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와 지바 도시치
1989년 8월 15일, 경향신문 한 면에는 우에노 도시코, 미우라 구니코라는 두 명의 일본인 여성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 전까지 수감되었던 여순 감옥 간수의 후손들이었죠.
이렇게만 보면 '광복절에 가장 나와서는 안 될 것 같은' 사람들 같지만,
사실은 '광복절이기에 나와야 할' 일본인들이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체포된 뒤 이듬해 순국하기까지 여순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당시 안중근 의사를 감시하던 이는 안중근 의사보다 6살 연하였던, 26살의 일본 헌병상사 지바 도시치(千葉十七)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고, 당시 일본의 입헌군주제 및 헌법 수립, 더 나아가 일본이 열강 대열에 '진입'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당연히 을사조약 체결, 더 나아가 36년 간의 비극적인 일제강점기 성립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지만 말이죠.
지바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보기에, 자신이 맡은 '죄수'는 일본의 '위대한 정치가'에게 극악무도한 '테러'를 가한 '테러리스트'였을 뿐이었죠. 그렇기에 지바는 원래 안중근 의사에게 구타와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바는 안중근 의사가 감옥에서 집필한 그의 자서전 『안응칠('응칠'은 안중근 의사의 아명) 역사』를 검열하면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 지바는 그저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을 꼼꼼히 읽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바는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군대를 빼앗고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등의 일을 벌인 이토가 '동양평화의 적'이므로 사살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안중근 의사의 뜻에 감탄하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지바는 안중근 의사를 개인적으로나마 '지사(志士)'로 대우하였습니다.
"당신이 일본 군인인 것처럼, 나 역시 조선의 군인인 의병이다"라는 안중근 의사의 말에도 공감하면서 개인적으로는 그를 '의병'으로 대우하였다고 전해지죠. 안중근 의사는 순국 10여 일 전, 지바에게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군인은 본분을 다하라)',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 나라의 안녕과 위기에 마음으로 애쓰며 걱정한다)' 두 가지 휘호를 써주었습니다.
지바 역시 그런 안중근 의사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형이 집행되기 며칠 전, 독립군들이 몰래 차입한 한복 속의 탈출 계획에 대한 쪽지를 보고도 모른 척 그대로 전해주었다고 하죠. 하지만 안중근 의사는 탈출도 항소도 포기하고 형장으로 향했는데, 이 모습에 감동하고 자기 집안의 신으로 모시기로 결심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그 해 제대한 뒤 집으로 돌아가서 41세에 사망할 때까지 정말로 안중근 의사를 모셨다고 합니다. 지바가 사망한 뒤에도 그의 후손들은 매일 안중근 의사의 사진과 휘호 앞에 기도를 드렸다고도 하죠.
앞서 소개한 기사에서는, 1989년 당시 안중근 의사 의거 80주년을 맞이하여 위령제를 준비하던 일본의 한국연구원이 조사한 결과 이러한 사실이 알려졌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바와 그 후손들의 이야기는 이후 우리나라에도 영화 영웅(2022)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방송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참고
「安重根 의사를 家神으로」 日人2代, 경향신문 11면, 1989년 8월 15일(화) 기사
(1989년 8월 15일 경향신문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