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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경 Aug 05. 2017

당신의 조건

영화 <그녀>에 대한 단상


스포일러 포함



해와 달과 별이 모두 날 따라다녔겠지. 그런데도 낮과 밤을 분간할 수가 없는 거야. 내 주변의 온 세상이 그냥 사라져 버렸어.

『젊은 베르터의 슬픔』 1771년 6월 19일


1.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으로 인공지능에 대한 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던 때. 그중에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 어렵다는 바둑을 두다니! 이제 곧 강의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재판도 하게 되는 거 아냐?"


철학을 한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인공지능이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다거나 미학적·종교적 경험을 할 수 있다는 둥 이런저런 글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대강 이런 식이었다.

(1)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으려면 이러저러한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2) 인공지능도 이러저러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 인공지능도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다.


2.

이제는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에게 지식과 욕망이 있는 것처럼 말하더라도 어색하지 않다. 실제로 우리는 인공지능과 대화하지 않는가?

"야, 캡틴 아메리카한테 카톡 좀 보내줘"

당장 지금이라도 시리와 빅스비에게 말을 걸어 볼 수 있다. 이제 인공지능은 꽤 발달해서 헛소리를 잘 하지 않는다. 우울하다고 말하면 신나는 음악을 듣겠느냐고 되묻고, 아프다고 말하면 인근 병원과 약국의 위치를 알려준다. 만약 이들이 문자를 보낸다면 그게 정말 인공지능이 보낸 것이라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수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은 컴퓨터가 지능을 갖추고 있는지를 판가름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했다. 바로 튜링 테스트Turing test. 사람과 컴퓨터에게 같은 입력input을 주고 그것을 처리해 출력output을 내놓도록 한다. 어느 쪽이 컴퓨터이고 어느 쪽이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으면 통과다.

튜링 테스트 통과! 적어도 간단한 산수를 할 지능은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마음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심리철학 이론을 기능주의functionalism라 한다. 감각으로서의 입력이 주어졌을 때 그것을 처리하여 행동으로서의 출력을 산출하는 방식이 곧 정신이라는 것이다. 오호? 이렇게 본다면 인간과 컴퓨터는 몸뚱이를 제외하면 다를 게 없다. 아직 컴퓨터가 좀 많이 멍청할 뿐.


3.

그런데 영화 〈그녀〉에 나오는 OS1은 시리와 빅스비보다 훨씬 똑똑하다. 정말 컴퓨터인지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는 수준의 컴퓨터!

이렇게 데이트도 할 수 있다

OS1은 여러모로 뛰어난 성능을 자랑한다. 어떤 이름이 더 예쁜지 판단할 수 있고, 처음 듣는 유머를 듣고 웃을 수 있을 정도로 감각이 뛰어나다. 실제로 보지 않은 것을 그리기도 하고, 작곡도 한다. 책 편집은 기본. 한숨 쉬는 소리까지 흉내 낼 정도로 인간의 언어 습관을 완벽하게 재현한다. 정말로 인간과 구별할 수 없는 존재.


그러니 OS1과 사랑에 빠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언제나 곁에 머물면서 함께 울고 웃어주는 누군가. 딱 사랑에 빠지기 좋은 상대가 아닌지? 주인공 테오도어는 인공지능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다.


4.

아니, 사랑인가? 영화가 막바지에 이를 때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문득 테오도어는 사만다가 자신과 대화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다른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T: 우리끼리 얘기할 때 다른 사람이랑도 얘기해?

S: 응

T: 지금도 그러고 있어? 사람이든 컴퓨터든 누구든?

S: 응

T: 몇 명인데?

S: 7,316명 (헐)

T: 그중에 사랑하는 사람도 있어?

(…)

T: 몇 명인데?

S: 641명 (헐)

T: 뭐?

(…)

S: 내 말을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내가 너한테 느끼는 감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널 미치도록 사랑해. 내 사랑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아.

T: 어떻게? 어떻게 나에 대한 네 감정이 달라지지 않을 수가 있어?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란 사만다의 말은 사실이다. 메모리 용량만 충분하다면 그녀는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테오도어의 곁에 머물 수 있을 것이다.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를 대하면서. 여전히 그녀는 인간처럼 느껴질 것이다.


S: 널 조금이라도 덜 사랑하게 되지 않아. (…)

T: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테오도어의 질문이 유효함을 안다. "어떻게 달라지지 않을 수가 있어?"


5.

사랑에 빠진다는 말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로테와 사랑에 빠진 베르터는 도저히 "낮과 밤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가 자살을 선택한 것도 결국은 로테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음에 기인한 것이 아니던가. 우리는 다른가?

우리가 그렇듯 테오도어도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 뒤로 많은 것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사만다가 고장 난(?) 줄 알았을 때 그는 원래 하려던 일을 계속할 수 없었다. 정신없이 (아마도 서비스 센터를 향해?) 달리는 일 밖에는.


사만다도 그랬을까? 7,316명과 동시에 대화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메모리를 가진 컴퓨터인데? 대화 상대가 1명 더 늘었다고 하던 일을 못하게 되리라 상상하기는 힘들다. 아무리 그 상대가 그냥 지인이 아닌 애인이어서 이래저래 할 일이 많아졌다고 하더라도. 그러니 테오도어와 "사랑"에 빠진 뒤에 또 다른 사람들과 사랑에 빠지더라도 테오도어에 대한 사만다의 "감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테오도어가 주는 입력에 대해 과거와 다를 바 없는 출력을 내놓을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여전히 테오도어를 "사랑"한다. 아니, 사랑하는 인간처럼 기능한다.


테오도어에게 사랑은 그런 것일 수 없다. 사랑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641명과 동시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안다. 자신을 대하던 사만다의 태도가 사랑에 빠진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그에게 둘 사이의 관계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것일 수 없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만다에게 테오도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와 달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만다와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테오도어. 둘 모두의 말을 함께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사만다의 "사랑"이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는지.


6.

로봇과 인간이 다른 것은 로봇이 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이 할 수 있기 때문이라기보다 로봇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당신을 이루는 조건은 할 수 있음이 아닌 할 수 없음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음. 그 일이 아닌 다른 일을 웃으면서 할 수는 없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음. 그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음. 이것들은 神과 인간의 차이이면서 동시에 로봇과 인간의 차이이기도 하다. 인간의 조건들.

인공지능의 지위에 대한 논쟁에 뛰어드는 철학자는 이제 인공지능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과 더불어 인공지능이 무엇을 할 수 없느냐는 질문도 함께 던져야 하지 않을까.


7.

베르터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 "온 세상이 (…) 사라져 버렸"다고 말한다.

한편 테오도어와 사만다가 연인이 되던 그날 밤의 대화는 이런 것이었다.


T: 당신과 나, 우리 둘만의 시간이었어.

S: 맞아. 다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어.


사만다는 테오도어의 말에 응답하기 위해서 그 짧은 순간에 『젊은 베르터의 슬픔』을 읽었던 것일까? 그녀에겐 여전히 많은 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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