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과 초원과 산악과 숲을 모두 품은 대륙, 그 넓은 땅을 카메라는 그럭저럭 잘 담아낸다.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삼는 영화에게 이 멋진 공간은 그저 압도적인 광활함을 내세운 눈요깃거리로만 써버리기에는 아까운 훌륭한 재료다. 그 공간에 들어서면 고난은 더욱 애처로울 수 있고, 복수는 더욱 간절할 수 있으며, 공포는 더욱 무거울 수 있다. 가령 2015년 作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The Revanant>는 어디에서나 가능한 감정을 오직 이 공간에서만 가능한 방식으로 빚는다.
모든 서부 영화가 아메리카 대륙을 주재료로 삼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뉴멕시코와 몬태나를 잇는 긴 여정이 영화의 처음과 끝을 관통한다면 관객은 으레 그 공간이 영화에서 깊이 다루어지길 기대하게 된다. 부담스럽더라도 <몬태나>는 태생적으로 이 비싼 재료를 요리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다.
전우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숙적 옐로우 호크Yellow Hawk를 고향까지 안전하게 후송하는 임무를 억지로 떠안은 조셉 블로커Joseph Blocker 대위는 죽은 동지들의 무덤을 부여잡듯 마른땅에 엎드려 울부짖는다. 그리고 지평선을 찍어내리는 번개. 그의 적의敵意는 7년이 흘러도 풀리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나, 7년쯤 지났으니 이제 그만 풀어주자는 정치적 계산에 따른 가벼운 호의好意를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울부짖음에선 소리가 나지 않는다.
주인공이 전사한 동료들을 회상하며 울부짖는 이 장면은 무음으로 처리되어 그 울부짖음을 더 크게 만든다
블로커는 바로 이 먼지가 날리는 땅 덩어리 위에서 그저 인디언이 싫은 여느 백인들과는 다른 인물이 된다. 이제 뉴멕시코를 떠나 몬태나에 다다르는 여정, 곧 블로커의 적의가 누그러드는 과정을 지나면서 땅은 점차 푸르러진다. 배우는 그 다양한 지형으로 블로커 대위를 불러온다.
뉴멕시코에서 몬태나로 가는 여정은 공간의 변화를 동반한다
그러나 연기를 제외하면 이 영화에서 적의와 그 적의의 흩어짐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길은 제한적이다. 아메리카 대륙은 배경에 머무르는 수준이다. 또 영화는 블로커 대위를 앞세워 인디언을 증오할 이유가 "군용 가방에 꽉 채워 넣을 만큼 많다"고 설명하면서도, 정작 관객이 그 이유를 듣고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도록 설득하지는 않는다.
"빌리 딕슨, 털리 맥클레인, 에드윈 테이트." 블로커는 전투 중 옐로우 호크의 손에 죽어나간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언급하지만 그 이름들은 관객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처음부터 관객은 다만 조금이라도 옐로우 호크를 싫어할 수 없다. 그는 영화 첫 대사로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소" 따위의 말을 하고는 입을 꾹 다무는 흔한 현자 할아버지 인디언의 전형으로 나타날 뿐이다.
옐로우 호크 후송 작전을 취재하러 온 언론사 간부에게도 그 이름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명령을 받고 화가 난 블로커를 앞에 두고도 실실 웃을 수 있었던 것도 일면 이 때문일 것.
하지만 블로커의 증오는 인디언 일반에 대한 증오로 환원할 수 없다. 만약 그랬더라면 블로커는 그저 탈옥한 인디언을 비인간적으로 체포하면서도 여유롭게 (상큼한!) 레몬을 씹는 바로 그 모습으로만 그려져도 충분했을 것이다. 블로커는 그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는 이유로, 그 누구도 그와 마찬가지로 증오하지 않는 누군가를 증오한다.
때문에 인디언의 공격으로 몇 분 안에 남편과 세 아이를 잃은 로잘리 퀘이드Rosalie Quaid조차 옐로우 호크를 향한 블로커의 증오를 이해하는 창구는 되지 못한다. 퀘이드는 가족을 땅에 묻은 바로 그날 밤에 인디언 옐로우 호크의 며느리가 준 선물을 반감 없이 받아들인다. 블로커가 그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옐로우 호크에 대한 적개심을 내려놓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수갑을 풀어준 결정적 계기는 코만치族의 습격이란 지극히 외부적 요인이다
그러니 블로커의 증오심이 누그러진다는 이야기도 따라가기가 어렵다. 임무 수행에 도움을 줄 수 있으니 수갑을 풀어달라는 옐로우 호크의 요청을 완강히 거부하던 그가 이윽고 본인은 물론 그를 따르는 부하들의 목숨까지도 위험에 빠뜨리면서 옐로우 호크 일가를 보호하는 등 옐로우 호크를 친구(?)처럼 대하게 된 연유는 분명치 않다. 그는 7년이나 지난 전우들의 죽음이 서러워서 곡을 하던 사람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풍광은 몬태나로 가는 길이 멀고 험함을 제시하는 정도로 소모된다.
공공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후 함께 싸우자는 말에 수갑을 풀어주는 건 그럴싸하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뉴멕시코와 몬태나 사이에서 일어난 몇 가지 사건들, 가령 오랜 동료인 토마스 메츠Thomas Metz의 자살과 인디언 연쇄 살인 혐의로 군사 재판을 앞둔 찰스 윌스 병장Charles Wills과의 대면이 있었지만 이것들도 뉴멕시코의 블로커와 몬태나의 블로커를 잇지는 못한다.
메츠는 처음엔 징징대다가, 나중엔 "죽이는 것도 하다 보면 적응이 된다"고 말하더니, 끝에선 느닷없이 지난날 인디언들을 죽인 일을 옐로우 호크에게 사죄하고는 그냥 목숨을 끊어 버린다. 메츠의 자살 동기가 이러저러하니 친구인 블로커도 어련히 과거의 행동을 반성하겠거니 생각해주기에는 황당하리만치 개연성이 없는 사건이다.
블로커는 옐로우 호크에게 "당신이 죽으면 내 일부도 죽을 것"이라 말하지만, 이 말은 윌스 병장에게 해야 할 말이 아닐까?
윌스 병장은 인디언을 죽이던 과거를 블로커 대위와 함께 거쳤지만, 블로커 대위와는 다른 현재를 걷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충분히 블로커를 비추는 깨진 거울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엔 최적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블로커가 그 깨인 거울에 비친 수많은 像 중 어떤 것이 자신의 모습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순간을 보여주지 않는다. 뉴멕시코에서 옐로우 호크를 후송하라는 명령을 받고선 "임무 따위는 신경도 안 쓴다"던 블로커 대위는 이제 목적지 몬태나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곳에서 윌스 병장에게 본인이 인디언을 죽인 것은 (윌스 병장이 인디언을 죽인 것과는 달리) "그저 임무 수행이었을 뿐"이라 말한다. 그러나 블로커 앞에 선 윌스 병장은 블로커가 거친 변화의 계기가 아니라, 이미 일어난 변화를 확인하는 장치일 뿐이다.
마침내 옐로우 호크 일가를 몬태나로 데려온 직후, 더러운 인디언들을 데리고 얼른 꺼지라는 백인들과 싸움을 벌이게 되는 장면은 더욱 혼란스럽다. 임무 수행을 방해하고, 총으로 위협까지 한 사람들이라지만 총을 맞고 기어서 도망가는 걸 뒤쫓아가 가차 없이 죽여버리는 모습은 엉뚱하기만 하다. 영화를 통틀어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살기殺氣. 이 모습에는 단단하지만 약한 적의, 뉴멕시코의 블로커에게서 잠깐이나마 엿볼 수 있었던 그런 적의가 묻어있지 않다.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 이유는 아무리 긁어 모아도 군용 가방은커녕 동전 지갑도 채우기 어려워 보인다.
주인공은 곳곳에서 적의를 품기도 하고, 적의를 품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언제나 공유할 수 없거나 그냥 없다.그저 먼지 날리는 땅 위에 무릎 꿇은 블로커 대위가 있다는 것 뿐. 그리고 지평선을 찍어내리는 번개와. 그러나 그는 뉴멕시코를 떠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