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 달린 묘비
현관 앞에는 계절이 두 번 바뀔 동안 한 번도 자리를 옮기지 않은 캐리어가 놓여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여행의 설렘을 담은 도구가 아니다. 내 방이라는 폐쇄된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부피를 차지하는, 바퀴 달린 감옥 혹은 치워지지 않는 묘비에 가깝다. 나는 매일 외출을 포기하며 그 가방의 모서리를 발등으로 스치고 지나간다. 그것은 나를 향한 무성한 비난처럼 그 자리에 박혀 있다.
어느 새벽, 더 이상 이 거대한 부채감을 견딜 수 없어 지퍼에 손을 댔다. 쇠붙이가 맞물리며 내는 날카로운 비명이 고요한 방 안을 갈랐다. 그 가방을 치우고자 열었을 때는 아직도 그 장소의 냄새, 피부를 태우는 듯한 더위가 기억 속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방 안의 공기는 분명 영하에 가까운 냉기를 머금고 있는데, 가방이 열리는 순간 쏟아져 나온 공기는 기분 나쁘게 미지근했다.
그 안에서 옷들은 자기를 좀 꺼내달라고 말하듯 원래 형태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구겨져 있었다. 한때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혹은 낯선 도시의 거리에서 나를 빛내주기 위해 정성껏 다려 넣었을 천 조각들이었다. 이제 그것들은 주인과 닮은 꼴로 짓눌려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구겨진 옷감의 주름 사이사이에 박힌 것은 단순한 먼지가 아니라, 내가 풀어내지 못하고 썩혀버린 응어리진 시간들이었다.
나는 그 구겨진 옷가지들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보았다. 손끝에 닿는 섬유의 감촉은 눅눅하고 불쾌했다. 그 열기 속에 손을 넣고 있자니, 가방 속의 '나'와 가방 밖의 '나' 중 어느 쪽이 진짜인지 혼란스러워졌다. 가방 속의 옷들은 뒤엉켜 서로를 짓누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나는 그 비명을 다시 가두기 위해 서둘러 지퍼를 올렸다.
과거의 뜨거웠던 실패가 현재의 차가운 정적을 침범하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옷 한 벌 꺼내지 못한 채 가방 옆에 주저앉았다. 지퍼를 끝까지 채우자 다시 방 안은 평온한 냉기를 되찾았다. 나는 오늘도 그렇게, 내 삶의 한 부분을 가방 속에 처박아둔 채 죽음을 연기하기로 했다. 떠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지 못한 것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비겁한 핑계를 대면서.