 연장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