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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튤 Nov 06. 2020

사랑하는 감각

나는 사랑하는 감각을 타고난 사람이다

나는 사랑하는 감각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런 내게 편지 쓰기는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이다. 글씨를 쓸 수 있게 된 여덟 살부터 나는 사랑의 감각을 십분 발휘하여 절절한 편지를 쓰며 성장해왔다. 편지를 써온 경력으로 따지면 편지 쓰기의 장인 또는 편지 쓰기의 천재 정도는 될 것이다.


내겐 편지를 쓰기 전에 거치는 몇 가지 루틴이 있다. 빈 화면에 초고를 쓰는 일이 그 첫 번째다.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미사여구를 남용하면 편지지가 세장을 훌쩍 넘어가는데 그렇게 되면 수신자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 최선을 다해 예쁘면서 느끼하지 않은 단어와 문장을 찾아내야 한다. 경험 상 편지글은 공백 포함 850자 내외가 적당하다. 두 번째로, 나는 편지지에 글을 옮겨 쓰기 위해 꼭 둔산동에 있는 교보문고로 향한다. 교보문고의 문구류 코너에서 파는 예쁘고 비싼 편지지를 사야만 마음이 놓이기 때문이다.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려 가장 예쁜 접시를 꺼내는 것처럼 아주 신중하게 편지지를 고른 뒤 서점 내 카페에 자리를 잡는다. 셋째로 편지를 쓸 때만큼은 여름에도 따뜻한 차를 마시는 편이다. 찬 음료가 담긴 컵에는 물기가 맺혀 있어 잘 못 만졌다간 편지지가 젖고 만다. 편지지가 울면 나도 울고 싶어 진다. 그런 일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좋다. 따뜻한 차로 몸과 마음을 이완시킨 다음으론 노트북에 적어 놓은 초고를 여러 번 읽어본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에 심어 놓은 사랑을 흘림 없이 잘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서 오는 완벽주의를, 나는 꽤 좋아한다. 빈 종이에 검은색 볼펜으로 돼지꼬리 모양을 여러 번 그어보는 게 마지막 루틴이다. 볼펜 똥이 없고 끊김 없이 잘 나옴을 체크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편지 쓰기를 시작한다.


대개 인사로 시작한다. 안녕 또는 안녕하세요. 편지를 쓰게 된 마음은 구체적으로 적지만 내가 누구인지는 따로 밝히지 않는다. 맨 마지막에 나를 소개함으로 극적인 느낌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쓰는 편지에는 네가 얼마나 귀여운지, 어디가 어떻게 예쁜지를 본문에 쓴다. 거기에 나는 이런 애교를 덧붙인다. 그런데 너는 왜 이만큼 표현 안 해 줘? 같은 것이다. 평소 서운했던 바를 자연스럽게 쓰면서 나를 귀엽게 포장하는 동시에 엄중하게 경고하는 것이다. 다음부터 제대로 표현 안 하면 나는 삐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잘해라…. 고마움의 편지는 좀 더 담백한 내용이 담긴다. 이런 점이 고마웠어, 실은 그것 말고도 고마운 게 많아, 너 덕분에 나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어, 처럼 상황을 짚어주며 표현해야 진짜 고마운 마음을 보여줄 수 있다. 미안한 마음을 담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떠나게 되어서, 평상시 이런 말을 해주지 못해서, 함께 한 시간이 너무 적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미안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 나와 정을 나눴던 상대에 대한 예의이고 배려일 테다. 그렇게 내 마음을 듬뿍 담고 나서는 마무리를 해야 한다. 편지에서 중요하지 않은 대목은 없지만 마지막 단락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 편지는 사랑과 고마움, 미안함이라는 커다란 테마에 따라 달리 쓰지만 마지막은 ‘아련함’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닭똥 같은 눈물이 나오는 아련함일 수도 있고, 순수한 시절을 그리워하는 어른의 아련함일 수도 있고, 씩씩하지만 어쩐지 심장 한 구석이 아려오는 그런 아련함일 수도 있다. 무슨 말을 써도 마지막은 그냥 아련할 수밖에 없다.
실은 최근 좋아하는 남자애와 잘 되지 못해 속상한 내 심정을 편지로 쓴 적이 있다. 두 달 뒤에 전해줄 것으로 계획했지만 그 애를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벌써 써버린 그 편지 마지막에 나는 이렇게 적었다.


너와 다시 연인이 되지 못한다면 친한 친구로라도 지내고 싶어. 좋은 뜻이 담긴 네 이름을 오래오래 부르고 싶거든. 네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내 마음이 얼마나 벅차오르는지 아마 넌 조금도 몰랐을 거야.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릴게. 안녕.


나는 이 편지를 쓰며 눈물을 떨어뜨릴까 멀찍이 떨어져서 글씨를 적었다. 가장 좋아하는 애에게 가장 좋아하는 편지 쓰기를 하는데, 그게 너무 슬펐다. 타고난 나의 사랑하는 감각은 나를 늘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갔고, 나는 그곳에서 사랑만 퍼주다 고갈되어 버려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를 마지막 단락을 통해 절절히 깨달을 때마다 나의 이 천재적인 감각을 증오했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기란 이번 생엔 그른 일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악마가 내려와 사랑하는 감각 대신 사랑받는 감각을 주겠다고 하면 나는 고민 끝에 거부하고 말 것이다. 결핍되어있다고 느끼던 그 애에게 충만한 사랑을 주었던 그 한 번을 맞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의 숙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눈물을 닦고 마지막 말을 마저 적었다.


2020년의 가을을 통과하며. 좋아하는 너에게, 씩씩한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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